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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벌레, 아버지, 혹은 자신의 언어를 잃어가는 이들에 대한 단상 (유승태)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0. 3. 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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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아버지, 혹은 자신의 언어를 잃어가는 이들에 대한 단상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건넛방 이불 속에 커다란 벌레가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그 벌레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아버지가 했어야 할 일들을 그가 하고 있다는 사실들을 통해 그 벌레는 나의 아버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그 벌레는 누운 자리에서 한참 텔레비전을 보다 비척이며 일어나 가느다란 관절들을 움직여 식탁의자로 옮겨갑니다. 그리고 촉수를 불안하게 움직여 25단위로 인슐린 주사를 맞고는, 할머니가 차려준 아침밥을 여기저기 흘리며 먹습니다. 이런 행동들을 보니 그는 영락없이 '아버지 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벌레가 아무리 아버지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를 벌레라고 부르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걷는다기보다 불안하게 움직이는 가느다란 촉수 위에 몸이 얹혀 있다고 묘사하는 것이 옳을 듯한 모습은 심한 말초신경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입으로 내는 소리가 언어라기보다는 그냥 '소리'라고 하는 것이 어울리는 점 역시 점점 '사람의 말'을 잃어가는 아버지와 매한가지였습니다. 떼인 돈을 받기 위해 찾아갔을 때 돈 빌려 간 사람들이 아버지를 대하던 태도도, 이미 퇴직한 직장에 찾아가 새파랗게 젊은 후임들과 술 한 잔 하자고 했을 때 그들이 바라보던 시선도 벌레를 대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내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는 듯합니다. 아버지라 부르든 벌레라 부르든 그 대상은 호감이 가지 않고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이가 '아버지'든 '벌레'든 그 이름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제가 아버지라 불러도 속으로는 '벌레'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 나에게 아버지는 벌레나 마찬가지였을까'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을 것입니다. 대화가 어려운 것은 단순히 상대의 말소리를 알아듣기 어렵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분위기와 표정, 억양, 말의 속도 등 구문의 형식이 담아내지 못하는 주변적인 것들이 대화에서 더 중요합니다.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은 오히려 말 너머의 주변적인 것들의 배치가 문화적 의미를 담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이 많은 주변적인 것들이 아버지와 저의 의사소통을 어렵게 합니다. 나는 아버지를 보면 의사소통을 단절하게 만드는 많은 감정들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나는 화를 낼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내 앞에서는 제발 입을 다물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그가 서울로 이사 온 후부터는 정말 말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목에 뭔가 걸린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며 발성을 못합니다. 몇 주 전 잠꼬대를 하며 비명을 질렀던 것을 생각하면 성대가 물리적으로 손상된 것은 아닌 게 분명합니다. 『생애의 발견』이라는 책을 읽다 보니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아버지만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식구들도 아버지 앞에서 침묵한다. 그리고 바깥에서 아버지에 대해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정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아버지의 자리는 비좁다." 아버지의 침묵이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참담한 심경의 표현이라면, 아버지에게 가족들이 침묵하는 것은 '당신의 자리가 없는 것이 우리에겐 더 낫다'는 마음의 표현인지도 모릅니다.

몇 번을 되물어야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우리는 "제발 알아듣게 좀 이야기하라"고 애원하지만, 사실 바라는 것은 그의 침묵입니다. 아버지가 조용히 있을 때 우리는 그가 건강하지 않으며 보살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집에는 고요와 평안이 감도는 느낌을 받습니다. 때문에 그에게 침묵을 바라는 것은 집안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은폐하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은퇴 후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렸고 돈을 통해 자신이 '존중받는 느낌'을 얻을 수 있었던 술집을 전전하며 돈과 건강을 축냈습니다. 아버지가 한나라당을 지지했던 것은 한나라당이 특별히 좋아서라기보다 공무원 정년을 축소한, 그래서 자신을 가치없는 존재로 만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싫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도 말리는 가족들을 뿌리치고 다단계 회사와 그곳 동료들에게 그동안 번 돈을 ‘올인’할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를 칭찬하며 존재감을 확인시켜주는 듯한 거짓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목소리들을 열심히 듣고 해석해보면 간혹 “이제 나도 얼마 안 남았어”, “나는 얼마나 답답한지 아니, 이것들아”라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F. 카프카의 『변신』처럼 벌레로 변신한 아들이 죽자 그의 가족들이 생의 의욕을 되찾는 이야기로 끝맺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 제가 다단계 회사 직원들보다 더 혹할 만한 말로 아버지에게 생의 의욕을 되찾게 할 수 있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자신의 말과 목소리를 잃어가는 것은 그의 존재감을 위태롭게 하는 우리 사회, 그리고 그의 침묵 혹은 실어증을 더 편안하게 여기는 가족의 암묵적인 연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깊이 반성할 따름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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