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신학 정보] ‘자크 데리다’ 특별기고: 천안함 침몰을 둘러싼 해체론적 독법 (II) (이상철)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0. 7. 15. 09:15

본문

‘자크 데리다’ 특별기고[각주:1]
: 천안함 침몰을 둘러싼 해체론적 독법 (II)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지난 호에 이어)

 

해체론, 비어있는 중심을 꿈꾸다

세상에는 우리가 뭐라고 꼭 집어서 말하거나 드러내보일 수는 없으나, 그 집단의 성원들이 모두 있는 것으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광의적으로 인간일반 전체에 형성되어 있는 것을 고르라면 종교라고 할 수 있겠죠. 일정 지역, 일정 거민들에게 통용되는 그것을 분석하려면 그 지역의 역사와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공부가 필요합니다.

한국의 경우를 들어 설명하자면 한국 현대사에서 나타났던 일제식민지 시절, 광복, 분단, 한국전쟁, 군사독재, 민주화 운동, 반공, 빨갱이, 좌파……이런 격동 속에서 한 평생을 요동치며 살아온 한국보수층의 눈으로 볼 때, 북한이 천안함을 타격했다는 것은 그들이 확실히 물증을 제시할 수 없고 밝힐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것이(북한이) 거기에(천안함을 침몰시켰다는 것) 있었다는 것은 대부분의 한국 보수층들이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문명충돌론, 이슬람 강경테러분자, 헤즈볼라, 9.11, 오사마 빈라텐, 사담 후세인……이런 기표들은 부시로 상징되는 미국 보수층들에게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지만 진실은 그것이(대량살상무기) 그곳(이라크)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과 미국이 설정하고 있는 천안함과 이라크를 둘러싼 그들의 진실은 미지의 무언가로부터 유래합니다. 결과와 양상은 다르지만 미지의 어떤 것에 의지한다는 점에서는 해체론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메시아적인 것이라 표현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메시아로 상징되어져서 무엇인가를 정초하고 토대 지어 깃발을 펄럭이며 그 아래로 사람들을 줄 세우는 것은 배격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존재론적 확신이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수많은 메시아주의를 낳아 사람들을 광기로 몰아넣었기 때문입니다. 천안함 침몰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논의과정, 이라크 침략을 둘러싼 미국의 그것은 해체론과 동일하게 알 수 없는 어떤 것’(저의 용어로는 메시아적인 것’)에 기인하나, 그것들은 해체론과는 반대로 너무나도 빠르고 확고하게 중심을 가득 채우는 기재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점이 바로 해체론에서 가장 경계하는 대목입니다.

저에게 있어 메시아적인 것이란 멈추지 않고 의혹에 휩싸여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곳은 누구나 들어 올 수 있으나, 그 누구도 정착할 수 없는 탈영토화된 공간입니다. 설사 그곳에 일정 기간 동안 시대를 대표하는듯한 지배적 정서가 있어 호령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 예외적 사건의 예로 기록되어진 후에 다시 괄호밖으로 미끄러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백악관이나 청와대와는 다른 해체론의 수사학입니다. 어떤 미지의 것에 기대어 이라크의 살상무기, 북한의 천안함 타격을 당연시하는 그들의 논리는 언뜻 해체론과 방법적인 면에서 공통점이 있는 듯 하나, 해체론에서 담론 너머의 가능성의 형태로 남기고자 하는 부분을 그들은 가득 채우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해체론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광기 안으로 미지의 타자를 끌어들이고 그 미지의 타자를 다시 투사하여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합니다. 하지만 해체론은 오히려 그와 반대로, 내 안에 도사리고 있으면서 호시탐탐 출몰을 꿈꾸는 광기의 욕동을 부단히 경계하면서 그 요소들을 미지의 타자에 기대어 밖으로 쫓아냅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우리를 부단히 반성하고 수정도록 합니다. 바로 이점이 해체론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My Autobiography, 나는 왜 해체론으로 세상을 읽는가?

벌써 20년 전 일이네요. 레닌의 동상이 붉은광장에서 철거되는 것을 지켜보며 저는 적잖은 충격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는데……저에게 두 가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하나는 현실 사회주의는 왜 좌절되었는가? 에 대한 부분입니다. 이 물음은 문제의 원인을 외부(자본주의의 발전과 승리)에서 찾기보다는 사회주의 내부의 문제, 즉 사회주의 혁명이 어떻게 전체주의적 폭압으로 전도되었는가? 에 대한 뼈아픈 자기반성과 관계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따로 시간을 내어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자본의, 자본에 의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완료된 시점에서 어떻게 다시 혁명을 사유하고 실천할 수 있는가? 에 대한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무렵 출판된 책이 Specters of Marx (1993)입니다. 이 책을 전환점으로 하여 저는 윤리적, 정치적 이슈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양산한 문제들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Gift of Death (1995), Of Hospitality (2000), Acts of Religion (2001), For What Tomorrow…(2004) 등이 그런 작품들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저의 후기 사상에서 우선 말하고자 했던 것은 전과 같은 강렬한 유토피아적인 열망도 아니고 그것을 위한 가열찬 투쟁의지도 아닙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유토피아적인 것들의 실현에 저는 솔직히 관심이 없습니다. 역사는 미래에 대한 확신을 제공해 주기보다 오히려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늘 우리에게 판단력을 요구하고, 기존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흔들어 놓습니다. 따라서 항상 자신을 새로운 실험적 상황에 던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저의 요즘 관심사는 이와는 정반대로 진보에 대한 신화를 비신화화하는 것입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의 무대처럼 쓸쓸하고 공허한 탈 중심화된 상태, 즉 기표가 사라진 혼돈을 사랑하고, 큰 타자의 부재를 인정하는 하는 것입니다. 부연하자면, 텅 비어 있는 실재의 공간에서 어떻게 하면 모든 하나 하나의 개체들이- (불법) 외국인 노동자라는 이유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3세계 민중이라는 이유로, 늙었다는(혹은 어리다는) 이유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리에서 소외되지 않은 채 참된 민주적 소통을 할 수 있을까? 다시말해, 텅 빈 실재의 공간에 어떻게 하면 공적 자유의 바람을 흐르게 할 수 있을까? 입니다. 다시는 그 무엇에 의해 점거당하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를 갈구하던 니고데모를 향한 예수의 답변,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 3:8)’라는 경구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상상을 하게 합니다. 또한 이 성전을 허물라시던 예수 자신의 외침과 후대 사람들이 했던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다라고 하는 예수에 대한 평가 또한 해체론이 추구하는 그것과 전략적 제휴의 가능성을 띄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신학과 해체론과의 대화는 현재 제가 하고픈 가장 매력 있는 작업이자 저의 최후 작업이 되지 않을까 싶군요.

에필로그: 오바마에 대한 추억……그리고 악몽 꾸다

합조단의 발표가 있은 지 며칠 후 (5 24), 이명박 대통령은 천안함과 관련하여 북한에 대한 경고를 내용으로 하는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였습니다. 이에 미국은 한국정부의 대응에 대해 절대적 신뢰를 보냈다고 합니다. 반 백 년 넘게 이어온 온 한미간의 공조로 미루어 볼 때 별 놀랄만한 일은 아니지만…..개인적으로는 오바마 역시 다른 미국의 대통령들이 했던 보편적인 나쁜 짓을 어느 정도는 다 하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각주:2]

저는 꿈을 잘 꾸지 않지만, 그 날은(이명박의 대국민 담화가 있었던) 간만에 꿈자리가 사나왔습니다. 영화 의 마지막 장면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텔레비전 밖으로 악령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기어 나오는 장면과 유사한 꿈이었습니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 주방으로 나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잠이 깼는데, 정신이 차려지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과거 군사독재 시절 대한민국을 감싸고 있었던 음습하고 공포스런 기억들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더군요. 정말 기분 엿 같았습니다. 대한민국 구천을 떠도는 잡다한 유령들이 다시 출몰하는 겁니까? 어디서 용한 무당 한 분 모셔다가 푸닥거리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잡귀야 물러가라!’하면서 말입니다. <>

추신> 엊그제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 6월 말에 한국을 방문해 한기총(?)에서 주관하는 무슨 집회에 참석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대형운동장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미국을 찬양하고 북한의 도발을 규탄하는 집회였고 은혜롭게 행사가 마무리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이라크전을 일으켰던 유령과 천안함을 둘러싸고 있는 유령간의 극적인 회합이었겠군요. 재미 있었겠네요. 누가 후일담 좀 들려주십시오. 

ⓒ 웹진 <제3시대>


  1. 데리다는 2004년 세상을 떴습니다. 물론, 졸고는 가상입니다. 필자가 이해한 데리다의 시선으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북한의 천안함 침몰간의 상동성을 밝히는 것이 지난 호 웹진 내용이었다면, 이번 웹진에서는 실재에 대한, 아니 우리가 실재라고 믿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데리다의 해체론적 독법이 갖는 함의에 대해 다룹니다. [본문으로]
  2. 필자가 현재 재학중인 Chicago Theological Seminary(이하 CTS) 교수, 동문, 학생들이 느끼는 오바마에 대한 애정은 남다릅니다. 아시다시피 시카고는 오바마의 정치적 고향이고 삶과 사상의 근거지입니다. 오바마의 집이 CTS와 5분 거리이고, 오바마가 20년 동안 다니며 결혼하고 자녀들도 세례받고 선거운동 직전까지 출석했던 시카고 트리니티 UCC교회가 CTS가 속한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UCC 교단이라는 점. 지난 대선기간 중 ‘갓 뎀 아메리카’논쟁으로 선거초반 최대 정치적 이슈를 이끌어냈던 시카고 트리니티 UCC교회 담임목사이자 오바마의 멘토인 제레마이 라이트 목사와 오바마 정치적 후견인이라 할 수 있는 현존하는 흑인 인권의 상징이자 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제시 잭슨 목사등이 모두 CTS 출신이라는 점, CTS교수님 중 몇 분은 오바마와 같은 교회에 출석하면서 직.간접적으로 몇 가지 이슈들(예: 동성애, 낙태문제등에 있어 기독교적 대응)에 있어 오바마캠프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CTS는 마치 집안 사람이 대통령이 된 듯한 착각과 황홀경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번 여름학기에도 제레마이 라이트 목사가 일주일간 ‘미국정치와 인권, 기독교’ 뭐 그런 내용으로 강의하고 있습니다. 새삼 그 모든 것들이 씁쓸하게 다가오는군요. 미국 진보세력의 희망이라 불리웠던 오바마 역시 미국의 국익에 충실한, 보통의 미국 대통령이었습니다. 물론 국내 정치에 있어서는 미국 진보진영의 숙원사업이었던 의보개혁안을 통과시키고, 동성애자의 군복무에 대한 평등권을 추진하는 등 전직 대통령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는 하나, 외교부분에 있어서는 다른 미국의 대통령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프간 전쟁이나 이번 천안함 침몰을 둘러싼 입장 표명에서 보듯이) 미국의 정의와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고 유령의 등장을 묵인하고 그것을 이용할 줄 아는 그런 대통령 말입니다. 어쩌면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미리 유령들이 짜놓은 판대로(매트릭스) 말판을 놓는 역할만을 담당하는 허수아비라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오바마에게 큰 기대를 했었나 봅니다. 또 속았군요. [본문으로]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