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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정보] ‘바라빠 이야기’ 연구 동향 (2) (정용택)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0. 8. 17.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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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빠 이야기’ 연구 동향 (2)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1. 속죄제의에서 수난이야기로!

빌라도가 마음이 흔들려서 예수를 놓아주려 하다가 결국 예루살렘의 영향력 있는 엘리트층의 요구를 묵인하는 쪽으로 결정을 했다는 복음서의 묘사는 지속적으로 의문시되어 왔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묘사는 예수와 초기 그리스도교를 친(親)로마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변증적 목적에서 생겨났다고 추정한다.[각주:1] 그리고 그런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빠의 이야기도 반(反)유대/친(親)로마적 정황에서 생성된 픽션으로 이해되어왔다.

지난 호의 글에서도 소개했듯이, 바라빠 이야기에 대한 주목할 만한 연구를 제출한 학자들은 대체로 그 이야기가 만들어진 역사적인 삶의 자리를 초기 그리스도교의 변증적 상황에서 파악했다. 즉, 아람어 ‘압바의 아들’(아버지의 아들)의 음역인 ‘바라빠’(Barabbas)는 원래 나자렛 예수에 대한 또다른 별칭이었다는 것과, 우리가 갖고 있는 현재의 본문은 예수에 대해 별개의 혐의로 열린 두 개의 분리된 재판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한 것이라는 주장이다.[각주:2] 나자렛 예수로부터 분리된 가공의 인물인 바라빠 예수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와 바라빠 예수 사이에 뒤바뀐 운명을 극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예수의 사형에 대한 책임이 로마 권력자들보다는 전체 유대인들에게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 복음서의 의도라는 것이다.

물론 복음서 저자가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고대 세계에서 종종 있었던 특별한 죄수 사면의 예들을 참조사례로 활용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인정되었다. 예컨대 메리트에 따르면, 변증적인 동기를 갖고 있었던 복음서 저자는 예수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에 관해서까지 세부적인 이야기를 정교하게 만들어 내려 했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레꼬-로만 세계의 유사한 죄수 특별사면의 예들을 인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B.C.E 561년에 바빌론 왕이 여호야긴을 석방시킨 사건(렘 52:31; 왕하 25:27) 같은 것들이 결정적인 참조사례가 되었다는 것이다. 오스 역시 이러한 견해를 이어받아, 바라빠 이야기를 『에스더서』에 관한 일종의 미드라쉬, 즉 해설적 기술방법의 결과라고 주장한다.[각주:3]

그런데, 2007년에 제니퍼 맥클레인이 발표한 논문은 바라빠 이야기의 문학적 창작성은 인정하면서도, 그 이야기가 창안된 삶의 자리를 전혀 다른 곳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각주:4] 그가 제안하는 비교 자료의 핵심은 바로 그레꼬-로만 세계에 편만했던 ‘치유 퇴출 의식’(Greco-Roman curative exit rites), 특히 그중에서도 그리스의 파르마코스(pharmakos; Φαρμακος) 의례와, 그것의 영향 하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되는 레위기 16장의 아사셀염소 의례이다. 그는 치유 퇴출 의식이라고 하는 그레꼬-로만 세계의 보편적 의례 문화의 맥락에서, 그리스의 파르마코스와 레위기의 아사셀 염소가 이른바 공동체의 정화를 위해 밖으로 추방되었던 속죄염소(scapegoat)의 이종변형(異種變形)이라고 보고 있다.

르네 지라르와 자크 데리다 등에 의해서 잘 알려진 용어인, 파르마코스는 ‘독’이면서 ‘약’이란 뜻을 지녔으며 그리스의 축제 때 뽑힌 인간 희생물을 의미한다. 보통 파르마코스는 그 공동체 사회에서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서 주로 ‘근친상간’과 ‘아비살해’라는 금기를 어긴 자가 뽑혔다고 한다. 즉 그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질서를 파괴한 자를 희생제의로 제거하고 평화와 질서를 다시 찾으려고 하는 축제가 그리스의 ‘파르마코스 축제’인 것이다.[각주:5]

맥클레인에 따르면, 바로 이 파르마코스의 유대적 변종이 레위기 16장에 나타난 아사셀 염소이다. 레위기 16장은 레위기에서 청정법(淸淨法)과 성결법(聖潔法)을 잇는 본문으로서, 이 본문의 주제는 ‘속죄의 날’(Yom Kippur)이다. 속죄의 날에 아론은 자신과 그 집안을 위한 한 마리의 속죄제 숫소와 한 마리의 번제용 숫양, 또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두 마리의 속죄염소와 한 마리의 번제용 숫양을 준비해야 한다. 이때, 전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속죄제의 예식에서 두 마리의 염소 중 하나는 야웨께 드려지고, 다른 하나는 백성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광야의 ‘아사셀’에게로 보내진다(레 16:9, 15-20a).

살아 있는 그 숫염소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이 저지른 온갖 악행과 온갖 반역 행위와 온갖 죄를 다 자백하고 나서, 그 모든 죄를 그 숫염소의 머리에 씌운다. 그런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손에 맡겨, 그 숫염소를 빈 들로 내보내야 한다. 그 숫염소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갖 죄를 짊어지고 황무지로 나간다. 이렇게 아론은 그 숫염소를 빈  들로 내보낸다.(레 16: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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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아사셀을 위한 염소를 광야로 내보내는 예식(레 16:10, 20b-22)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선 학계에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현대의 일부 비평가들에 따르면, 아사셀염소 예식은 고대 근동의 예식을 차용한 것이며, 레위기 16장은 여러 차례의 개정과 편집과정을 거친 복합적 문학층을 가진 본문이라고 한다.[각주:6]

특히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은 아사셀의 이름이 정확한 무슨 뜻이냐는 것이다. 히브리성서 안에서도 아사셀이라는 단어는 오직 레위기의 이 본문 안에서만 사용된다. 속죄일에 관한 규정 역시 오경의 레위기와 민수기를 제외하고는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아사셀의 의미를 둘러싼 여러 가지 해석들이 존재하지만,[각주:7] 맥클레인은 아사셀이 광야에 거주하는 악마를 지칭하는 용어라는 해석을 지지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맥클레인도 인용하고 있듯이, 외경 에녹서(에녹 8:1; 9:6; 10:4-8; 13:1-2; 54:5)에서 아사셀은 깃털이 달린 악령의 존재로 나타난다. 더욱이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보내지는 장소가 일반적으로 악령들의 거주지로 인식되던 광야라는 점이나, 첫 번째 염소가 야웨를 위한 것으로서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바쳐진 것이라면, 나머지 한 염소가 그와 대비되는 또다른 초자연적 존재, 즉 악마를 위해 바쳐진 것으로 보는 것이 큰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기할만한 점은, 구약학자들이 대체로 이 아사셀염소 의식의 기원을 히타이트나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근동의 제의를 차용한 것으로 보는 데 반해, 맥클레인은 이를 근본적으로 그레꼬-로만 세계의 ‘치유 퇴출 의식’의 영향권 안에서 파악한다는 것이다.

맥클레인에 따르면, 아사셀염소 의식이 공동체의 위기에 대한 대응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예식의 과정을 통해 지위의 변형을 경험한 한 공동체의 구성원의 지명에 응하여 신성한 권력을 집중시키고 지시하는 의례적 행동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적을 향해 공동체로부터 지명된 사람의 퇴출을 수반하는 동시에, 그의 공동체로부터 멀리 떨어져나간 피지명자의 재난을 전환시키는 대리적 행동과 같은 요소들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고대 그리스의 인간 희생물 제의를 동물 희생 제의로 발전시킨 흔적을 보여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이러한 해석이 이미 초기 그리스교의 교부중 하나인 오리겐에 의해서 일찍부터 취해졌음을 주목한다. 오리겐에게, 그 속죄염소는 악마의 형상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추방 징후는 악마의 운명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지지자들에 관한 것이었다. 오리겐은 속죄염소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악마에 대한 전형적 상징으로 이해한 최초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라 할 수 있다.

한편, 맥클레인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와 바라빠 예수의 대조적인 운명에 관한 마가복음 15장의 기술이 레위기 16장의 아사셀염소의 의례를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치유 퇴출 의식이라는 맥락에서, 파르마코스-아사셀염소-바라빠는 모두 다 사악한 죄악의 전염이라는 공동체의 위험을 제거하면서 혹은 치유하면서, 사회 내부적 죄악들을 뒤집어쓰고 공동체 밖으로, 즉 광야로 퇴출당하는 의례의 희생제물을 표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나자렛 예수도 아닌, 바라빠 예수가 파르마코스 혹은 아사셀염소로서 속죄제물(Scapegoat)이 될 수 있을까? 맥클레인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속죄제물과 희생제물에 대한 개념적 구분을 숙지해야 한다. 맥클레인은 복음서 수난이야기에서 나자렛 예수는 희생염소(Immolated goat)이지 속죄염소(Scapegoat)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레위기 16장의 두 염소의 경우처럼, 야웨께 바쳐진 한 염소는 성전과 성소의 정화를 위해 죽임당하는 희생양이 되었지만, 아사셀에게 바쳐진 다른 염소는 공동체의 죄 자체를 제거하기 위해 온갖 부정과 죄악을 대신 뒤집어쓰고 학대 끝에 공동체 밖으로 쫓겨난 것이다.

유대-로마 전쟁 이후 성전이 파괴되고, 성전에서 이루어지던 속죄의 날 의례도 당연히 폐지되었다. 바로 그러한 정황 가운데서 초기 그리스도교는 속죄제의를 문학화하여 예수의 수난이야기를 재구성했다는 것이 맥클레인의 주장이다. 성전에서의 속죄제의가 갑작스럽게 중단된 데서 찾아온 혼란을 겪고 있었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속죄제의의 드라마틱한 역사적-신학적 종결의 서사가 필요했고, 바로 그것이 두 ‘예수’의 이야기로 표현된 것이라고 한다. 광야로 추방된 아사셀염소가 야웨께 드려진 희생염소와 동일하게 원래 아론에 의해 준비된 염소들 중 하나였던 것처럼, 바라빠 예수 역시 나자렛 예수 안에서 나온 또다른 예수였기 때문에, 둘은 나란히 속죄제의의 그리스도교적 번안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바라빠 예수를 통해 초기 그리스도교는 속죄제의의 역사적-신학적재구성을 도모했다. 예수는 성전 혹은 이스라엘 민족을 정화하는 희생염소였고, 바라빠는 유대인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제거당한 부정한 속죄염소를 상징하는 것이다.

마가복음은 바라빠가 저지른 죄목을 민란, 즉 정치적 봉기로 묘사하고 있고, 그를 단순히 일반 범죄자가 아닌 일종의 무장 혁명세력(레스타이, λῃσταί)의 일원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런 인물을 유대인들이 풀어달라고 했을 때, 빌라도가 순순히 풀어주는 것이나, 또 그것을 중간에서 부추긴 것이 로마와 결탁한 대제사장들이었다는 것 등, 바라빠 이야기 안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바로 그러한 해석상의 난맥을 맥클레인은 새로운 각도에서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예컨대, 빌라도에게 바라빠를 풀어달라고 한 대제사장들과 그에 매수된 군중들의 진의는 바라빠를 유대 사회로부터 상징적으로(혹은 의례적으로) 퇴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바라빠를 살리기 위해 석방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손으로 학대하고 추방하기 위해 빌라도를 압박한 것이다. 빌라도는 그런 유대군중들의 의중을 파악했기 때문에, 정치범인 바라빠를 순순히 풀어준 것이다. 마가복음 저자는 이렇게 바라빠 사면을 통해 유대군중들의 반(反)민족주의적이고 반(反)정치적인 측면을 한껏 부각시키면서, 동시에 예수를 자연스럽게 레위기 16장의 맥락에서 속죄제의의 희생염소로 의미부여할 수 있었다.

요컨대, 예수가 이스라엘의 정화를 위해 야웨께 바쳐진 희생제물이라는 신학적 언설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서, 예수 죽음의 상황을 속죄의 날의 맥락과 더욱 유사하게 재구성할 필요성이 있었고, 여기에 아사셀염소 역할을 맡을 누군가가 역시 필요했던 것이다. 그게 바로 바라빠 예수라는 가공의 인물이었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맥클레인의 논문은 바라빠 이야기가 완벽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문학적/신학적 창작이라는 기존 바라빠 연구자들의 논지를 보다 정교하게 강화하고 있다. 바라빠 이야기의 삶의 자리는 이제 단순한 반(反)유대주의를 넘어, 성전 파괴 이후의 시대에 속죄제의를 완벽히 대체하는 복음서의 수난이야기에서 찾아진 것이다. 맥클레인은 바라빠 이야기의 맥락을 초기 그리스도 내부의 문제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바라빠 연구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2. 바라빠에서 오클로스로?

물론 맥클레인의 논문을 통해서도 여전히 해명되지 않는 것이 남아 있다. 바라빠 이야기를 만들어낸 이들과 그 이야기 안에 등장하는 이들 간의 관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두 회에 걸쳐 살펴본 바라빠 연구자들의 견해는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그 사건, 곧 빌라도 법정에서 일어난 일들의 역사적 실제성을 철저히 제거하는 쪽으로 진행되어왔다.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는 오로지 예수가 빌라도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고 죽었다는 것뿐이다. 예수와 빌라도를 제외하고, 바라빠와 관련된 여타의 사건과 인물들은 그 창작의 동기와 맥락은 각각 다르게 설명될지라도, 어쨌거나 모두 문학적 상상의 산물이라는 해석은 변함이 없었다.

우리가 살펴본 여러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이러한 결론을 취하는 배경에는 바라빠라는 인물의 이름의 시대착오적 성격 및 그 이름의 진의를 탐구할수록 드러나는 그리스도 예수와의 긴밀한 연관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필경 이 연관성은 우연적인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절묘한 것이어서 모종의 신학적 의도가 반영된 문학적 장치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의혹을 집요하게 밀어붙인 끝에 맥클레인은 이상과 같은 획기적인 해석을 제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이들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바라빠 이야기가 포함된 빌라도 법정 이야기 안에는 예수와 빌라도, 바라빠, 대제사장들, 그리고 무리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이 이야기는 그들 중 어느 누구로부터도 전승되지 않았고, 완벽한 시간적 공백을 둔 채, 후대의 복음서 공동체 안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리그부터 맥클레인에 이르는 모든 바라빠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지금까지 바라빠 이야기를 연구해온 모든 서구 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역사적 진실성을 평가하는 데 있어 오로지 바라빠라고 하는 인물에만 집중해왔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결코 바라빠가 아니다. 바라빠와 예수는 이 이야기 안에서 타인에 의해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수동적인 객체로 철저히 머물러 있다. 그리고 빌라도와 대제사장들은 주인공의 선택과 요구에 휘둘리는 혹은 그것을 충동질하는 부차적인 조연에 그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 안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즉 주체적인 존재로 등장하는 것은 오히려 ‘오클로스’ 즉 ‘무리들’이라는 사실이다. 서구 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일차적인 주인공인 오클로스를 통해 마가공동체에까지 이야기가 전승되었을 가능성에 관해서는 어떠한 추론도 해보지 않았다. 

사실 바라빠만을 주목하고 이 이야기를 접근한다면, 당연히 이 이야기는 허구적 성격이 다분하지만, 만일 오클로스의 관점에서 본다면, 허구라고 단정 짓기 어려운 측면들이 분명 있다. 바라빠는 마가복음의 서사에서 뜬금없이 갑자기 등장하고 있지만, 오클로스는 그렇지 않을뿐더러, 공관복음이 그 자체로 예수가 무엇을 행하였고 말했는가보다는 예수의 처음 제자들이 그가 무엇을 행하거나 말한 것으로 ‘기억했는가’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의 입장[각주:8]을 따른다면, 이 이야기를 순전히 창작의 산물로서 허구라고 확정짓기 전에, 누구에 의해 이 이야기가 기억되고 전달될 수 있었는가를 더욱 치밀하게 물어 들어갈 필요가 있다. 

그래서 다음호 웹진에서는 바라빠 이야기를 오클로스의 기억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필자의 견해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 웹진 <제3시대>


  1. Craig A. Evans/김철 옮김,『마가복음 8:27-16:20: WBC 성경주석』(서울: 솔로몬, 2002) 728. [본문으로]
  2. Rigg, “Barabbas,” 417–456; Stevan L. Davies, “Who is Called Bar Abbas?,” NTS 27 (1980–81) 260–262; H. Z. Maccoby, “Jesus and Barabbas,” NTS 16 (1969/1970) 55–60. 이러한 학자들의 논의에 관한 보다 자세한 소개는, Brown, The Death of the Messiah (Vol.1), 811–814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3. Roger David Aus, “The Release of Barabbas (Mark 15:6–15 par.; John 18:39–40), and Judaic Traditions on the Book of Esther,” in Barabbas and Esther and Other Studies in the Judaic Illumination of Earliest Christianity (Atlanta: Scholars Press, 1992) 1–27. 이는 마치 마태복음이 예수의 유년설화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베들레헴에서 어린아이가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과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태복음 저자는 예수를 모세와 같이 위대한 인물, 즉 제2의 모세로 제시하고자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의 이야기 중 히브리인 가정의 어린아이들이 파라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출 1:15)를 예수의 유년설화를 구성하는 데 전유한 것이다. 따라서 오스에게 있어, 바라빠의 사면 사건이 역사상에서 실제로 발생했는가 아닌가는 애초부터 복음서 이야기의 미드라쉬적 성격을 간과한 잘못된 물음인 것이다. [본문으로]
  4. Jennifer K. Berenson Maclean, “Barabbas, the Scapegoat Ritual, and the Development of the Passion Narrative,” HTR 100:3 (2007) 309–334. [본문으로]
  5. Rene Girard/김진식 · 박무호 옮김, 『폭력과 성스러움』(서울: 민음사, 1997) 144-150. [본문으로]
  6. 이상란 · 정중호, “대속죄일과 아사셀,” 『구약논단』3호(1997) 5-6. [본문으로]
  7. 아사셀의 의미에 관한 해석들에 대해서는 이충호, “대속죄일과 아사셀염소: 레위기 16장을 중심으로,” 감신대석사논문 (2009) 73-80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8. James D. G. Dunn/차정식 옮김,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서울: 새물결플러스, 2010) 19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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