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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정보] 게달리야 - 민족이냐 민중이냐 (김진호)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09. 10. 15. 14:34

본문

게달리야
민족이냐 민중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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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1

‘민족’이라는 사회적 결속체는 역사적으로 대개의 경우 종족보다 커다란 범위에서 형성되며, 이러한 결속을 보증하는 정치제도적 장치는 종족적 혈연성 범주보다 훨씬 복잡한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서 국가는 많은 경우에 민족과 쌍개념을 이루는 역사적 실체다. ‘국가’가 영토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을 유지하는 제도적 통치형태로서, 기본적으로 폭력수단을 통한 강제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민족이라는 것이 소수에 의한 자원의 전유 및 그러한 전유를 위한 폭력 수단의 독점을 전제로 하는 사회적 결속체로서 역사적으로 형성 전개되어 왔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민족은 상징의 공유 및 문화적 동질성을 결속의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다. 즉 문화적 상징적 유대가 없다면 민족은 형성될 수도, 지속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러한 동질감이 작은 공동체의 범주가 아닌 민족처럼 거대한 공동체적 범주로 형성되는 데는 문화적 상징적 소통기재를 거대 영역에서 운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서 국가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이러한 민족-국가를 통한 사회적 결속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는 민족-국가적 결속의 정당성을, 역사적 필요성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초역사적 당위성의 차원에서 사고하게 한다. 즉 민족-국가는 선재적(先在的)으로 주어진 것이며, 영원히 지속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가 현존하는 민족-국가에 대해서 문제시하더라도, 그는 민족-국가의 결속의 초역사적 정당성을 전제로 하여 자신의 논지를 펴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의 주장은 전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족-국가가 이런 것인 한, 민중문제는 항상 잠재되어 있게 된다. (물질적이든 상징적이든) 자원의 불평등한 배분으로 인한 배제의 문제를 둘러싼 이해의 차이가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때로 소통 불능의 상황, 즉 긴장과 갈등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은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단순한 일탈적 반항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민족-국가의 초역사적 당위성의 코드를 다른 형태의 민족-국가의 코드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는 형태를 띠고 나타나기도 한다. 전자의 형태로 나타난 민중운동을 전정치적(pro-political)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정치적/변혁적 저항(political resistance)이라고 할 수 있다. 군주국 후기 및 식민지 시대 이스라엘의 경우, 이러한 재코드화는 ‘남은 자’ 사상과 ‘신정통치’ 사상이 결합된 형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러한 재코드화의 실현은 항상 변혁적인 것으로 구현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개는 민중적 의제가 반영된 역사적 타협물을 탄생시키곤 했다.

여로보암 1세에 의한 군주국 초기 시대의 반다윗-솔로몬 혁명은―비록 민족적 동질감이 아직 매우 허술하던 때임에도―반국가적인 지파동맹 시대의 비전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민족-국가로 구현되었다. 한편 요시아 개혁의 경우는, 민중적 저항의 에너지를 중앙정부가 개혁의 동력으로 활용하여, 이른바 ‘위로부터의 혁명’을 이루어낸 사례다. 두 경우 다 민중적 동기가 그 바탕에 깔려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민족-국가의 코드화에 대한 위기의 요소였다. 반면 전자는 ‘기존의’ 민족-국가의 코드화의 재형성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후자는 (창조적 재해석을 통한) 연속성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양자는 차이가 있지만,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모두 기존의 코드화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문제의식의 공유라는 인식론적 지반을 같이 한다. 그러나 어느 것도 ‘민족-국가’라는 결속의 코드 자체를 변형시키지는 못했다.

한편 이 장에서 다룰 게달리야 이야기는 정치사적인 차원에서 볼 때, ‘민족주의’와 ‘민중문제’를 둘러싼 왕국 말기의 복잡한 논쟁의 컨텍스트를 이해해야만 정당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 하나의 텍스트다. 여기에도 ‘민족-국가’라는 코드는 전제사항이다. 단 그것의 구체성을 둘러싼 상이한 입장이 갈등을 빗고 있다. 편의상 한편을 ‘민족-국가-민중’의 코드화로서 이야기하고, 다른 한편을 전통적 ‘민족-국가’론이라고 하자.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는 엉뚱한 것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이야기의 흐름을 텍스트 자체는 교란시키고 있다. 여기에도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는데, 왜냐하면 텍스트 저자의 관점과 게달리야의 관점이 요시아 개혁의 승계자라는 점에서 입장이 공유되고 있다. 반면, 게달리야와 대비되는 인물인 여호야긴은 그 반대편에 있다. 그런데 텍스트는 오히려 여호야긴에게 더 우호적인 반면, 게달리야는 냉정하리만큼 담담하게 기술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민족-국가’라는 전통적 코드의 지속성이라는 관점에서 다룰 때 해명될 수 있다고 본다. 아래에서는 바로 이 점을 초점을 두고 게달리야에 얽힌 역사를, 특히 민중적 관점에서 복원하고자 한다.

2

요시아 개혁은 이스라엘 역사 및 야훼 신앙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기념비적 사건이다. 유다 왕국 말기와 식민지 시대의 역사에서 이런 개혁적 역사신학 운동은, 성서의 본격적인 대단위 편찬이 이 개혁의 신학화 작업과 관련이 있다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야훼신앙사의 지성사적 차원을 풍부하게 채웠을 뿐 아니라, 위기 극복의 사회적 비전을 추구하는 하나의 실천적 대안 운동을 구축하기도 했다. 우리가 관심 갖는 왕국 말기와 식민지 초기의 역사는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요시아 개혁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귀족 세력을 억제하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이에 동맹을 맺은 세력은 다양한데, 특히 우리는 성서에 ‘암하아레츠’라고 표기하고 있는 민중세력도 그 중에 하나다. 그리하여 요시아 개혁은 ‘위로부터의 민중적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요시아 개혁이 어느 정도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였을 무렵 갑작스런 사건으로 인해 중단되고 만다. 그것은 에집트 제26왕조가 들어서면서 잃었던 국제적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팽창주의 정책을 펴고, 이 과정에서 바빌론과 메대 군의 동진을 막기 위해 북쪽으로 출병을 하게 됨으로써 야기된 사건이다. 요시아 정부는 앗시리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바빌론-메대 연합군과 동맹을 맺으며 개혁을 펼쳤는데, 에집트의 팽창주의는 그러한 요시아 개혁의 기반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므기또라는 천험의 요새를 통해 요시아는 에집트 군의 출병로를 가로막고자 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의 전사였다.

이런 갑작스런 사건은 유다로서는 중대한 위기였다. 아마도 이 시기 예루살렘 궁중에는 비상한 사태가 벌어진 모양이다. 요시아의 장자인 여호야킴이 아니라, 그의 동생인 여호아하즈가 즉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즉위에 개혁파, 특히 암하아레츠가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북정(北征)에서 실패한 느고2세는 여호아하즈를 폐위시켜 본국으로 끌고감으로써 자신의 실패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자기의 지지자들로 유다의 조정을 개편하고자 했고, 그 소임을 맡고서 즉위한 자가 바로 여호야킴이었다.

이후 여호야킴, 여호야긴, 시드키야 왕으로 이어지는 유다의 조정 내에는 크게 두 개의 파벌로 나뉘어 지속적인 정쟁을 벌였다. 친에집트파가 그 하나이고, 친바빌론파가 다른 하나다. 여기서 전자가 전통적 귀족주의를 고집하는 세력이라면, 후자는 요시아 개혁의 광범위한 지지세력으로 편성되었다. 따라서 전자가 수구파라면, 후자는 개혁파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후자는 어느 정도의 스팩트럼을 형성하고 있음에도 대체로 민중적 편향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여호야킴과 여호야긴 치하에서는 친에집트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시드키야 왕 시절에는 전기에는 친바빌론 세력이, 후기에는 친에집트파가 정국을 주도했다.

예레미야는 여호야킴 시절 가장 대표적인 재야 급진파 인사였던 것 같다. 그는 왕의 강력한 통치에 굴복하지 않고 비판의 소리를 드높였다. 아마도 이 시기 그의 명망이 크게 상승했던 것 같다. 사실, 그는 요시아 왕 시절 개혁의 주도세력의 하나이던 힐키야 대사제의 아들이었다(「예레」1,2; 「열하」22,4․8). 동시대에 유력한 사제 가운데 동일한 이름의 사람이 두 명 있었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예레미야서에는 살룸이라는 그의 삼촌이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그는 요시아 개혁 당시 핵심세력의 하나였던 여예언자 훌다의 남편이다(「예레」32,7; 「열하」22,14). 즉 예레미야는 요시아 개혁을 주도했던 사제귀족 가문의 일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요시아 개혁을 지지한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요시아 말기 피상적인 개혁에 그치고 마는 현상을 간파했고 그것을 비판했다(「예레」4,3이하; 8,4~7). 그는 요시아가 죽은 직후 암하아레츠가 주동하여 일으킨 정변과 모종의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 사건으로 인해 즉위한 여호아하즈가 강제로 폐위당한 것에 그는 몹시 안타까워했다.

 너희는 죽은 왕(=요시아) 때문에 울지 말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오히려, 너희는
 잡혀 간 왕(=여호아하즈)을 생각하고 슬피 울어라.
 그는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다시는 고향 땅을 보지 못한다.
  ― 「예레」 22,10

여호야킴 왕에 대해서는 항상 그는 비판을 서슴치 않았고, 심지어는 왕의 시해를 충동하기까지 했다(「예레」22,13~17). 그래서 그는 수차례나 죽을 고비를 겪어야 했고, 그때마다 그를 후원하는 일단의 고위층 인사들의 보호로 겨우 목숨을 연명하곤 했다. 그의 후원자들은 주로, 사반이나 악볼처럼, 과거 요시아 개혁의 주도세력을 형성하던 인물들의 후손들이었다. 게다가 예레미야서 36장 11~32절의 예레미야 필화사건에서 보듯이 그들은 이 급진파 인사의 과격한 발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까지 했다.

시드키야 왕 시절, 그는 자신의 주장을 정책에 반영하기도 하는, 왕의 국정자문관 역할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드키야 정부가 후기에 친에집트 편향을 띠자 강력한 정책 비판을 가한다. 한번은 시리아-팔레스틴의 6개국(암몬, 모압, 에돔, 띠르, 시돈, 유다)이 예루살렘에 모여 반바빌론 연합전선을 모의할 때, 그 회의장 앞에서 시위를 하기도 했고, 이 과정에서 당대의 유력한 사제의 하나였던 하나니야와 논쟁을 하면서 모욕을 당하기까지 했다(27~28장).

이상과 같은 예레미야의 활동의 초점은 국가가 바빌론에 우호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여기서 우리가 길게 그에 관해서 주목한 것은, 그의 활동이 당시의 친바빌론자들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당시 바빌론이 국제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공지된 사실을 전제로 한다. 이런 상황에서 바빌론과 싸운다는 것은 정부 당국으로서는 자주적 주권정부가 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지만, 전쟁을 피할 수 없다. 예레미야의 판단으로는 그 전쟁은 전혀 승산이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가 더 중요시한 것은, 전쟁의 승패에 대한 판단 문제가 아니라(어쩌면 친바빌론 파의 일단의 세력은 이 문제에 더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빌론 치하든 아니든, 민중적 개혁에 정부가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식량을 대대적으로 반출하고, 백성을 강제동원하는 식의 정책을 중단하는 것은 개혁의 전제 조건인 것이다.

결국 시드키야는 반란을 일으키고, 끝내 예루살렘은 정복당하고 불타 없어지고 만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당하고 포로로 끌려갔다. 또 수많은 촌락과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예루살렘을 포함한 인근의 여러 성읍들의 파괴의 흔적들이 고고학을 통해서 발굴되었는데, 그 참화를 충분히 짐작하고 남을 만큼 처참한 잔해를 볼 수 있다.

바빌론 당국은 유다 같은 작은 지역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여전히 강력한 저항을 펼치고 있는 띠로와 시돈을 정복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그 후원세력인 에집트를 제압하는 데 그들의 서방원정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 그러니 친바빌론 입장의 유력인사에게 위임통치를 맡긴다면, 이 사소한 지역에 큰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적임자로 선택된 것이 그달리야였다.

그는 유다의 가장 유력한 가문의 하나인 사반 가문의 후손이었다. 이미 보았듯이 이 가문은 친바빌론 노선의 세력 가운데 가장 유력한 가문이다. 또 그달리야는, 라기스에서 출토된 한 인장에 의하면, 시드키야 당시 군부 지도자의 하나였던 같다. 즉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군사작전을 펼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실재로 그의 정부 내에로 과거 유다 군의 잔존 세력이 속속 투항해 왔음이 분명하다(「예레」40,8). 정국은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그의 직위는 아마도 총독이 아니라 왕이었던 것 같다. 성서는 그의 공식 직위를 한번도 명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레미야서 41장 10절의 ‘왕의 딸들’이라는 표현이나 41장 1절의 ‘왕의 장관’이라는 표현은 문맥상 그 왕이 게달리야를 지칭할 경우에만 자연스러운 진행을 나타낸다. 아마도 텍스트 저자들은 그가 다윗의 혈통이 아니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통해 볼 때, 게달리야는 바빌론으로부터 왕으로 위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재로 바빌론의 입장에서, 총독부라는 새로운 관리기구를 설치하는 것보다는 왕권을 승계하는 것으로 할 때, 가장 손쉽게 이 지역을 안정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 섰을 것이다.

게달리야(Gedaliah)는 자신의 새 도읍을 미스바로 정했다. 이것 또한 유의미하다. 예루살렘을 이미 잿더미가 됐으니 도읍으로 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여러 대안이 나올 수 있는데, 그는 그 중에서 미스바를 선택했다. 우선 예루살렘과 가까운 곳이니, 위치상 적합했다. 그밖에 요새도시들은 필시 바빌론 군에 의해 거의 완파됐을 터이니 예루살렘과 대동소이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 가운데 그는 왜 하필 미스바를 택했을까? 그런데 독자들은 이 지명이 매우 익숙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렇다. 이 곳은 지파동맹 시절 유명한 성서가 있는 곳이다(「판관」20,1~3; 21,1~8; 「삼상」 7장; 10,17). 더욱 흥미로운 것은 미스바는 국가로 이행한 뒤,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게달리야는 옛 전통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정부의 특징이 드러난다.

더욱이 정황은 개혁을 펴기에 매우 유리했다. 구왕족 치하에서 귀족노릇하던 많은 이들이 처형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가, 주인 없는 토지와 재산이 매우 많았던 것이다. 토지와 재산의 재분배가 가능했고, 이는 자신의 가문이 그토록 추구했던 신명기 개혁의 핵심 사안이기도 했다. 국가 경제의 기반을 송두리째 앗아가버린 이 엄청난 국난은 동시에 기회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인근 지역으로 피난갔던 유민들이 속속 돌아왔다. 그것은 그의 모종의 개혁정책의 대가이기도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 정부의 참여했음이 분명하다. 단, 그가 노령이었고, 여호야킴과 시드키야 당시 숱한 고초를 겪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건강상태는 퍽 좋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므로 정책 자문역을 활발히 펼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게달리야의 정부가 채 꽃을 피우기도 전, 그는 측근 장교에 의해 시해되고 만다. 주범 이스마엘은 구왕족의 방계친척으로, 아마도 다윗 혈통이 아닌 자가 왕이 된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그는 게달리야가 민족을 바빌론에 팔아먹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민족-국가의 자주권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던 열광적 민족주의 당파에 속했던 귀족 출신 인물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의 배후에는 유다 지역에서 도망해서 목숨을 건진 그 당파에 속한 인사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기에는 이 망명인사들을 보호하고 있던 암몬 왕 바알리스가 있었을 것이다.

3

본문의 내용 구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신명기적 역사가는 이 텍스트에서 여호야긴 왕에 대한 아련한, 그러나 애틋한 기조의 기억을 남긴다. 마치 거기에서 희망의 단초가 있을 것처럼 말이다. 그는 포로로 끌려갔지만, 37년간 수감된 이후에는 바빌론 왕과 더불어 식사하고 후대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슬쩍 지나가는 듯한 문투지만,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마감하는 부분에 나온다는 사실은 결코 지나쳐버릴 수 없는 암시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여호야긴이라는 인물은 불과 3개월간 등극했다가 제대로 왕권도 휘둘러보지 못한 채, 바빌론으로 유배된 인물이지만, 유다의 적어도 한 당파에 의해서 정통적인 유일한 왕처럼 여겨졌었다. 그의 삼촌인 시드키야가 그를 이어서 왕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반대파들은 여호야긴이 유일한 합법적 왕이라고 생각했고, 게달리야가 그 뒤를 이어 임명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마도 이 당파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시드키야나 게달리야가 바빌론에 의해 임명된 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자주적 주권을 갖지 못한, 아니 오히려 주권을 외세에 양도함으로써 왕이 된 인물들이라는 혐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충분한 개연성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중시하는 여호야킴 왕도 외세인 에집트에 의해 위임된 통치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여호야킴이나 그의 아들 여호야긴의 정통성도 의심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텍스트의 저자는 이 정파와는 대립적 입장에 있던 신명기 학파의 일원이다. 그러니 이들은 시드키야를 왕으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게달리야는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신명기 개혁 정신의 입장에서 볼 때, 시드키야처럼 별 성과 없는 통치자에 비해, 게달리야는 분명 뚜렷한 공적을 가진 인물로 추정되고 있으니, 이 텍스트가 게달리야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여호야긴을 합법적 왕으로일 뿐 아니라 희망의 전거로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민족-국가’라는 코드가, 신명기 학파든 귀족당파든 간에, 그들 모두에게 공지되고 있었던 전제사항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국가란 ‘다윗의 왕권’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 다른 이가 왕권을 승계한다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재코드화인 것이다. 재코드화가 이루어지더라도 허용 가능한 코드화는 다윗의 혈통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훗날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만들려는 일련의 노력도 이러한 유다인들의 이해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바로 이것이 민족주의다. 그것은 역사적 정당성을 필요로 하기보다는 초역사적 상징성을 더욱 필요로 한다. 그 통치자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실천을 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징화된 정당성 메커니즘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유다인의 민족주의라는 늪을 헤어 나오지 않는다면, 그 텍스트의 정황에 허우적거리며 야훼신앙의 의미를 재현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텍스트가 사건을 읽고 있는 정황을 해체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게달리야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물론 영웅 만들기의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그를 선택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역할을 간소하게 묘사하고자 했던 텍스트의 의미화 전략을 밝혀냄으로써, 야훼신앙을 둘러싼 일련의 논쟁을 비판적으로 보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러한 읽기를 시도하는 우리의 시좌는 ‘민중의 눈’이다. 즉 민중의 눈으로 성서를 다시 읽는데, 장애가 되었던 하나의 요소인 유다 민족주의를 거두어 냄으로써, 민중적 읽기 전략을 더욱 가능하게 하기 위함이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듯이, 성서 읽기 또한 시간의 대화 과정이다. 그것은 우리의 시각이 텍스트 읽기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그 시각을 민중의 눈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재현할 수 있는 한, 모세사건이나 예수사건은 바로 그러한 눈으로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우리와 성서와의 대와가 바로 그 지점에서 더욱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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