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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정보] 영화‘박쥐’에 기인한 아폴론적, 혹은 디오니소스적 상상 (이상철)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0. 1. 11.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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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 II (1)
: Episode 1. 영화‘박쥐’에 기인한 아폴론적, 혹은 디오니소스적 상상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시작하며

지난 웹진 8호 (2009년 6월)에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이라는 짧막한 글을 기고한 바 있다. 이번호 웹진부터(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연재하는 글의 큰 제목도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라고 이름 짓는다. 졸고가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라는 술어가 생략된 비어있는 제목으로 연재되는 이유는(매회마다 소제목을 달리 첨부하겠지만) 분명하다. 내가 겪고 있는 근대와 탈근대라고 불리우는 것들 사이에서의 방황,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길찾기 혹은 탈주에 대한 모색이 여전히 내 안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 진행중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라는 완결되지 않은 글의 제목은 완결되지 않은 내 사상의 괄호를 고백하는 의미이기도 하고, 이 글이 마무리 될 무렵 그 방황이 잠잠해졌으면 하는 바램이 담겨져있는 이중적인 의미인 셈이다.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 II’라고 붙인 이유는 웹진 8호에 실렸던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와 차별을 두기 위함임을 밝힌다.

나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몇 해전 <올드 보이>로 칸느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칸느 영화제가 좋아하는 (혹은 칸느 영화제가 좋아하는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 박찬욱이 이번에는 뱀파이어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다. 사실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 상에서 뱀파이어는 단골 메뉴였다. 마치 구미호가 한국 작가들에게 끊임없이 진화하는 Character를 제시하는 것처럼, 뱀파이어라는 치명적 매력 역시 서구인들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닐까 싶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뱀파이어 관련 영화만 생각해도 탐 크루즈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가 떠오르고, 몇 해전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안녕, 프란체스카’도 뱀파이어를 소재로 했던 독특한 작품이었다. 주의해서 살펴보면 시대별로 뱀파이어에 관한 대표적인 영화가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그렇다면, 왜, 뱀파이어인가? <터미네이터>나 <에일리언>류의 최첨단 테크놀러지로 무장된 괴물도 있고, <링>, <식스센스> 류의 인간의 심령을 소재로 한, 즉 ‘내 안에 있는 타자성’을 소재로 삼는 영화가 요즘 공포영화의 대세인데, 왜 박찬욱은 또다시 뱀파이어로부터 소재를 끌어 온 것일까?
나는 아직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를 보지 못했다. 칸느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았다는 보도, 송강호의 성기가 노출되었다는 기사, 사제가 뱀파이어라는 설정과 그 사제가 친구의 아내와 눈이 맞아 그 친구를 죽였다라는 내용 등등......이상은 내가 <씨네 21>을 뒤적이며 얻은 영화 ‘박쥐’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이다. 영화 내용에서 내게 흥미를 끌었던 대목은 사제가 뱀파이어가 되었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대칭적 위치를 점하는 사제와 흡혈귀의 영역이 한 인물안에서 중첩되고, 멀어지면서 극의 긴장과 이완이 반복될것이며, 결국에는 그 둘 사이의 진동이 빨라지다가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는 영화상의 관습을 예상하는 것 말고, 내게 순간적으로 스쳤던 무엇이 바로 아폴론적 혹은 디오니소스적 상상이었다.
이러한 상상을 하게 된 이유는 다분히 이번 학기 내가 겪고 있는 (학문적) 가위눌림에 힘입은 바 크다. 필자는 현재 탈근대적 사유의 단초를 마련했다고 평가되는 인물인 ‘니체 세미나’에 참여하고 있다. 니체의 거의 전 저작을 ‘전기-중기-후기’로 분류하여 읽고 있는데[각주:1],  니체가 아폴론적인 유럽문명과 그것을 떠바치고 있는 기독교세계 전체를 향해 광인처럼 퍼붓는 독설과 야유는 내게 통쾌함과 불편함을 동시에 선사하였고, 그 거북한 동거가 나로 하여금 이번 글쓰기의 동기와 여백을 제공하였다.
이 글에서 나는 사제를 아폴론으로, 뱀파이어를 디오니소스로 치환 시킬것이며, 각각의 인물을 서술하면서 니체의 초기작이라 할 수 있는 <비극의 탄생>에서부터 그의 후기 작품인 <Anti-Christ>와 <Ecce Homo>에 나타난 근대(성)와 기독교를 향해 내뿜었던 니체의 독설에 주목할 것이다. 아울러 니체철학의 사상적 세례를 받았다고 평가되는 푸코와 데리다의 글들도 중간 중간에 삽입할 생각이다.  
글의 전개 양상은 아폴론적으로 상징되는 근대적 인간과 디오니소스로 상징되는 탈 근대적 인간상에 대한 소묘, 그리고 근대적/탈근대적 증상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에 대한 나열 혹은 비교에 많은 양을 투자할 것이고, 결국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다원주의와 전체주의 (자본의 질서가 유일한 세계운영의 원리라는 측면에서) 라는 서로 다른 인식의 축이 지배하는 21세기 사회속에서 니체식 딴지걸기에 대한 의미를 반추해 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과정을 통해 ‘어떻게 우리가 우리 밖에 있는(혹은 우리 안에 있는) 타자와 대면할 수 있을까?’ 에 대한 몰입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글의 의미는 족하다.
(한가지 양해를 구하는 것은, 이 글은 영화 ‘박쥐’가 주는 자극으로 쓰여진 것은 분명하지만, 영화 ‘박쥐’와는 사실 아무 상관이 없는 글이라는 점이다. 자칫 Popularism에 영합하여 독자들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비쳤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시기를) 

탄생, 뱀파이어

어렸을 때 40권짜리 계몽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이 집에 있었다. 누가 언제 구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전집에 꽃혀 있었던 대부분의 책을 읽지 않았다. ‘세계문학을 40이라는 전체성 안으로 몰아넣어 이것만 읽으면 세계문학을 섭렵할 수 있다는 구호에 분연히 저항하노라!’고 외치지는 않았지만, 어린 나에게 있어 서가에 정갈하게 꽃혀 있던 ‘세계문학’이라는 객관성과 보편성, 그 중에서도 특별히 엄선된 40이라는 대표성이 선사하는 숭고함은 그 시절 내게 책읽기에 대한 무거움과 비장함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책읽기에 대한 무거움과 비장함은 얼마 안 있어 죄책감으로 변했다. 객관성과 보편성, 그리고 숭고함을 무시했다는 사실, 아니 객관성과 보편성, 그리고 숭고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한동안 괴롭혔다. 그 고뇌 끝에 내가 세계문학전집에서 몇 권 무겁게 꺼내어 읽었던 책들이 있었는데 (그래도 다섯 손가락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중 한 권이 드라큘라이고 또 다른 한 권이 그리스신화이다.
<드라큘라>는 브람 스토커(Bram Stocker)라는 영국 작가가 1897년 발표한 괴기소설이다. 소설속 드라큘라 백작의 모티브가 된것은 루마니아의 블라드공이라고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13세기 유럽인구의 1/3의 생명을 안아간 페스트의 공포, 십자군 전쟁 패배이후 실추된 교황권과 이를 계기로 새로운 판세를 형성하려는 영주권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 종교재판, 마녀사냥 등등......중세 암흑기를 설명하는 여러 사건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드라큘라와 관련시켜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대목은 투르크족의 유럽침략이라 할 수 있다.
이슬람권에 의한 발칸반도의 대부분과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기독교 문명권에 있었던 그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공포와 전율 그 자체였다. 블라드공은 그 무렵에 등장해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이슬람세력에 맞서는 기독교 문명권의 수호신 같은 역할을 하였다. 블라드공은 포로들에 대해 굉장한 잔혹성을 보였다 한다. 산채로 불태워 죽이거나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꼬챙이로 찔러서 죽였다고 하여 투르크 병사들 사이에서 그를 ‘창에 꿰어 죽이는 자’라는 호칭까지 얻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잔혹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 후 400년 후에 잠자고 있던 블라드공은 뱀파이어가 되어서 드라큘라라는 소설속의 인물로 재탄생하게 된다.

뱀파이어에 대한 해석, 그리고 상상

소설이 쓰여 질 무렵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일컬어지던 빅토리아 왕조시대였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이름에 걸맞게 영국은 18-19 세기에 엄청난 파워로 세계질서의 가장 강력한 축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이르면서 화려한 명성을 날리던 대영제국은 새로운 국제질서의 역학 관계속에서 서서히 과거의 영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는데, <드라큘라>가 출판되었던 시기가 바로 그 무렵이다. 
소설은 한 축에 중세의 암흑, 공포, 거세의 대상, 모더니티의 적대자인 드라큘라를 '타자(Other)'로 배치시킨다. 그리고 나머지 한 축은 빅토리아 시대 최첨단 지성과 테크놀로지로 무장된, 반 헬싱 박사를 필두로 하는 강호의 고수들이 드라큘라와 맞서기 위해 포진되어 있는 형국이다. 소설속에 드러난 이러한 대립구도는 19세기 빅토리아 왕조시대 영국인들이 지녔던 당대의식을 전달코자 했던 setting이 아니었을까?
수많은 식민지의 확보와 착취, 그리고 보존과 유지를 위해 주체인 나를 먼저 설정하고, 그 주체안으로 포섭해야 하는 대상(피식민지국 혹은 영국과 함께 식민지 쟁탈을 다투는 다른 경쟁국들)을 상정한 후, 주체가 대상을 인식해 가는 과정이 바로 이성의 능력이고 계몽이며, 진보라는 근대성의 신화가 이 소설안에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드라큘라>는 단순한 괴기 공포 소설로 읽혀질 수 없다. 전근대와 근대, 이성과 광기, 문명과 야만, 그리고 아롤론과 디오니소스간의 대립으로 읽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이 문제는 근대와 탈근대논의까지 뻗어간다.

ⓒ 웹진 <제3시대>

  1. 미국내에서 Nietzsche에 대한 번역과 소개는 전적으로 Walter Kaufmann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Nietzsche 철학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 첫 시기는 The Birth of Tragedy 비극의 탄생으로 대표되는 시기이고, 두 번째 시기는 Human All Too Human, The Gay Science 등의 작품에서 나타난 ‘긍정의 정신’으로 특징지어지는 기간이다. 마지막 시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문제적 저작들이 몰려있는데, Beyond Good and Evil 선과 악을 넘어서,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도덕의 계보학, Twilight of the Idols 우상의 황혼, The Anti-Christ,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 등의 책들을 통해 니체 특유의 서구 정신사에 대한 전적 부정과 기독교윤리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폭로가 이어진다. 니체의 가장 유명한 저작이라 할 수 있는 Thus Spoke Zarathustra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마지막 시기와 중간시기를 잇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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