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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정보] 해체론적 성서읽기는 가능한가? (이상철)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0. 8. 1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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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론적 성서읽기는 가능한가?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해체론에 대한 농담, 거짓말, 그리고 진실

데리다는 이런 질문에 항상 시달렸다고 한다: “해체 이후에는 무엇이 남는가?”, “해체 이후의 대안이 무엇인가?” 만나는 사람마다 이런 질문을 했을텐데… 정말 짜증났을 것 같다. 해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흔히 파괴를 떠올린다. 그래서 불안한 것이고, 그러기에 불온한 것이다. 아마도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라는 용어만큼이나 심한 주술적 위력을 보이는 개념과 집단을 꼽으라면 해체론과 동성애가 아닐까 싶다. 아니 오히려 이제는 빨갱이라는 말에는 워낙 익숙하고 내성이 강해진 터라 해체와 동성애가 현 시점에서는 더 진한 주홍글씨일 수 있겠다.
해체론을 언급할 때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부분이 바로 이러한 해체론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가라앉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데리다에게 있어 해체란 즉물적인 의미에서 무엇인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관념 이면에 묻혀있었던 것을 발굴하여 원래 저자도 의도하지 못했던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다. 이는 데리다가 지니고 있었던 문헌학자로서의 특이한 이력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후설, 하이데거, 소쉬르 등의 책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기존의 관점이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면밀한 독해를 시도한다.[각주:1]
 
예를 들어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보면 발명의 신 테우스와 타무스 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테우스가 문자와 과학을 발명하고는 이것이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킬 것이라 자신하며, 특별히 문자는 사람들의 지혜와 기억력을 높여줄 것이라 장담했다. 하지만 타무스왕은 사람들이 문자에 의존하게 되어 기억력이 쇠퇴하고, 지혜의 실체보다 지혜의 외관에 치중하는 결과를 가지고 올 것이라 반박했다. 이것이 데리다가 파악한 서구 정신사의 전개 과정에서 드러난 음성언어가 문자언어보다 우위에 있다는 소위 ‘음성중심주의(Logocentrism)’[각주:2]의 기원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는 플라톤이 범하는 오류를 발견한다. 만일 문자가 타무스 왕이 말한 것처럼 해악한 것이라면, 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문자로 기록했는가? 혹 겉으로는 문자언어에 대해 폄하하면서도 속으로는 문자언어에 대한 동경의 마음 있었던 것은 아닌가? 
 
데리다가 플라톤의 저작에 등장하는 데미우르고스의 우주 창조시 물질의 역할을 했던 코라를 재발견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나는 플라톤을 연구하는 매 순간마다 그의 작품 안에 있는 이질성(heterogeneity)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티마이오스(Timaeus)에 등장하는  코라(Khora)가 어떻게 플라톤이 전제하고 있는 체제속에서 양립할 수 없는지 찾으려고 한다. 나는 플라톤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플라톤에 충실히 이해하기 위해 그의 작품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을 공히 분석한다.”[각주:3]
 
위의 인용구에서 보듯이 데리다는 이분법적인 구조에 입각한 위계적인 구조보다는 작품내 등장하는 요소들의 상호의존성에 주목한다. 플라톤에게 있어 코라는 이분법적인 구도속에서 하층부에 있는 억압당하는 물질을 상징한다. 하지만 데리다는 이러한 플라톤의 코라에 대한 이해를 해체하여, 생명을 담지하고 있는 가능성과 잠재태의 영역으로서의 코라를 다시 읽어낸다. 즉 동일성(이데아)의 법칙에 의해 ‘배제된 것’(코라)이 어떻게 실제로는 그 규범(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내부적 요인으로 작용하는가? 이러한 데리다의 플라톤의 코라에 대한 해석은 우리가 어떤 사물의 ‘그것 됨’을 판단할 때 그 사물과 다른 대상과의 표면적 대립(차이)을 통해 그 사물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정설을 뒤엎는, 그 사물 안에 이미 외부적으로 대립해왔던 대상이 들어와 있음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텍스트 분석에 있어 새로운 상상력을 우리에게 제공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데리다의 텍스트 독해방식을 성경읽기에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에서 나는 데리다의 코라에 대한 새로운 읽기 방식을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의 족보와 열왕기상에 나오는 솔로몬의 재판에 적용해보고자 한다.
 
 
‘빛나는’ 예수의 족보 안에 스며있는 ‘부정한’ 것들
 
신약성서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은 예수의 족보로 시작된다. 예수의 족보를 살펴보면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다윗에서 스룹바벨로 상징되는 바벨론시기까지, 바벨론에서 다시 그리스도까지 공히 열네 대씩을 지나 예수에게로 이스라엘 민족의 정통성이 흘러왔다고 밝히고 있다. 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윗을 거쳐 예수에게로 깨끗한 선민의 피가 유구한 세월을 거쳐 틀림없이 이어져 왔음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럼으로써 예수의 족보에 흐르는 깨끗한 선민의 피는 이방신을 섬겼던 주변 오랑케의 족보와는 뚜렷한 외면적 차이와 대립을 보이면서 그 정통성을 인정받는다. 그런데 예수의 족보안에 그토록 경멸하고 외부적으로 대립해왔던 이물질이 들어와 살며시 숨어있다면?
 
실제로 예수의 족보에는 시아버지와 정사를 벌인 다말이, 이방인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경멸했던 오랑케였던 모압 여인 룻이, 다윗에게 겁탈당한 유부녀 밧세바가, 그리고 저주받은 땅, 갈릴리 처녀 마리아의 이름이 버젓이 올라있다. 예수의 족보에서 강조하고자 했던 아브라함-다윗-예수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상층부의 역사를 배반하는 정반대의 부정한 이름들이 예수의 족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의 족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수는 분명 ‘아브라함-이삭-야곱-다윗’ 거쳐 내려오는 선민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하지만, 예수는 또한 라합, 다말, 룻, 밧세바, 마리아로 상징되는 하층민들, 소수자들, 변방에 머물러 있는 타자들까지를 포함하는 그런 인물인 것이다. 이런 해체적 독법을 통하여 예수의 외연은 이스라엘 상층부의 역사에만 매몰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이렇듯 외부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자기 내부에서 발견될 때 그것을 데리다는 ‘차연’이라 불렀고, 해체론은 대상 속에 이미 내재하고 있는 그 차연을 발견하고 폭로하여 사물이 지녔던 본래의 의미에 틈을 내고 주름을 만들어 그것의 체적을 늘리고 연장시킨다.[각주:4]
 
데리다의 해체론은 기본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다시 읽기를 통해 숨겨져 있었던 의미를 발견해내고 그럼으로써 종전의 해석을 전복시켜 독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해석의 창에 이르게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솔로몬의 재판(왕상 3:16-28)’을 예로 다시 한번 데리다를 따라 가 보기로 하자.
 

칼의 왕, 솔로몬

두 여인이 한 아기를 놓고 저마다 자신이 낳은 아이라고 우기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점점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어 가고 급기야는 솔로몬에게까지 이르게 되는데……자칫 미궁으로 빠질뻔한 이 사건은 솔로몬의 지혜로운 판결에 의해 해결이 되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지혜를 이용하여 생모를 구별해냈다는 이 이야기는 솔로몬을 지혜의 왕으로 등극시킨 결정적인 본문이다. 교육열 높기로 유명한 우리나라의 학원 이름 혹은 학습지 제목을 훑어보면 아마도 하버드만큼이나 솔로몬이란 이름도 많을 것 이다. 이 모두가 ‘솔로몬 = 지혜’라는 잘못된 신화에 기인한 웃지 못할 진풍경이라 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성서에 나와있는 솔로몬에 대한 재판을 해석하기에 앞서 피로 점철되었던 솔로몬 가계의 역사와 솔로몬의 권력투쟁에 대해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6명의 아들을 두었고, 이스라엘에서 13명의 아들을 낳았다. 성경에 나오는 굵직한 다윗의 자손은 암논, 압살롬, 다말, 아도니야, 그리고 솔로몬이다. 이중 솔로몬만 예루살렘 세대라 할 수 있고, 나머지 자식들은 헤브론 출신이다. 전체 족보상으로 다윗의 장남은 암논이다. 그런데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겁탈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다말의 친오빠였던 압살롬은 이에 분노하여 암논을 살해하였고, 아버지 다윗에게까지 반란을 일으켰다가 군사령관 요압에게 죽임을 당한다. 솔로몬은 성장면서 이러한 피로 점철되었던 자기 가문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권력의 생리를, 칼의 논리를 온몸으로 체득하며 자라났다.
 
솔로몬 권력투쟁의 절정은 다윗의 노쇠로 인한 레임덕 상황에서 발생하였다. 다윗 구파라고 할 수 있는 요압 장군, 아비아달 제사장의 비호를 받는 아도니야와 예언자 나단과 밧세바가 지원하는 솔로몬과의 마지막 대결에서 솔로몬은 최후의 승자가 된다. 족보상으로는 솔로몬보다 형인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어야 맞다. 하지만 권력을 향한 야망에 가득 찬 사람들에게 그런 족보 같은 것이 뭐 큰 대수이고, 삶의 도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솔로몬은 권력에 오르자마자 자기 형인 아도니야와 자기 아버지의 평생 측근 요압장군을 처형하였고, 제사장 아비아달은 멀리 추방시켰다.  
 
이러한 역사를 종합해보면, 솔로몬은 참 불행한 사람이었다. 아비가 아들을 죽이고, 오라비가 여동생을 강간하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모습을 다 지켜봤던 사람이 솔로몬이었고, 급기야는 자기 역시 (그 동안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배운대로) 자기 형을 죽이고 왕이 되었던 인물이 솔로몬이다. 솔로몬의 히브리어 뜻이 ‘평화롭다’라고 하니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일인가? 그렇다면, 평생 평화롭지 못했던 솔로몬에게 있어 지혜란 무엇이었을까? 이제야 비로소 ‘솔로몬의 재판’을 이야기할 시점에 이른 것 같다.
 
 
그 재판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두 여인이 한 아기를 두고 바락바락 우겨대는 사건이 솔로몬 눈앞에서 발생한다. 더군다나 두 여인은 천한 창녀였다. 각각의 변론을 들어보니 죽은 아기는 상대방의 아이이고, 살아있는 아기가 자기 아이란다. 이런 골치 아픈 일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했었지? 살아오면서 대화와 타협, 화해와 용서의 경험이 없었던 솔로몬이다. 대화와 타협보다는 음모와 배신이, 화해와 용서보다는 처벌과 죽임이 솔로몬이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었다. 솔로몬은 두 여인의 변론을 듣고 나서 본능적으로 칼을 갖고 오라고 명한다. 이 대목에서 주석가들은 솔로몬이 지혜를 발휘하여 두 여인의 속마음을 떠보려고 이처럼 말했다고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인생이 솔로몬에게 준 교훈이 무엇이었나? 골치 아픈 일이 발생했을 때,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솔로몬이 그 위기를 벗어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칼이었다. 솔로몬에게 있어 지혜란 언제 누구에게 어느 시점에서 칼을 정확하게 쓸 것인가를 가늠하는 것이다. 그것이 솔로몬의 지금을 있게 했고, 앞으로도 당연히 그럴 것이다. 솔로몬은 이러한 칼의 논리에 아주 충실했던 사람이었고, 그것에 입각해 칼을 갖고 와서 아이를 잘라 반반씩 나누라고 한 것이라면 너무 불손한 해석인가?
 
극의 반전은 그 다음에 일어난다(왕상 3:26). 성경은 그 아이 어미의 마음이 “아들을 위하여 불붙는 것 같았다”(개역)고 적고 있고, “자기 아들에 대한 모정이 불타올랐다”(표준새번역)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는 진짜 어미가 “살아있는 아기를 저 여인에게 주어 죽이지 말라달라”고 솔로몬에게 애원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게 왠 황당한 시츄에이션? 솔로몬은 놀랐을 것이다. 다른 여인은 상식적으로 칼로 아이를 잘라 반씩 나누자고 말하는데, 그것이 내가 아는 선에서 최선의 선택이고 바른 판단인데, 저 여인의 행동과 말과 표정과 눈물은 무엇이지? 왜 오바하는 거야? 생전 처음 벌어진 칼의 논리가 아닌 다른 해법을 접하고 솔로몬은 당황해 한다. 세상에 뭐 이런 게 있어? 내가 그동안 뭔가를 놓치고 살아온 것이 아닐까?
 
그 다음 구절에서 표준 새벽역은 이렇게 적고있다: “그때에 드디어 왕이 명령을 내렸다”(왕상 3:27). 나는 이 구절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그때에 드디어 왕에게 지혜가 임했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솔로몬은 생의 최초로 칼의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기준으로 판정을 내린다: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의 어머니이니라.” 칼과 죽임의 논리에 빠져 있던 솔로몬에게 살림과 생명의 논리가 최초로 선포되는 장면이다.
 
‘저 하늘에 별이 빛나듯 내 마음에는 도덕율이 빛난다’고 칸트가 그랬다지. 자고로 동서고금을 망론하고 지혜는 천상의 영역이었고 선택된 자들만이 닿을 수 있는 영역이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지혜와 진리는 정치학의 기초로 가장 선한 자, 즉 가장 우수한 자가 국가를 통치해야 했다. 중국에서도 국가 경영의 모델은 언제나 요순시대나 삼황오제 같은 성군들의 차지였다. 이렇듯, 인간의 마음에 있는 지혜와 도덕, 그리고 명석한 판단은 높이 있는 별을 따듯이 높은 양반들만이 그곳으로 올라가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솔로몬을 이러한 원칙에 부합하는 대표적 인물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해체론적인 읽기를 따라 다시 꼼꼼히 본문을 읽어보니 수상한 점이 보인다. 지혜의 출처가 솔로몬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지혜란 생명의 논리이고 사랑의 언어이다. 그런데 그것이 솔로몬이 아니라 한 아이의 어미에게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지혜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여인으로부터, 마치 이데아가 코라에 기대어 자기를 실현했던 것처럼, 지혜가 흘러나온다. 솔로몬은 그저 흘러나오는 지혜를 만졌을 뿐이다. 이처럼 해체론적인 읽기는 동일성의 윈칙에서 벗어난 것이 어떻게 실제로는 그 원칙을 성립시키기 위한 내부적 필수요건이 되는가를 보여준다. 그 결과 지혜는 솔로몬으로 상징되는 상층부의 전유물이 아닌 일반 민초들의 영역으로까지 직영을 넓히며 그 외연의 확장을 도모할 수 있었다.
 
 
에필로그: 해체론이 노리는 것
 
글의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해체는 파괴와 동일어도 아니고, 한국 보수주의자들이 빨갱이라는 말을 대할 때 보이는 공포와 적대감이 되어서도 안된다. 오히려 해체론은 우리 생각에 새로운 창을 내어 인식의 지평을 넓혀 오늘의 우리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또한 해체론은 우리로 하여금 깨어서 (미쳐 돌아가는) 이 시대와의 불화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고, 그전에 그럴 수 있는 상상력을 제공한다. 그리고 해체론은 해체론이 타켓으로 삼는 대상의 조밀함과 견고함의 정도가 세면 셀수록 더 집요하고 파괴적으로 도전장을 내밀어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과다한 특권과 위압적인 체계를 흔들어 놓는다.
 
결국, 요약하면 해체론은 의미의 폐쇄와 무언가로부터 흘러나오는 억압된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그 무엇은 민족(혹은 국가)일 수도 있고, 체제일 수도 있고, 이념일 수도 있고, 그리고 당연히 종교도 성서도 그 예외는 아니다.


ⓒ 웹진 <제3시대>


  1. “내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독해하고자 했던 방식은 이러한 유산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반복하고 보존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떻게 그들의 사유가 작동하고 있는지 또는 작동하지 않는지를 발견하고자 하는, 그리고 그들이 남긴 언어 자료 안의 긴장, 모순, 이질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그런 하나의 분석이다”- Jacques Derrida, Deconstruction in a Nutshell. Ed. John D. Caputo,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1997), 9. [본문으로]
  2. ‘형이상학이 무엇인가?’ 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두 가지 답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세계 저편에 완전한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발상이다. 그것은 플라톤의 “이데아론’ 이래로, 칸트에 의하면 ‘물자체’로, 헤겔에 있어서는 ‘절대정신’으로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이 진리(이데아)는 반드시 인간 언어(이성)에 의해 포획될 수 있다는 확신이다. 물론 우리의 공부가 부족해서 지식의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공부가 끝나는 그날 우리는 그 진리들을 몽땅 우리의 언어로 다 말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 그리하여 당당하게 하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이성(언어)에 의해 세계를 모두 이해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음성중심주의’라 부른다. [본문으로]
  3. Jacques Derrida, Deconstruction in a Nutshell. Ed. John D. Caputo,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1997), 9. :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된 서구철학은 “형상과 질료, 주체와 대상, 주관과 객관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들 둘러싼 철인들의 투쟁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플라톤은 우주의 창조를 설명하면서 형상(이데아)이 어떻게 질료위에 구현되어 사물들이 형성되는지에 관심하였고 그 과정에서 조물주(데미우르고스)가 개입한다고 보았다. 물론 플라톤에게 있어 주된 관심사는 이데아(형상)에 있었다. 현실은 이데아의 모방이고, 현실에서 이러한 이데아가 구현되는 질료, 터, 대지를 ‘코라’라 불렀다. 이데아는 질서(Order)이고 코라는 혼돈(Chaos)를 상징한다. 이데아를 코라에 이식함으로 코라는 혼동을 이겨내고 안정과 질서를 찾을 수 있다. 이렇듯, 플라톤의 우주론에 있어 이데아는 주인공, 코라는 이데아를 떠받이는 조연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데리다는 (플라톤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플라톤 텍스트 내에서 코라가 차지하는 비중을 새롭게 발견한다. 즉, 코라가 없이는 이데아가 발현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외부에 있는 다른 문건이나 자료를 통해 찾아낸 것이 아니라, 플라톤의 텍스트내에 이미 그러한 요소가 있더라는 것이다. 코라는 논외의 영역이고, 중요하지 않은 단지 이데아를 빛나게 하는 엑스트라 역할을 하는 것 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꼼꼼히 플라톤을 읽어보니 코라 역시 이데아 못지 않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데리다는 지적해냈던 것이다. [본문으로]
  4. 데리다는 쥴리아 크리스테바와의 대담에서 차이과 텍스트의 관계에 대한 그녀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새로운 글쓰기의 개념을 산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차이(difference)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차이들의 유희는 실제로 어떤 순간에, 어떤 의미에서도 어떤 단일한 요소가 그 자체로 현전하거나, 스스로만을 참조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종합과 참조를 전제로 합니다. 말해진 담론의 영역이건 씌어진 담론의 영역이건간에 어떤 요소도 그 역시 단순히 현전하지 않는 또 다른 요소를 참조하지 않고서는 기호로서 기능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연쇄적 맞물림은 각 ‘요소가’ 그 자신 속에 체계의 다른 요소들의 흔적에 의거해 구성되게 합니다. 이러한 연쇄적 맞물림의 망의 구조가 텍스트이며 한 텍스트는 또 다른 텍스트의 변형 속에서만 산출됩니다 ………..(중략)………. 차이로서 문자는 그러므로 현전/부재의 대립에 의해 더 이상 사유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차이는 요소들이 서로를 참조하는 차이들, 혹은 차이들의 흔적의 그리고 공간화의 체계적 유희입니다.” - 자크 데리다, 『입장들』, 박성찬 편역 (서울: 솔 , 1992), 49-5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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