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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그것은 광장이 아니다: '광화문 광장'에 관한 하나의 문제제기 (김진호)

시평

by 제3시대 2009. 9. 10.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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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광장이 아니다
‘광화문 광장’에 관한 하나의 문제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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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오므리 왕조 말기, 이스라엘은 급속도록 와해되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심한 기근이 일었다. 빈민들은 굶주리고 빚에 쪼들리고 노예로 끌려갔다(「열하」 4,1~4).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속국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특히 모압국의 반란은 이스라엘에 큰 상처를 입혔다(「열하」 3장). 하지만 한때 시리아-팔레스티나를 주도했던 제국은 이 반란을 제압할 군사력이 소진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지역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다마스커스 제국이 쳐들어오자, 이스라엘은 속수무책으로 연패하여 수도 사마리아가 포위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열하」 6,24). 도성은 식량이 바닥났다. 이런 사정인데, 부유층들은 매점매석을 일삼으며 잇속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열하」 6,25). 성민 가운데는 굶주리다 못해 자기 자식을 먹는 일까지 일어났다(「열하」 6,28).

다마스커스 군의 갑작스런 철군으로 최악의 재앙은 면했지만, 강력했던 오므리 왕조 말기에 왕권은 완전히 무력해져 더 이상 통치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가 되었다. 이때 정변이 일어나고, 예후 왕조가 들어섰다.


하지만 국력은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고, 다마스커스 왕조는 끊임없이 북서부 국경을 넘나들며 약탈을 해갔으며, 어떤 때는 남서부 국경부근까지, 그러니까 전 국토를 유린하기까지 하였다(「역하」 12,17~18).

그런데 희망이 찾아왔다. 아닷니라리 3세가 이끄는 아시리아 제국 군대가 다시 서진하였고 소제국인 다마스커스 왕국은 벅찬 전투를 벌이다, 결국에는 막대한 조공을 바치고서야 겨우 망국을 면할 수 있었다. 실은 페니키아의 왕국들과 이스라엘, 블레셋 등 시리아-팔레스티나의 거의 전 왕국들이 아시리아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다. 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본 나라는 회생 불능의 상태에 떨어진 다마스커스였고, 그 덕에 이스라엘은 회생의 기회를 맞을 수 있었다.

예후의 손자인 여호아스(요아스)가 등극하기까지 거의 60년간이나 지속된 재앙의 역사였다. 여호아스는 크게 약화된 다마스커스 왕국을 막아낼 수 있었고, 속국에서 독립하려고 몸부림치던 유다 왕국도 성공적으로 제압해냈다.

이스라엘은 빠른 속도로 국력을 회복했고, 그의 아들 여로보암 2세(기원전 785~745) 때에 와서는 오므리-아합 왕 시대를 능가할 만큼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무엇보다도 정복군주로서 북쪽으로는 ‘하맛 어귀’, 그러니까 다마스커스 왕국의 중심부 코앞까지 진격하였고, 남으로는 ‘아라바 바다’까지, 그러니까 사해 앞까지 지배하게 되었다(「열하」 14,25). 이것은 훗날 유다 왕국의 사관에 의한 기록이다. 해서 유다 왕국을 북쪽에서 압박하는 정도였다고 말하는 ‘아라바 바다까지’라는 표현은 그리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 아마도 오므리 왕조 이후 오랜 동안 유다는 이스라엘의 속국이었던 것 같고, 아마지야 왕이 반기를 들었지만 여호아스 왕에게 패배하여 전사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 같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때에 와서 강력한 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그림1] 여로보암 2세의 이스라엘 영토

그뿐이 아니다.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이 시대를 반영하는 고고학적 발굴물들이나 「호세아서」와 「아모스서」의 묘사를 보면, 부유층의 화려한 소비행각을 어느 정도 유추할 만하다. 적지 않은 사치품이 수입되었고, 화려한 별장들이 여기저기 세워졌다(「아모」 3,15). 한편 정부의 지방 통제력은 현저히 강화되었고, 아울러 지주들의 대중 수탈 또한 심화되었다. 아마도 왕권이 지방 토호들인 지주귀족과 권력연합을 통해 여로보암 2세의 체제가 성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여 이 시대 대중은 삶의 기반을 점점 더 빼앗기고 있고, 지주들은 점점 더 큰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국가는 부강해져 간다. 아모스 예언자는 바로 이런 극악해져가는 빈부격차의 심화 현상에 대해 왕권을 향해 직격탄을 날린다. 아마도 그의 활동기가 매우 짧아 보이는 것은, 여로보암 2세의 체제는 이러한 저항을 결코 관대히 처리하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왕족-귀족 중심 체제의 빈부격차의 심화, 그로 인한 사회적 위기의 심화 현상에도 불구하고, 40년이나 되는 긴 그의 치세 기간 동안 체제는 이렇다 할 위협을 겪지 않는다. 우리는 「호세아서」에서 그 유력한 이유의 하나를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열매가 무성한 포도덩굴, 열매가 많이 맺힐수록 제단도 많이 만들고, 토지의 수확이 많아질수록 돌기둥도 많이 깎아 세운다.
― 「호세아서」 9장 3절

내용인즉슨 고도성장을 구가하는 이스라엘에는 그럴수록 점점 더 많은 제단이 건립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왕립 성소들이 영토 곳곳에 기념비처럼 세워졌다. 고대 군주국시대에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홍보하는 가장 유력한 수단은 건축물이었다.[각주:1] 하지만 건축물은 주로 멀리 바라다보는 대중의 시각을 통해서 권력의 지엄함을 드러낼 뿐이다. 요컨대 그것은 매우 협소한 의미만을 전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다른 건축물과는 달리 성소는 훨씬 더 강력한 국가 통치의 장소다. 성소 안팎으로 대중이 제의에 참여하게 하며, 성소에서 일하는 하급사제들은 왕의 열렬한 홍보자일 뿐 아니라, 왕에게 충성하는 승군(僧軍)의 역할을 하는 존재였기에, 대중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력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지대하다.

‘국가가 더 큰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제단이 많이 세워진다’는 구절은, 그러므로 종교적 예전이 풍부해졌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종교 정치적 통제의 장치가 치밀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호세아 예언자는 바로 이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당대의 수준 높은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고통의 체제를 은폐하는 종교 정치적 장치를 폭로하고 비판했던 것이다. 

지난 8월 1일부터 ‘광화문 광장’이 개장되었다. 첫날부터 이십만이나 되는 사람이 왔고, 처음 한 주 동안은 연일 그 정도 숫자의 사람들이 다녀갔다. 분수가 있고, 화단이 있고, 화분처럼 생긴 벤치가 있는 공원에서 많은 사람들은 도심 한복판, 그것도 권력의 핵심 공간이던 세종로 네거리 한복판에서 삶의 여가를 누릴 수 있었다. 서울시 당국은 세종로 네거리를 시민에게 선사하는 기념비를 세운 것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한데 일부 시민, 사회단체들은 개장 직후 이곳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서울특별시 광화문광장의 사용 및 관리에 관한 조례안’의 폐지를 주장하는 기자회견이었다. 이들에 의하면 이 조례안은 광화문광장에서는 쉼과 오락 이외의 집단적인 정치적 의사표현 행위를 사실상 불허하고 있다고 한다. 단 정치적 의사표현이 가능한 행사가 있다. 서울시나 정부가 주도하는 행사다. 그리고 이것은 경찰이 이 기자회견을 강제 해산시킴으로써 입증되었다.

이 ‘시민의 쉼터’를 위해 서울시는 1년 3개월 동안 길을 막고 공사를 하였고, 무려 445억 원을 사용했다. 서울시 한복판에, 정부청사들이 있고 미국대사관이 있는 권력의 공간 세종로 네거리 한복판에 시민의 쉼터를 만들어주겠다는 시 당국의 ‘노고’ 이면에는 시민의 쉼과 여흥도 국가 통치술로 활용하겠다는 얄팍한 계산이 깔려있다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마치 고대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건축한 숱한 제단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시민의 편안함은 국가의 통치 정신에 위배되지 않을 때만 누릴 만한 것이고, 그 반대는 허용되지 않는 건조물이 바로 ‘광화문광장’이라는 것이다.

[그림2] 광화문 광장의 화단

그러나 온갖 설치물들로 가득 채워진 공간, 인색하나마 여흥이 있는 공간, 그러나 정치적 의사표현은 제약되는 공간, 시민이 채워갈 ‘어반 보이드’(urban void)가 제거된 공간, 서울시가 얘기하는 광장의 풍경이다. 그러나 이것이 광장인가? 더구나 시민의 .........

MB정부가 출범한 지 아직 2년도 못되었는데, 사회 양극화 문제는 훨씬 악화되고 있다. 용산사태나 쌍용자동차 사태에서 보듯 국가가 기획하는 성장전략은 자본의 편에서 기획되고 있음이 명료해지고 있다. 한국의 민주정부들이 심어놓은 양극화의 썩은 뿌리는 MB정부에 오면서 극대화되고 있다. 또 서울시가 대대적으로 펼쳐 놓은 뉴타운 정책은 매우 빠른 속도로 무주택자의 빈 주머니를 톡톡 털어가고 있다.

그리고 무려 445억 원을 들인 광화문광장은 그러한 자본과 국가의 폭력에 시달린 대중에게 정치성을 거세한 여흥을 준다. 실은 그것마저도 너무 인색하다. 화분을 닮았다고 하는 벤치들은 디자인도 조잡하지만, 앉아 쉬기엔 너무 불편하고, 그늘을 드리워 주겠다던 이파리 모양의 햇빛가리개로 볕을 피하기는 쉽지 않다. 삶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주는 위조된 그늘을 상징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 세종로 중앙에 서 있던 29그루의 은행나무를 치우고, 인조미가 펄펄 넘치는 화단을 만들어 놓은 것도 바로 그런 ‘위조된 즐거움’을 시사하는 듯하다. 개천을 복원하겠다고 하면서 인공으로 수돗물을 흘려보내는 프로젝트로 수백억 원을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100년이나 된 나무 대신에 인위적인 조성에 의해서만 시민의 눈에 다가올 뿐인 화단이 만들어진 것이다.

삶의 고통스러움을 위로받을 수 있는 체제는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성장전략은 늘 이렇게 고통을 주면서 그것을 은폐함으로써만 실행되는 것일까. 미국이 그랬고 일본이 그랬다고 하는 말들은 이제 설득력을 잃었다. 국민을 위해서 다른 상상을 할줄 모른다면, 왜 우리는 그네들을 통치자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호세아의 독설은, 그런 정부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다는 것이다. 점점 그런 독설이 우리의 공감을 얻어가고 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 웹진 <제3시대>

  1. 케이트 W. 화이트램, 「권력의 상징: 통일왕조 시대 왕의 프로퍼겐더에 대하여」, 『시대와 민중신학』6(2000)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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