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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약한 마음(유하림)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8. 9. 28.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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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마음



유하림*

 


바쁜 와중에 짬을 내어 책을 읽었다. 짬을 낸다는 건, 그걸 그 만큼 하고 싶다는 마음과 신체가 어렵게 만났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개강을 하고, 개인적 프로젝트를 꾸리고, 이렇게 원고 마감까지 앞두고서 굳이 책 한권을 끼고 다녔다는 것은 내 이야기긴 하지만 조금 대단스럽다. 그렇다. 난 지금 나의 부지런함을 예찬하는 중이다.


그렇게 읽은 책은 이기호가 쓴 단편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다. 이기호는 내가 다니는 대학의 교양교수의 이름이기도 해서 이기호 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학교 교수가 먼저 떠오른다. 그의 수업을 들을 때 일베에 관한 발표를 했기 때문에 이기호 교수는 나를 볼 때마다 어이 일베! 하고 부르곤 했다. 나를 일베라고 불러서는 아니고 난 그냥 그 수업이 별로 재미가 없었는데 당시에 같이 수업을 들었던 친구의 말로는 자기의 인생수업이라고 했다. 취향에 따라 수업의 재미는 달라질 수 있지만 극명한 온도차를 느낄 때 마다 조금 위축되는 기분이다.


소설가 이기호에 관해서 가지고 있던 감상은 우리학교 교수에 대한 생각과 비슷했다. 내가 처음으로 읽은 그의 소설은 <원주통신> 이었는데 그 소설을 읽게 된 경위는 단지 내가 동경하던 사람이 강추! 하던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는 십대의 대부분을 원주에서 보냈기 때문에 원주에 관해서 어떤 추억이 건드려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소감을 말하자면 그 소설은 참 구렸다. 줄거리는 스포니까 생략하고, 찌질남의 찌질이야기는 딱히 내가 원하는 서사가 아니었다. 내가 동경하는 그 사람은 왜 이기호의 소설을 강추! 했던 것일까. 나의 안목이 구리기 때문에 좋은 소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 역시 조금 위축되는 기분이다. 그러니 이기호는 이러나 저러나 내게 좋은 느낌을 주는 이름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왜 그 책을 읽게 됐냐면, 지난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2년째 휴학을 하며 한참 무료하던 참에 소설수업을 듣기로 마음먹었다. 소설가가 되고 싶거나 등단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고, 다만 쓰기에 목적이 있었다. 뭐라도 쓰고 싶은데 혼자서는 잘 안 쓰니까 써야만 하는 상황을 일부러 만들어 내기 위해 유명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소설 수업을 등록한 것이다. 그 수업에서 읽어오라고 한 게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에 수록되어 있는 <한정희와 나> 였다. 수업 1시간 전, 출판사 근처 카페에 앉아 긴 한숨을 쉬며 소설을 꺼냈다. 머릿 속에선 끊임없이 내가 이 소설을 왜 읽어야 되나 짜증이 올라왔지만 나는 과제를 충실히 해야만 하는 강박이 있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그 소설을 읽었다.


감상부터 말하자면, 그의 소설 <한정희와 나>는 괜찮았다. 유쾌하고, 재치 있고, 너무 묘사를 잘해버려서 짜증나기도 했다. 내가 이기호를 조금 오해하고 있었나? 라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다. <한정희와 나>는 주인공 ‘나’가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아내가 어렸을 적 아내를 돌봐준 노부부의 손녀 ‘한정희’를 돌봐주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딱히 상상도 못할 특별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고, 있을 법한 일들이 꼬이고 꼬여서 자신의 비겁함이나 치졸함을 마주치게 된다는, 결국 완전한 환대란 불가능 하다는 것을 말하는 소설이었다.


나는 9월에 개강을 한 바, 공강 시간 동안 학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기 보단 구경하며 시간을 때웠다. 그러다 이기호의 단편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를 발견하게 되었다. <한정희와 나>를 재밌게 읽었으므로 다른 소설도 읽어볼까 싶어 빌렸는데, 실린 단편 모두 굉장히 재밌었다. 이기호는 이 단편집에서 ‘환대’에 꽂혀있는 것 같았다. 절대적 환대란 가능한가?, 절대적 환대를 받는 사람은 언제나 기쁜가? 등의 문제의식으로 책을 엮었다. 나한테 이기호 작가는 전대미문의 미문을 쓴다거나, 필사를 하고 싶을 만큼 명치를 가격하는 문장을 쓰는 작가는 아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마음을 건드는, 나의 말로 하자면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 글을 작가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나 또한 그를 안타깝게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파트의 작은방을 내주거나 일자리를 알아봐줄 만큼 성의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안타깝지만 성가신 것. 그것이 그 때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오빠 강민호>에 실린 단편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중에서


나는 그만, 이기호에게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자주 이기호 소설을 추천하고 다녔다. 얼마 전 친구에게도 이 소설을 추천했다. 그러다 우리는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친구가 말했다. “소설을 읽으면, 약한 마음이 들어.” 그 애한테 약한 마음이란 건 어떤 건지 묻지 못했다. 그래도 알 것 같았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 어딘가 말랑말랑 해진다는 느낌을 받는데, 왠지 그것이 그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주인공 같기도 하고, 주인공이 건네는 말이 나한테 하는 말 같기도 하고, 어딘가 꽁꽁 숨겨놓고 나도 모른 체 하고 싶었던 내 진심을 알게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이기호가 쓴 소설을 읽으면서 자주 말랑말랑해졌다. 나쁜 감정도, 슬픈 감정도 쉽게 내 몸에 침투해버려 이따금 우울해지는 것, 한 사람의 찌질함에 작은 위로를 받게 되는 것, 평소엔 있는지도 몰랐던 타인이 ‘한정희’나 ‘강민호’로 인식되는 것, 그렇게 한 사람의 삶을 단편적으로나마 기웃거릴 수 있게 되는 것. 이게 나한텐 말랑말랑 해지는 일이다.


개강을 하고, 개인적 프로젝트를 꾸리고, 이렇게 원고 마감까지 앞두고서는 말랑말랑해질 틈이 없다. 사사로운 감상이나, 소박한 유머 같은 것들이 끼어들지 못하고 삶이 점점 퍼석퍼석해지는 것이다. 소설을 읽는 것은 그래서다. 바쁠수록 자꾸만 까먹게 되는 것들을 잊지 않으려고, 내가 얼마나 약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 읽는다. 감당하지 못하겠는 마음 앞에서 어쩔 줄 모르며 너무 슬퍼하고, 너무 기뻐하는 게 아직은 좋다. 소설을 읽으면 세상에 내가 알지 못할 사람은 없는 것 같고, 세상에 내가 제대로 알 수 있는 삶이란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 필자소개 


페미니스트. 모든 차별에 반대하지만 차별을 찬성하는 사람은 기꺼이 차별합니다. 간간히 글을 쓰고 덜 구려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꿈은 나태하고 건강한 백수이고 소원은 세계평화.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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