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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외국에 나가면 과연 애국자가 되는가? (이원필)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0. 5. 13.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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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나가면 과연 애국자가 되는가?


이원필
(독일 보쿰(Bochum)에서 미술사 공부 중)

마리아(Maria)와 토비아스(Tobias)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3월 말쯤이었다. 독일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는 아는 형님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독일인이 있다고 해서 내게 소개시켜준 두 사람이다. 자신이 외국인인 것을 이해해주고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현지인, 모든 유학생이 가장 바라는 것 중에 하나가 아닐까? 그래서 독일에서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이 소위 탄뎀(Tandem)이라고 불리는 독일인 회화 파트너를 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탄템의 의미는 쌍방이 상호적이라는 것 즉, 배우는 것이 있으면 가르쳐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 내가 독일어를 상대방에게 배우면 나는 상대방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독일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유학생은 많은데 비해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독일인은 상대적으로 극소수이기 때문에 언제나 극심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속에 있는 것이 바로 탄뎀 파트너이다.

많은 유학생들이 바라는 탄템 파트너에 더해서 보수까지 있는 한국어 과외 선생님(?)자리를 어떻게 마다할 수 있으랴, 너무나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토비아스에게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한국인 여자친구가 있으며 업무 때문에 한국에도 몇 번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한다. 토비아스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아들과 여자친구 덕분에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한국 여행을 위해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한다. 독일 유학 생활을 하다 보면 독일인 남성과 한국인 여성의 부부를 드물지 않게 만나게 되는데 이들 중에서 한국어에 관심 있고 배우려고 하는 독일인 남편을 보기란 경험적으로 굉장히 힘든 일이다. 그런데 아직 결혼도 안 한 독일인 남성에다가 그의 어머니까지 한국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외국어로 그것도 능숙하지 못한 외국어로 모국어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너무도 새로운 것이어서 사실 걱정이 되었다. 괜히 걱정이 된 나머지 첫 만남에서 내 독일어가 서툴기 때문에 영어와 섞어서 설명해도 괜찮겠느냐고 양해까지 구하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두 시간 정도의 공부를 위해 나름 내용적으로도 그리고 제대로 된 독일어를 구사하기 위해서 준비를 해가지만 막상 두 사람 앞에서 이것 저것 설명하다 보면 나의 독일어는 구문론적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는 단어들의 나열이 되기 일쑤고 독일어만의 독특한 발음을 제대로 발음 못해서 더듬거리며 일련의 분절음들을 내뱉는 내 자신을 보게 된다. 특히 독일어의 ‘r’발음은 한국인에게 꽤나 어려운 발음인데 말하고자 하는 마음만 급하고 아직 단련되지 못한 입술로 ‘r’로 시작하는 단어를 말하려 할 때는 항상 말더듬이가 되곤 한다. 마음이 급한 것은 항상 올바른 문장을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리라. 마치 독일어 수업에서 독일인 선생님이 문장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외국인 학생에게 “Ganzen Satz!”(완전한 문장)라고 다그치는 것처럼.

유학생–되기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압도적인 다수어와 다수적 문화에 대면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에 많은 유학생은 민족 별로 일종의 문화적 게토를 이루며 살아가는데, 다수적인 것과의 대면의 강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유학생–되기의 주체는 어느 정도 분열증적인 양상을 갖는 것 같다. 다수적인 것에 대면해서는 마치 항상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말더듬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신을 만나게 된다면 반대로 자신의 문화적 게토에서는 위축되었던 자신을 위한 일종의 보상으로써의 다소 과장된 몸짓을 취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내가 아는 대부분의 독일인들의 조언은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독일 사회와 문화에 통합되도록(integrieren) 노력하라. 분열되는 주체를 다수적인 것으로 통합하라.

독일 사회의 주목을 끌기에 유의미한 규모를 이루지 못한 한국인 유학생 사회와 달리 독일 내의 터키계 이주민 문제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지난 몇 년 새 인종차별 문제로 몇 번의 폭동의 일어나는 등 다문화 사회의 홍역을 치르고 있는 이웃나라 프랑스에 비해 덜 극적이긴 하지만 독일 역시 지난 수십 년간 계속되어온 터키계 이주민 문제에다가 근래에 들어 고조되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불안감이 더해져서 그들만의 물티쿨티(Multikulti: 다문화 사회의 독일식 표현) 문제를 겪고 있다. 터키의 3대 도시가 이스탄불, 앙카라, 베를린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약 200만 명의 터키계 이주민들이 독일 전역에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의 언어는 정확한 터키어도 독일어도 아닌 터키어와 독일어가 혼합된 것이라고 한다. 언어적으로 사회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터키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독일인들의 태도는 지난 독일의 과거로 인한 조심스러움이 묻어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유학생들에 대한 그들의 조언과 같다.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어느 정도의 한도까지) 인정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독일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상 언어와 사회적인 측면 에서 독일 사회에 통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다수적인 것으로의 통합이 단지 이루어지지 않는 소망으로만 남으며 끊임 없는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아마도 프라하에 살았던 유태인 카프카가 독일어로 글을 쓸 수도 없으며, 독일어 외의 다른 언어로 글을 쓸 수도 없으며, 어떤 언어로도 글을 쓸 수 없었던(들뢰즈/가타리) 이유와 무언가 관련이 있지 않을까. 물론 유학생은 이주민과는 다르다. 통합 역시 일시적인 것이며 언젠가는 통합을 유지하거나 본래의 그것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유학생–되기의 중요한 측면이다. 그러나 이러한 임시성과 간(間)존재적인 성격 때문에 유학생은 더욱 독일어도 한국어도 아닌 중간의 어떤 것으로 말할 수 밖에 없으며 양자 사이에서 분열적인 상황에 처한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은 단지 외국 사회, 문화로의 통합의 실패 혹은 포기에 대한 보상적 반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정원이 딸린 독일의 평범한 가정집에서 마리아와 토비아스와 함께 한국어를 공부하고 가끔 식사도 같이하는 시간만큼은 내가 어느 정도 독일 문화에 통합되었음을 느낀다. 동시에, 그들의 썼다기보다는 그린 것에 가까운 한글 글씨, 한국어의 된소리와 복모음을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약간의 위안을 얻으며 독일어에 대한 부담을 잠시 덜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유학생–되기의 과정은 본래적인 것(한국적인 것)을 어느 정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체득하기를 소망하지만 결국 소망에 다다르지 못하고 본래적인 것에 불가피하게 끌려가는 자신을 보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본래적인 것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것임을 언제나 다시 확인하게 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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