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와 탈근대 사이에서 II (2)
: Episode 2. 니체 曰: “니들이 근대를 알아?”
이상철
지난 <웹진 19호> 에서 필자는 영화 ‘박쥐’로부터 기인하는 근대와 탈근대를 둘러싼 논의의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하였고, 그 논의의 진앙지를 니체로 설정한다고 명시하였다. 왜 니체인가? 라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근대를 향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근대를 떠받치고 있는 서구정신 근간에 대한 시비와 싸움질을 최초로 시도한 사람이 니체이기 때문에 그렇다. 니체는 “근대를 믿느니 차라리 허무와 악마를 믿는 것이 보다 나을 것이다” 1 라는 독설을 퍼부으며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왜, 무엇 때문에 근대는 문제적인가? 니체의 처녀작이라 할 수 있는 <비극의 탄생>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그리스 비극의 탄생과 해체 과정을 진술하면서 풀어나간다. 2
비극(悲劇)의 탄생
니체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필자가 보기엔 니체는 철저한 복고주의자이다. 적어도 그리스문화를 바라보는 니체의 분석틀만을 따로 떼어본다면 말이다. 니체에게는 역사를 평가하는 분명한 기준점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가 바로 그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후기 아테네 철학시대가 아니라, 그 이전, 즉 B.C 6세기 초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같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이 활동하던 시대 말이다. 3
이 시대의 특징을 유명한 맑시스트 철학자인 게오르그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 서두에서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4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 다시 말해서, 세계와 자아, 천공의 불빛과 내면의 불꽃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만 서로에 대해 결코 낯설어지는 법이 없다. …… 이러한 이원성 속에서도 원환적 성격을 띠게 된다. 다시 말해 영혼의 모든 행위는 하나같이 의미 속에서, 또 의미를 위해서 완결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루카치가 말하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는 자아와 세계, 대상과 인식, 주관과 객관이 하나였던 시대였다. 니체는 이런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그리스 비극의 운명에 관한 고찰을 통해 근대문명 일반에 대한 비판을 도모한다. 그리스 비극에 관해 니체가 내세우는 첫 번째 길항관계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이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논리의 상징이면서도 그리스 비극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두 축이었다. 아폴론적 원리는 무미건조, 절제, 이성, 질서, 형식을 상징하는 것에 반해, 디오니소스가 상징하는 것은 열광과 무절제, 과도함, 방종 및 불안정성과 관련된다.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극은 다분히 아폴론적이었고, 무대 위 45도 각도(신의 각도, 신의 시선)에 배치된 코러스는 디오니소스의 몫이었다.
특별히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코러스의 합창을 통해 고립된 아폴론적 개인은 기쁨에 넘치는 디오니소스적인 공동체의 성원으로 비로소 편입될 수 있었다. 이렇듯 그리스 비극은 개념적인 이성과 음악적인 리듬이 합쳐진, 아폴론적인 명석성과 명료함, 디오니소스적인 의지와 충동이 결합된 역동적 삶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절묘한 앙상블을 이루어 내면서 그리스 문명은 찬란하게 역사의 수면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이성(理性)의 탄생
그리스 비극의 시대는 소크라테스에 이르러 ‘철학의 시대’로 전환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이 합하여져 구성되었던 세계의 심연은 소크라데스-플라톤-아리스토델레스를 거치면서 논리적 지식의 집합체 혹은 합리적 사유의 거점 확보를 위한 폐쇄적 공간으로 치환되어 진다.
루카치는 그리스 비극의 시대에 대한 고별사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철학이라는 창조적 행위를 통하여 비극의 운명까지도 경험적 사실의 조야하고 무의미한 자의적 해석에 불과하고, 주인공의 정열도 지상의 가치와 결부된 것이며, 또 주인공의 자기 완성도 주체에게 우연히 주어진 한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 삶과 본질이라는 문제에 대한 비극의 대답은 더 이상 자연스럽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하나의 기적으로서 또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위에 놓여 있는 연약하면서도 확고한 무지개 다리처럼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적 정신은 영원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또 그 해답도 가져다 주었지만, 그리스의 ‘정신적 공간’내에 있던 가장 본래적인 그리스적 요소는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5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이 어우러진 비극 속에서 이제는 아폴론적인 질서만을 갈구하는 소크라테스주의에 의해, 디오니소스적인 심연은 사라지고 만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역동하는 삶의 세계가 소크라테스로 대변되는 이성주의에 의해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이성에 대한 신뢰와 이성에 기반한 낙관주의는 이후 서양정신사의 주류전통을 형성하게 된다.
니체에 의하면 서양의 근대란 소크라테스의 정신적 후예들에 의해 만들어진 야만적인 것에 불과하다. 소크라테스로 표상되는 이론적 인간, 또 그들에 의해 개진된 ‘과학적 세계관’은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길을 차단했으며, 그러한 점에서 “진리에 대한 일종의 교묘한 정당방위이며 비겁이자 허위, 교활” 이다. 이러한 니체의 견해는 근대 문명에 대한 환상을 제거하는 데 일조한다. 그는 “언젠가 저 멀리 우주의 한 귀퉁이에, 수 많은 태양계들 속에 속한 별들중에서 지식을 발명한 영리한 동물들이 살던 별이 하나 있었다. ‘우주의 역사’에서 가장 오만하고 허위에 가득 찬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단지 찰나였을 뿐…” 6 이라고 서술하면서 근대적 사유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선언한다. 7
결국, 니체는 무엇을 원했나?
요약하면, 니체가 말하는 탈이성, 탈근대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전통적인 합리주의에 반기를 들면서, 그 사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동심원적 구조를 해체하여, 의미로 환원되기 이전의 유동하는 욕망의 기호로서의 디오니소스적인 무의식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그것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최고 목표로서 예지가 과학을 대신하고, 이런 예지가 과학의 유혹적인 견제에 의혹됨이 없이 세계의 전모를 확고한 자세로 응시하고, 거기에 나타나는 영원의 고뇌를 자신의 고뇌로서 동적인 사랑을 갖고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8
이러한 니체의 전략은 기존의 이성 개념을 실마리로 하여 형성된 움직일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관, 하나의 참된 목적을 지향하는 근대적 역사관이 허위이고 환상임을 고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니체를 탈근대를 열었던 실험적인 사상가였다고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그의 후기 작품들로 갈수록 더 노골적이고 거칠게 서구문명, 특별히 서구문명의 근간을 형성하는 기독교 문명과 기독교 윤리에 대한 가차없는 칼부림을 단행하는데……<계속> 9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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