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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마당] ‘저들도, 당신 호흡의 열매입니다’ (손성호)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0. 4. 1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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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도, 당신 호흡의 열매입니다’


손성호
(밀알교회 목사)

아직도 어렵다. 아무리 돌이켜도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한때 아주 가까웠던 사람들 중에도 있다. 차를 몰고 가다가도 불쑥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종종 머리가 쭈뼛 서는 것 같은 전율을 동반하는 것들이다. ‘용서는 결국 다 잊는 것’이라는데, 난 아직 멀었나보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3:34)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려온다. 두렵고 부끄러워진다. ‘그동안 조금도 성숙하지 않았단 말인가!’ 언젠가 읽었을 때에도, 오늘 다시 읽어도 이 말씀은 여전히 어렵다.

마음 한 가운데서부터 ‘기도하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참동안 기도를 하는데 명치끝으로부터 아주 뜨거운 덩어리 하나가 솟구쳐 오르는걸 느꼈다. 분노인 것 같았다. 잠시 후, 머릿속이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목사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때에 비로소, 용서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달은 것 같다. 용서는 상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것임도. 기도를 마치고, 다시 본문을 읽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를 죽이라고 외쳤던 사람들, 침 뱉고 조롱하는 사람들, 그토록 많은 은혜를 입고도 예수를 ‘강도’라고도 하고, ‘반역도당의 수장’이라고도 하는 ‘바라바’와 맞바꾼 어리석은 유대인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너나 구원해 보아라!’ 하고 빈정거리던 사람들, 어리석고 천박한 식민지 노예들끼리 서로 죽이고, 욕하고, 침 뱉는 장면을 지켜보며 로마시민의 우월감을 느꼈을 백부장들과 병사들. 제비를 뽑아서 그분 입으신 옷들을 나누어 가진 지독한 군인들.

이 모든 사람들을 두고 주님께서 하신 그 말씀. 그렇다. 그분은 용서마저도 아버지께 맡겨버렸다. 용서하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용서해주시도록 기도하셨다. 바로 예수님의 방법이 아닌가! 결코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을 내가 용서하겠다고 너스레를 떠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맡겨버리셨다. 간음하여 돌에 맞아 죽을뻔한 여인을 구해주시고 물으셨다. ‘너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모두 갔습니다’ ‘나도 너를 용서한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단 한사람도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죽어야만 했던 그 여인을 향해 용서한다고 말씀하신 그분이다. 그런 예수님도 이 어리석은 유대인들과 잔인한 로마인들을 놓고서는 아버지께 맡기신다. 마치 깔데기를 통해 걸러져 나온 진액처럼, 주님의 이 말씀이 내 안에서 새로이 해석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도, 하나님 당신의 호흡으로 생명이 된 열매들입니다” 치유의 지점이 아닐까? 그들 또한 하나님의 입김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바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는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 결국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아닌가!’

이라크의 한 기자가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며, 죽어가는 아이들과 여인들을 지켜본 뒤 쓴 글이다. 

‘아브라함, 모세, 예수의 아버지 위대하신 하나님! 혹은 아브라힘, 무싸, 아이싸의 위대한 알라여! 어떤 사람들은 정말 더러운 영혼을 지녔습니다. 당신께 기도합니다. 이 참상을 목격한 아이들이 어른이 되기 전에, 그들의 종교가 무엇이건, 그들의 피부가 어떤 색깔이건, 타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부어주소서! 그들은 모두 같은 세상, 이 거대하면서도 작디작은 세계의 시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릅니다. 자기들이 ‘단 하나의 민족, 인간이라는 종족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이웃을 용서하세요’ ‘이웃을 사랑하세요’ 이것은 결코 계명 또는 의무가 될 수 없다. 칸트는 ‘사람의 행위의 윤리성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정복한 정도에 의존한다’고 그의 윤리학에서 거듭 말했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윤리적인 것은 항상 ‘너는 해야 한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느슨해진다면, 그 삶은 자연 비윤리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행하시지 않았다. 사랑도 용서도 결코 명령될 수 없다. 그것들은 항상 마음 전체를 요구한다. 혹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또는 목사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면, 나 자신에게도, 사랑 받고 용서 받는 대상에게도 참을 수 없는 일이다. 타율적인 것은 윤리적 행동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용서해야 한단 말인가!

독일의 설교자 ‘헬무트 틸리케’가 전한 이야기 하나를 인용해야겠다. 레마르크가 쓴 세계1차대전에 관한 책, ‘서부전선의 적막’의 한 장면이다. 한 독일군이 적군과 접전을 벌이다 포탄으로 패인 구덩이로 뛰어내렸다. 그는 거기서 영국군 하나를 보았다. 깜짝 놀라 총을 겨눴지만, 잠시 후, 영국 군인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상황은 달라졌다. 영국군인의 상처가 독일군인의 마음을 녹인 것이다. 그는 먼저 자기 물병을 꺼내 부상병에게 마시게 했다. 영국군인은 고맙다는 눈인사를 한 다음, 자기 옷에 달린 주머니를 열어 달라고 손짓했다. 그가 그 주머니를 열었을 때, 그의 가족사진이 들어있는 봉투가 떨어졌다. 영국군인은 죽기 전에, 그 사진을 다시한번 보기 원했던 것이다. 독일군인도 그 사람의 손에 들려진 사진 속 영국군인의 아내와 어머니 사진을 보았다. 처음 이 둘은 서로 싸우는 적이었다. 죽든지, 살든지의 선택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독일군 병사가 구렁텅이에 누워있는 이 부상당하고, 방어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리고 그의 가족사진을 보았을 때, 그의 눈에 이 영국군인은 더 이상 원수나 무기를 소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두 차원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결국 두 차원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한쪽은 살기를 띤 군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다른 한쪽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한 존재’이며 ‘인격’인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셨을 때, 이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가르침의 극단적인 자기표현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신께서 보시는 시선이었다. 그분은 늘 그랬다. 지금 주님을 향해, 침 뱉고, 조롱하고, 때리고, 모욕을 주는 ‘이 일들’을 하고 있는 저들도, 다른 한 면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호흡으로 생명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해주는 일이 ‘예수의 목적’ 아니었던가! 진흙으로 뒤덮여 있는 사람에게서 진흙을 닦아내 밝고 윤기 나는 얼굴과 눈빛을 보신 분이다. 그래서 삭개오도 만나주셨고, 문등병자도 만져주셨고, 간음한 여인도 변호해주셨던 것이다. 내가 귀하듯, 저들도 귀하다.


여중생을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된 김길태라는 사람의 얼굴을 버젓이 드러내고, 그의 뒤통수를 때리는 어떤 사람을 여과 없이 보여준 방송국 카메라는 너무 저속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말장난으로 ‘초상권이 존중받거나, 존중받지 않을 조건들’을 나열하는 경찰의 대변인은 비열했다. 그를 용서하는 몫은 일차적으로 피해자의 가족들이며, 광의의 범주에서 온 국민이 판단할 일이다. ‘나쁜 놈들은 모조리 쓸어버리고, 사회에서 매장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가진 사람들의 갈증을 해결이라도 해주겠다는 듯, 카메라는 자신의 뒤통수를 때린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피의자’의 모습을 보며 조롱하고 있었다. 더러운 영혼들!

난 이제부터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더러운 영혼들을 위해서 더욱 열심히 기도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결심했다. 용서와 사랑은 결국 나에게서 나와,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나의 용서받아야할 수많은 기억들과 사랑받고 싶은 갈망을 위무해줄 것이다. 하긴, 진정으로 자신을 십자가 앞에 세운 사람이라면,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행위도 자기 의지만을 쫓아 함부로 지껄이고, 행동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형폐지론자들이 말한다. "누가 사람이 사람을 죽일 권리를 주었는가?"
그러자 사형찬성론자들이 말한다. "누가 사람을 창살아래 가두어 둘 권리를 주었는가?"

다시 또 사순절 한복판에 섰다. 황지우의 시 한 편을 덧붙인다. 

소나무에 대한 예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 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 있는
建木 ; 소나무. 머리에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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