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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로버트 박 관련 글] 로버트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시평

by 제3시대 2010. 3. 6.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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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가 성탄절에 두만강을 건너 북으로 갔다는 소식을 접하며


우리는 지금 충격과 깊은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착하고 여린 마음을 가졌던 그가
홀로 이 추운 날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넜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로버트는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경쟁을 싫어하는 평화롭고 총명한 아이였습니다.
그는 늘 밝은 미소를 띠고 있는 부드러운 아이였지요.
중학교 때 아리조나 투산으로 이사간 이후
그는 학교 공부보다는 어려운 친구를 돕는 활동에 열을 쏟았으며
장애인, 멕시칸 불법 이주민들을 돕는 일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자기 식구만 편안하게 지내는 것을 힘들어하며
길 가다 어려운 이웃을 만나면
옷을 벗어주거나 돈을 털어주기도 하는 소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한국에 와서 북한에서 온 청소년들과 지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로버트에게 북한 관련한 일은 매우 복잡하고 
특히 한국의 역사나 상황도 잘 모르고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니 
그런 일을 하기에는 무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서울에 왔고
사랑이 많은 그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노인들과 지내기도 하고
북한에서 온 가족과도 함께 하면서 어느새 한국말을 익히고
북한주민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늘 가난한 자 아픈 자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굶주리는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그는 하루 한끼의 식사만 하였습니다.
가족을 보러 와서도 밥은 안 먹고 기도만 하자는 그에게
우리는 가족이란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이라고,
“금식을 하려면 오지 말라”는 심한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잦은 단식으로 야위어가는 가는 그를 보면서
우리는 밥 먹이는 데만 급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북한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고통받고 있는데도
그는 왜 남한 주민들이 북한 동포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없는지 궁금해했습니다.
우리는 남한 땅에서의 삶도 충분히 불안하고 고단하다고 답했습니다.

세계 방방 곡곡에 빈곤과 불행이 가득하니 단번에
세상 문제를 다 풀려고 하지 말라고도 일렀고
정치적으로 복잡해질 수 있는 북한 문제에 개입하기보다는
당분간은 미국에서 인권운동을 하는게 어떻겠느냐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지 않고] 이곳의 이웃과 함께 있겠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항상 별 볼일 없는 일로 쫓기면서 사는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해주고
평화의 기운을 전해주고는 다시 자신의 가난한 친구들에게로 갔습니다.

성탄절 가까워 질 즈음
자기가 좋아한 책들을 부모에게 보냈다는 이메일을 보내왔을 때,
자기는 아주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이메일을 친척에게 보내왔을 때,
사실 우리는 내심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성탄절에 두만강을 건너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복잡한 정치외교적 문제나 종교를 둘러싼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어려운 이웃집 아이를 돌보러 가듯
그는 두만강을 건너버렸습니다.
북한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북에서 나오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난감하고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우리의 조부모님은
늘 어려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그런 조부모님을 존경한 손자가 로버트였습니다.
로버트의 ‘무모한 행동’이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부모님의 뜻을 따라 늘 어려운 사람들의 벗이고자 했던
로버트의 진심이 전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간 로버트 동훈을 사랑하였고 앞으로도 그러하실 분들께
감사와 존경의 정을 전합니다.

2009년 12월 31일 해를 애태우며 보내는 로버트의 친척들 씀


* 편집자의 말

이 편지는 로버트 박의 석방을 바라며 친척들이 작성한 편지의 원문이다. 이 편지는 한 언론사를 통해 일전에 공개된 바 있다.

로버트 박은 지난해 12월 25일 "자신의 죽음을 통해 전 세계가 북한의 현실을 주목"하게 하겠다며 북한에 들어가 억류돼 있다 43일만에 풀려났다. 그는 미국의 한 대북 인권단체에 소속돼 있었으며, 이전부터 빈민문제와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열정적으로 시민단체 활동을 해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본명은 박동훈으로 민주화운동을 했던 박형규 목사의 손자이기도 하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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