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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그가 삼킨 빨간 알약 <매트릭스 삼부작 (워쇼스키, 1999; 2003; 2003)>(이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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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3시대 2018. 8. 16.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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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삼킨 빨간 알약 

 <매트릭스 삼부작 (워쇼스키, 1999; 2003; 2003)>





이희승*



지난달, 느닷없이 한국에서 들려온 참담한 뉴스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와 웃음을 잃지 않았던 노회찬 의원의 죽음은 그 자체로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무시무시한 속도의 산업화로 이룬 대한민국 번영의 원동력이 되었지만 지난 반세기동안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서 단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노동자와 함께 느린 발걸음을 맞추던 그의 일생은, 특권을 정중히 사양하고 강자의 논리에 거칠게 저항하며 약자의 편에 선 정의를 세우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미 유사한 죽음을 경험한 후에도, 진보 사회로 나아가는 시대적 요구를 가로막기 위해 기득권이 억지로 묻힌 오점을 개인적 부패로 치부하고 견디기 어려운 모욕을 더함으로써, 공익을 위해 일생을 바친 정의로운 정치인을 절벽으로 내모는 일이 아직도 가능하다니. 이제 누가 그의 빈자리에서 목소리 잃은 약자들을 대변하겠다고 할 것인지,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싸움에 아연해지는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습니다. 이렇듯 의인을 제물로 집어 삼키는 정치구조와 그 뒤에 도사린 경제특권세력은 광주항쟁, 유월항쟁, 촛불항쟁을 거치고도 그 힘이 조금도 빠지지 않는 것일까에 생각이 미치자, 1편으로는 모자라 두시간이 넘는 영화 세편을 만들고도 여전히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들의 완전한 승리를 허락치 않았던 매트릭스 삼부작의 지리한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올해 초, 흔치 않은 기회를 맞아 매트릭스 삼부작을 한자리에서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한 예술영화관에서 일요일 오후 시간 전체를 할애해 마라톤 스크리닝을 기획한 것이죠. 넉넉한 휴식시간까지 더해서 장장 8시간 정도 영화관에 앉아 이제는 SF영화의 전설이 된 매트릭스 삼부작을 연달아 감상하자니, 세편을 따로 볼 때는 느끼기 어려웠던 여러 생각이 오갔습니다.



1편이 시작하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네오는 매트릭스의 달콤하지만 치명적인 환상에서 스스로 벗어나기 위해 모피어스의 손바닥에서 반짝이던 빨간 알약을 주저없이 집어 삼킵니다. 이 영웅적 자기 각성의 순간은 당사자인 네오와 구원자를 기다리던 레지스탕스, 그리고 관객 모두가 새빨간 알약 색깔에서 이미 짐작 가능한 혁명적 변화를 기대하게 합니다. 주위의 흥분과 기대 속에 상상 전투 훈련을 일취월장의 속도로 수료한 네오는 자신이 과연 레지스탕스가 고대하던 구원자 (The One)인지 확인받기 위해 오라클을 만납니다. 오라클의 애매모호한 대답을 듣고 자기확신을 얻지 못한 네오이지만, 스미스 요원의 집요한 추적에 굴하지 않고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주어진 자기의 몫을 다하려고 애를 씁니다. 1편의 클라이맥스에서 네오는 늘 자신보다 한발 앞서 있는 스미스 요원의 총에 맞아 느닷없이 죽음을 맞이하죠. 허나, 삼부작의 주인공인 그는 평온한 죽음을 맞기보다는 연인 트리니티의 애절한 노력으로 매트릭스 안에서 부활을 경험합니다. 다시 살아온 네오는 이제 주변의 기대와 시대의 요구로 형성된 역할 수행이 아니라, 스스로의 확신에서 형성된 자기 정체성의 발현으로써의 투쟁을 이어가게 됩니다. 이야기의 짜임새와 창의적인 영상으로 1999년 개봉당시, 전세계 영화팬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매트릭스 1편의 이야기입니다.


4년 후, 연달아 개봉된 2편과 3편은 속편을 고대하던 팬들의 기대로 흥행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1편에서 영민하게 인용-차용된 철학적, 신화적, 문학적, 종교적 레퍼런스들이 반복 변주되고,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퇴치하느라 길게 늘어진 전투씬들은 참신한 CG기술만으로 참아내기엔 역부족이었죠. 저 또한 2, 3편이 개봉되었을 당시에는 같은 의견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덮어쓰기하는 스미스 요원의 진화하는 전투력때문에, 네오가 이끄는 레지스탕스의 싸움은 끝이 날 줄 모르고, 한방에 적들을 섬멸하는 호탕한 승리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어 버립니다. 승자와 패자 모두가 진이 쏙 빠지는 지리멸렬한 투쟁의 연속은 감격스러운 대단원을 기다리는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죠. 하지만, 세편을 나란히 보면서, 삼부작의 구성 자체보다는 영웅적인 클로징에 대한 ‘우리의 기대’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네오가 스미스 요원이 무한 자기복제로 만들어낸 수많은 스미스들과 전투를 벌이는 2편의 중간 장면에서, 네오를 연기하는 키아누 리브스 특유의 심드렁한 표정때문인지 ‘저 표정을 보니, 지금 네오는 1편에서 빨간 알약을 삼킨 걸 후회하고 있는 거야’ 라는 확신마저 들었습니다. 게다가 수많은 전투를 치루고 잠시 휴식을 위해 자이온에 돌아온 장면에서 워쇼스키 감독은 자이온 사람들이 네오를 대하는 여러가지 태도에서 스크린 밖의 관객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영웅, 성자, 이방인, 정치적 이산자, 위험한 혁명가, 얼른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무능력한 장수 등등 네오를 해석하는 여러 의견들을 고루 보여 주면서, 매일의 투쟁으로 생존을 연명하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일종의 근시안적 초조함을 현실적으로 드러냅니다.


실재를 망각하고 얻은 감각의 쾌락과 자유의지적 실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1편의 네오는 아직 매트릭스 안의 존재였습니다. 파란 알약과 빨간 알약의 선택지는 그 선명한 시각적 상징성을 통해 네오에게 실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접근을 허락하죠. 1편이 영웅적 결단과 의지적 선택을 극적으로 그렸다면, 네오가 맞닥뜨린 2편과 3편의 현실은 쾌락과 실존을 등가로 저울질하는 한가로운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향한 몸부림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실존과 인류번영이라는 명분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하루 분투하는 인간들이 자존감과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조건이 됩니다. 그러고 보니, 1편에서 대비가 분명한 색깔로 각각 상징하는 바를 뚜렷하게 보여준 두 개의 알약이 제공된 이후, 삼부작이 끝나도록 네오에게 허락된 음식이란 무색, 무취, 무미의 단백질죽 뿐이었습니다. 두 감독은 실존이라는 1편의 ‘근사한’ 철학적 명제와 끝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는 2, 3편의 초라한 생존의 문제를 이렇게 비교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요?


2, 3편의 네오는 때때로 1편에서 생존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빨간 알약을 선택한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후회할지언정, 1편에서 망설임없이 당당한 자유의지를 발현했던 자신의 선택에 스스로 책임지려고, 징글징글하게 진화를 거듭하는 스미스 요원과 끝도 없는 전투를 치루며 겨우겨우 2, 3편을 살아낸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삼부작을 한자리에서 보고 있자니, 호기롭게 빨간 알약을 삼킨 홍안의 네오가 수도없이 매트릭스를 들락날락하는 동안, 낯빛은 어두워지고 눈빛만 깊어진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던져, 스미스 요원과 숙명의 대결을 끝내고 두번째 죽음을 맞이한 네오는 짐짓 평온해 보입니다. 자이온 사람들이 절멸의 위기에서 벗어나 잠시의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네오는 마지막 자기희생을 선택합니다. 이제 네오 스스로가 알약이 되고, 자이온 공동체는 네오라는 알약을 삼킴으로써, 가망없어 보이는 기계와의 전쟁 중에 소중한 망중한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인류는 다시 빨간 알약을 삼키고 자신들을 위해 지리멸렬한 투쟁을 이어갈 새로운 네오를 기다릴 수 있는 잠시의 시간을 얻게 되죠. 빨간 알약을 선뜻 삼키고, 약자들의 생존을 위해 투쟁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 시민사회의 원로로 남아서 오래도록 경륜과 지혜를 나눠 주기를 기대했던 그들은, 우리에게 또다른 전면전을 앞두고 생각과 전열을 가다듬을 조금의 여유를 주고 떠났습니다. 부디 이 소중한 시간동안, 최선을 다해 자꾸만 의인들을 알약처럼 집어 삼키는 이 불행한 무한반복의 악습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합니다.



* 필자소개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의 미디어 영화학과에서 각색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젼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 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 라캉 포럼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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