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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눈] 함석헌과 양심의 소리(서보명)

비평의 눈

by 제3시대 2018. 9. 6.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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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과 양심의 소리

 




서보명

(시카고 신학대학원 교수)



내 목소리는 나에게 언제나 어색하게 들린다. 듣는 것은 밖의 소리를 듣기 위함이고, 내 목소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함석헌은 우리의 소리가 남을 위한 소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소리가 되기 위해선 내 소리를 내가 듣지 못해야 한다. 그에게 인간은 소리를 듣고 소리를 하는 존재였다. 소리는 말 이전, 생명의 현상이었다. 생명은 소리를 남기고, 그 소리는 어떤 생각이나 개념이 담아내지 못하는 우선적인 것이다. 함석헌은 소리가 생명의 외침에서 시작했다고 믿었고, 그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자 했다. 그리고 우리가 내는 소리는 남을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살아 있지 않은 것들의 소리를 대신할 사명까지 감당해야 한다고 믿었다.


소리에는 자연과 생명의 소리만 있는 게 아니라 문명이 만든 소리도 있다. 함석헌은 자연의 조화를 깨트리는 문명의 기계 소리를 들었다. <이 가난한 백성들을 위하여>란 1964년 글을 살펴보자. “밤중에 집터를 흔들고 심장 밑바닥을 들추고, 뼛속을 쑤시는” 요란한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물었다. “제트기가 뜰 때는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를 내고, 디젤 엔진이 달릴 때는 땅이 터지는 소리를 내며, 철교가 울릴 적에 산하가 아울러 통곡을 하고, 공장이 돌아갈 적에 세상이 온통 으르렁거리니, 도대체 어째서 그런 거며 누가 그렇게 만드는 거냐?” 그것은 외면할 수 없는 문명의 소리였다. 반대로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었다.


노동자의 가쁜 숨소리, 빈민굴에서 나오는 한숨 소리, 무료 숙박소에서 들려오는 앓는 소리, 뒷골목에서 서로 퍼붓는 욕지거리, 사창굴에서 새어 나오는 지저분한 소리, 감옥 담을 넘어 오는 이(齒) 가는 소리, 정보부, 헌병대, 형사실 창틈으로 흘러나오는 악형 소리, 아고고 소리, 자살자의 몸뚱이가 일으키는 마지막 꿈틀거림…….


함석헌은 이런 소리도 문명이 만든 것이라 했고, 문명의 이름으로 외면된 소리라 생각했다. 한밤중의 이 두 소리 – 요란한 기계의 소리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소리 - 가 무관치 않다고 본 것이다. 그는 두 소리에서 같은 소리를 들었다. 기계의 소리는 사람의 소리였다. 함석헌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노동자들의 외침을 한강철교 위 하늘과 땅을 가르는 소리는 내면 달리는 기차 소리에서 들었고, 독재시대 공장의 기계소리에서 노동자들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그는 물었다. ‘엔진을 이루는 강철의 조각 하나하나는 곧 노동자의 살점 아니냐?’ 한밤중 문명의 굉음에 달갑지 않았던 이유는 그 소리에서 “인간성을 읽고 인격의 강탈을 당하고 한 개의 기계로 전락되어버린 그 영원의 슬픔, 영원의 원통, 영원의 애탐의 부르짖음”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들으면 무섭고 놀래고 속이 불안하고 잠을 잘 수 없는 것”이라 했다.


함석헌에게 기계의 요란한 소리와 사람들이 내는 고통의 소리 사이의 관계는 나뭇가지의 높음과 뿌리의 깊음과 같은 것이었다. 식민주의나 독재시대에만 적용될 수 있는 비유가 아니었다. 요란한 소리 때문에 듣지 못하는 소리, 그 소리가 침묵하게 만드는 다른 소리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소리다. 침묵의 소리, 신음하는 소리, 양심의 소리는 귀로 듣지 못한다. 함석헌에게 생각은 양심의 소리에 마음을 기울여 듣는데서 시작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야 들리지 않는 생명의 소리를 듣고 남을 위한 소리가 될 수 있었다.


함석헌의 1953년 시 <인생아>는 소리에 대한 묵상만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기보다 죽이는데 더 익숙한 현대의 삶 그리고 지식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 시의 일부를 들어보자.


생명의 불길 그대론 못 견대 불은 끄고 미지근한 재만을 안는 가슴. 

불꽃 이는 생명의 음악, 그대로는 귀가 막힌다 알아들을 만한 말로 하라고, 

생명을 반쯤 죽여 말로 해놓으면 그것도 벙벙하다 글로 적으라 하고 

남은 생명 또 반이나 죽여 막대 같은 글로 그어놓건만 

그것도 이빨이 안 든다고 열 토막 스무 토막에 토막을 치고 


생명의 깊은 소[沼]에 유유히 꼬리치는 석 자 잉어를 잡노라 애써서 은비늘 다 떨으고, 

잡아서 바로 쳐들고 거꾸로 쳐들고, 껍질을 벗기고 뼈를 쪼개고, 

초 치고 장 쳐 끓이고 볶고, 

이치니 법칙이니 분석이니 통일이니, 비판을 하자 체계를 짜자, 

그러다 보니 흥더분 풀어져 다 헤진 것이 쫄고 타 빼빼 말라붙은 것을 

맛있다 맛있다 하며 입을 다시는 인간.


생명의 있는 그대로를 듣고 보지 못하고 죽여서 소유하려는 인생이라는 비판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시에서 함석헌은 우리가 인생의 대부분을 시체를 만들어 쌓고 치우고 파먹으며 산다고 말한다. 이 강열한 비판은 비유이기도 하지만, 실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생명의 불길을 견디지 못해 불은 끄고 미지근한 재만을 안고 살아가는 인생들에 대한 비판에서 함석헌의 열정이 읽힌다. 그의 시는 소리에서 말, 말에서 글, 글에서 분석과 체계를 따지는 것으로 이어지는 지식의 습성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생명의 뜨거운 불꽃이 내는 소리가 말이 되고 글이 되고 분석과 비판의 대상이 되어 결국 미지근한 재가 되어 사라진다고 한다. 생명의 소리를 반쯤 죽여서 말을 만들고, 그 남은 생명을 또 반이나 죽이며 막대를 그어서 글을 만들고, 행여 생명이 아직 살아 있을까 비판의 토막을 내고야 만다는 그의 비유는 생생하다. 실제로 말은 소리를 정리하고, 글은 말을 정리해 그 문을 닫게 하는 도구로 쓰인다. 말이 이미 죽은 소리이고, 글이 이미 죽은 말이란 비유를 통해 함석헌은 글이 말이 되어야 하고, 말이 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또 막대 같은 글이라 했다. 나무를 잘라내고 말려서 만든 막대를 휘두르듯 글을 쓰지는 않았는지, 함석헌의 시는 글을 쓴다는 모든 사람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마치 이 시가 오늘은 어떤 잉어를 찾아 입맛을 다시고 있는지 묻고 있는 것처럼.


양심의 소리


함석헌은 사람에게 양심이 있다고 믿었다. 양심이라는 게 없다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고 양심이 빠지면 서구사상의 윤리학이나 정치학 그리고 형이상학의 근거가 사라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함석헌에게 사람은 소리를 듣는 존재였고, 양심의 소리는 사람을 도덕적인 삶으로 불러내는 소리였다. 자유롭다는 게 인간의 본질이라 생각했지만,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양심이 주어졌다고 믿었다. 그러나 양심이 자유에 대한 책임을 느끼게 하지만 누구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가진 게 많을수록 양심을 외면하기 마련이었다. 또 양심 때문에 인간은 도덕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지만, 누구나 도덕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권력자들의 양심을 일깨우고자 했다. 거부할 수 없는 양심의 소리를 듣게 만들고 싶었다. 양심의 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함석헌은 그들에게 씨알의 소리를 들려주고자 했다. 씨알에 생명의 소리와 양심의 소리가 집약돼 있다고 믿었다. 역사의 민중들에게 그들이 바로 바로 생명과 양심의 소리를 내야 할 씨알이라는 자각을 심어주고자 했다. 이것은 그가 1970년 <씨알의 소리>를 창간한 이유였다.

함석헌에게서 그만의 양심론이라 할 만한 독특한 생각과 표현을 많이 찾을 수 있지만, ‘양심의 소리’는 오랜 역사가 있는 표현이다. 서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옳고 그름의 차이를 깨닫게 해주는 양심이 있고, 그 양심이 내면의 소리로 들린다는 생각은 소크라테스에서부터 전해진다. 문제는 그 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가에 있다. 하나님의 소리, 창조된 인간 내면에 있는 선한 의지의 소리, 죄의식의 교리가 만들어낸 소리, 강요된 윤리관의 무의식이 내는 소리 등 다양한 입장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최근 인문학이나 신학에서 부각되지 않기 때문에 서구학문에서 양심이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설명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는지 망각하기 쉽다. 양심이 인기가 없는 이유는 진화론의 입장이나 문화적으로 설명되지 못할 양심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을 양심과 같은 보편의 가치로 설명하고 싶지 않은 시대의 흐름도 그에 한몫을 한다. 하지만 양심에 대한 함석헌의 신뢰는 한결같았다.

함석헌의 양심론에서 특이할 만한 내용을 살펴보자. 그의 글에는 양심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양심에 순응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 안의 양심을 가꾸고 다듬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양심의 문제는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양의 마음으로 보살피지 않으면 마비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함석헌은 양심을 자신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마음이라고 했다. 자신을 비판의 대상으로 여기는 마음은 자기중심의 자세에서 벗어나 ‘전체의 자리’에 서려는 마음이고, 이 마음이 바로 양심이었다. 나를 나의 자리에서 벗어나 전체의 자리로 향하게 하는 양심은 초월적인 개념이다. 나의 자리가 자유의 자리라면 전체의 자리는 책임의 자리라 할 수도 있겠다. 함석헌은 양심을 자신의 철학의 핵심적인 과제, 곧 자아에서 벗어나 전체에 이르는 삶과 사유의 차원에서 이해했다. 따라서 그 이해는 그만의 생각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20세기 서양에서 사라져가는 양심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를 회복시킨 하이데거와 그에 대한 대안적인 인식을 발전시킨 레비나스를 간단히 생각해 보자. 하이데거에게 실존적인 자기만의 삶을 사는 길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양심의 소리는 나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분해내는 소리였다. 양심의 소리는 내가 세상이 인정하는 삶이 아니라 나만의 삶을 진정과 자신감으로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나의 그런 가능성은 세상과의 관계역시도 계산적이고 기술적인 관계가 아니라 관심과 돌봄의 관계를 가능케 한다. 양심의 소리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하이데거에게 양심이 인간 내면에 남겨진 신의 음성이라는 입장은 그건 루터와 같은 신학을 답습하는 것이었다. 칸트처럼 양심을 모든 인간이 원래부터 갖고 있는 도덕적인 경향으로 보는 것은 양심을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으로만 이해하는 것이었다. 하이데거는 양심의 소리가 내 안에서 나올 뿐, 그 밖의 배경은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에게 양심의 소리를 듣고 세상의 일반적인 습성에서 벗어나 나의 존재를 돌아보는 것은 순전히 나의 선택이었다.

양심의 소리를 듣고 이에 응답하는 과정이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서 필수적인 요소였다면, 레비나스의 타인의 철학에서도 양심은 비슷하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에게 양심은 내 안에 있는 타인의 소리였다. 그 소리는 존재의 자유가 주는 풍족함에 취해 있는 나를 일깨운다. 양심은 내가 누리는 자유에 대한 책임을 묻게 만들고, 타인과의 (윤리적인) 관계를 가능케 만든다. 그에게 양심은 타인을 환영하는 그 자체였고, 그 행위가 바로 철학의 善이었고 초월의 시작이었다. 레비나스에게 자유를 향한 나의 의지를 억제시키고, 나의 이익을 뒤로 하고 타인을 환영하는 윤리적 상황은 세상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지만, 외면할 수 없는 양심의 소리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에 대한 짧은 단상에서 양심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함석헌의 입장이 다르지만 연결과 비교의 가능성은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 특히 레비나스와의 비교는 이 글의 제한된 목적을 넘어서 의미 있는 작업이라 보인다. (레비나스의 ‘선’과 함석헌의 ‘참’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양심이 이성적인 자기 이해에서 벗어나 타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문장은 레비나스에 대한 설명으로 쓸법하지만 함석헌에게도 적용이 가능해 보인다. ‘나의 이익을 구하는 합리성은 양심의 소리를 죽인다’와 같은 문장도 마찬가지다. 그 사이의 차이도 분명하다. 하이데거에게 양심의 자리가 나 개인에 있었고, 레비나스에게는 타인에 있었다면, 함석헌에게 그 자리는 전체에 있었다. 전체는 나와 타인 사이의 갈등과 대립의 상태를 넘어 하나를 이룬 공동체적인 자이를 말했다. 양심의 자리는 바로 그 전체에 있었다. 함석헌에게 양심은 나의 자리를 떠나 전체의 자리로 향하게 하는 원심력으로 작용한다. 앞서 밝혔듯이 양심은 전체의 자리에서 내 자신을 비판할 근거로 작용했다. 인간이 자유를 향한 의지만이 아니라 양심까지 갖고 있는 이유는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양심이 있기에 인간은 도덕적인 삶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함석헌은 양심을 더 큰 뜻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라 여겼지만, 그 논리는 신학적이라기보다 생명현상에 대한 설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생명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어느 순간 다른 생명체가 아직 갖지 못하는 도덕과 양심의 마음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양심이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에게 중요한 이유를 앞서 간단히 언급했지만, 함석헌에게도 그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내가 나만을 위하는 마음의 자리에서 전체를 지향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동기와 과정이 양심을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면, 그 설득력과 상관없이 함석헌의 사상에서 양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함석헌의 관심은 개인의 양심보다 민족이나 시대의 양심에 있었다. 그는 양심을 개인의 차원에서만 이해하려는 서양의 학문에 대해 양심의 현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했을 것이다. 인간 개인의 존재에 대한 자각이 없을 때, 양심은 개인을 도덕의 주체로 세우는 역할을 하지만, 자유와 권리의 개인주의가 성행하는 시대의 양심은 전체를 살리는 자리를 지향한다고 믿었다. 양심은 내 안에 있지만 나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 사람’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양심은 마비되어 무기력질 수밖에 없었다. 함석헌은 그가 살았던 한국의 역사를 양심이 마비되어버린 시대로 이해했다. 그러나 양심은 인간이 본질에 속하기 때문에 마비되었을지언정 사라질 수는 없었다. 양심은 생명의 현상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생명의 근원에 가까운 씨알에 더 분명히 살아있었다. 함석헌은 한국의 권력자들의 마비된 양심에 씨알의 소리를 들려주어 그들의 양심을 일깨우고자 했다.

함석헌에게 소리는 생명의 본질에 속했고, 사람에게 그 본질은 양심에 있었다. 사람이 귀 기울여 듣고 또 내는 생명의 소리는 양심의 소리였다. 사람에게 도덕성을 기대하는 이유는 양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권위주의 시대 억압의 주체들에게 씨알이라는 생명의 소리를 들려주어 마비된 양심을 일깨우겠다는 생각은 이후 세대에게 낭만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양심이 있고, 양심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의 대가였다. 그에겐 다수의 지배하는 민주주의도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의 문제였다. 권력자들의 마비된 양심을 일깨우는 게 민주주의라 했다. 양심이 사회 속에 살아있기 위해선 범죄에 대한 가혹한 형벌도 피해야 한다고 믿었다. 양심에 손상을 입혀 마음 속 양심의 자리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양심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하는 젊은이들도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양심의 소리를 듣고 일어난 사람들이 양심의 공동체를 만들기를 바랐다. 그는 자신이 앞서 그런 양심의 자리를 만들고 또 지키고자 했다.


    (양심에 대해 참고한 함석헌의 글은 “나는 왜 씨알의 소리를 내나”(1970), “세계구원과 양심의 자유”(1973), “형별과 인간 양심”(1973) 등이다. 이 글에서 하이데거와 레비나스가 같이 다뤘지만, 하이데거에게서만큼 레비나스에게 ‘양심’이 중요했다고는 할 수 없다. 양심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핵심적인 부분에 등장하지만, 레비나스의 <전체와 영원>에서 양심은 자유를 한계를 다루는 부분에서 등장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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