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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적의 밥’을 먹다 - 신앙의 원리는 신앙을 잠식한다 (김진호)

시평

by 제3시대 2010. 8. 1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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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밥’을 먹다
신앙의 원리는 신앙을 잠식한다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시리아 북단의 대도시 안티오키아에서 베드로는 사람들과 한 상에서 식사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인들’인데, 놀랍게도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귀화한 이방인들이 다수 포함된 공동체였다. 당시 유대교 회당은 물론이고 1세기 말까지의 예수 공동체에서 이런 풍경은 그리 흔치 않은 것이었다. 그때 예루살렘에서 주의 친형제인 야고보 파 사람들이 방문한다.

십여 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이다. 헬라계 회당[각주:1]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유대 중심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급진파 헬라주의자들이 반란 모의죄로 처형된 예수를 들먹이며 성전과 민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회당 군중이 그들을 집단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지도자 스테파누스가 돌팔매로 죽임을 당했고, 나머지는 사방으로 도주함으로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이때 도주한 일부 헬라파 유대인들이 안티오키아로 왔고, 이곳에서 다른 예수 추종자들과 연대하여 예수의 공동체가 탄생하였다. 주민들은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예루살렘에 은거하며 조심스레 모임을 지속해왔던 다른 예수파 집단들은 이 사건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아직 예수의 추종자라는 사실이 정부는 물론이고 적지 않은 시민들에게도 의혹의 대상이던 시절에, 자신의 신앙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 좋을지를 암암리에 모색하던 중에 발생한 일이다. 그러던 차에 헬라계 회당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유대 종족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성전에 대한 비판은 신중한 행보가 아니라는 시그널로 받아들여졌다.

그때는 각각의 소그룹들이 보다 큰 예수공동체로 네트워크되어 가던 중이었다. 다른 집단들과의 연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 모두를 아우르는, 일종의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하는 리더의 형성과정이기도 하다. 이 네트워크 공동체의 중심에는 주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주의 형제인 야고보 등이 있었다. 하지만 점차로 예수의 친형제인 야고보와 그와 예수의 모친인 마리아가 실질적인 지도자로 부상하였고, 베드로 등은 그 위상이 제2격으로 격하되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막달라 마리아로 대표되는 여성 제자그룹과 기층민중그룹인 오클로스 출신 제자들이 이탈하였다. 필경 헬라파 회당에서 발생한 사건도 이러한 지도력 형성 과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더 유대주의적이고 더 성전적 믿음에 충실한 이들이 중심에 서게 되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배제된 집단은 이들로부터 이탈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난 뒤, 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불리는 이들이 생겨났다는 소문이 들린다. 과거 예루살렘에서 도주한 급진 헬라파 인사들이 이 일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전해졌다. 야고보가 이끄는 예루살렘의 예수공동체는 안티오키아의 이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하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헬라주의자들이 이방인을 함부로 공동체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 더욱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예루살렘의 유대주의자들이 볼 때는 반드시 교정되어야 할 잘못된 관행이었다. 베드로가 이 공동체로 파견된 것에는 바로 이러한 사명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방인 귀화자들과 한 상에서 식사를 나누고 있다. 유대인인 그가 생래적으로 체득하고 있는 신앙의 올바름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이방인의 음식을 먹는 것, 심지어는 ‘적의 밥’을 먹는 것에 다름 아니었는데, 그가 마주한 현장에선 함께 식사하는 것이, 먹거리 속에서 마음을 나누고 신앙을 나누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타당한 모습이었다. 몸을 지배하는 관습과 현장의 감각이 모순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그는 그 사이를 매울만한 해석적 자원을 아직 갖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어정쩡하게 비유대인들과 식사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그때 야고보파 인사들이 당도했고, 난처해진 그는 얼른 자리를 피한다. 야고보파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고 싶었고, 예루살렘 공동체의 탄핵이 골치 아팠다. 하지만 이 행동은 이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를 싸늘하게 만들어 버렸다. 한 순간에 베드로와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인들, 아니 예루살렘의 예수 공동체와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 공동체 사이는 좀처럼 매워지지 않는 깊은 골을 드러냈다. 더 나아가 안티오키아 공동체 내부에서도 갈등이 부추겨졌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비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논쟁이 심화된 것이다. 어제까지 형제요 자매요 누이요 오라비였는데, 이젠 그런 관계가 쉽지 않아졌다. 그리고 베드로와 바울은 더 이상 화해할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안티오키아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불거져 나온 식사 금기 문제는 초기 그리스도교 선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그리고 훗날 예수파가 회당에서 축출됨으로써 이 식사 논쟁은 일단락된다. 그리스도교는 유대인들의 전통인 이방인과의 식사 금기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30년대 말 이후 예루살렘의 예수 공동체가 네트워크되어 가고, 50년대 초 안티오키아에서 식사 논쟁이 벌어지고, 그리고 90년대 즈음 회당에서 예수파가 축출되고, ....,., 어림잡아 족히 두 세대는 되는 갈등의 역사는, 무 자르듯 단언할 수 없는 봉합이건만, 아무튼 이렇게 매듭지어졌다. 그런 갈등을 매울만한 해석이 현장의 갈등을 매개하기보다는 상황의 조건이 갈등을 원천무효시킨 셈이다.
 
이렇게 관습화된 요소가 신앙과 결합되면 견고한 신앙 전통으로 재탄생한다. 그것은 나름의 형성 역사를 가진 것이지만, 마치 본래적인 것인양 보편적 진리를 대변하는 것이 된다.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 그것은 적의 밥을 먹는 것이요 적의 요소가 자신의 몸 내면으로 들어오는 것이라는 문제의식이 형성되는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당대, 그리고 그 이후 모든 유대인들의 신앙 공식이었고 자명한 진리였다. 하여 그것은 대개 새로운 상황을 해석하는 능력을 억압하고, 새로운 상황이 해석을 강제할 때에야 어정쩡하게 뒷북치듯 따라간다. 이럴 때 신앙은 진취적이기보다는 퇴행적이며 보수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아마도 우리 사회 그리스도교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비추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다른 성서 텍스트를 살펴보겠다. 그것은 이방인과의 식사 나눔의 거부 전통이 시작하던 바로 그 시대의 문서다.
다니엘은 왕이 내린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고, 환관장에게 자기를 더럽히지 않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다니엘서」 1장 8절

인용된 「다니엘서」 텍스트의 배후에 놓인 시간은 바로 이러한 신앙 전통이 형성되던 때였다. 이 문서의 줄거리를 보면, 유대를 패망시킨 바빌로니아 제국의 황제 느부갓네살의 환관으로 선별된 네 명의 유대인 청년들은 훈련기간에 황제가 하사한 음식을 먹지 않고, 부정 타지 않은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주장들이 「토비트서」, 「유딧서」 「희년서」, 「마카베오서」 등, 「다니엘서」와 비슷한 시기(헬레니즘 시대인 기원전 3~2세기)에 저작된 책들에서 집중적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이 책들이 헬레니즘 시대의 문서들에서 이방인들의 음식과 유대인의 음식을 나누고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대단히 중요한 신앙의 덕목으로 얘기하는 전통이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특성을 이러한 신앙 행위와 연계시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도대체 헬레니즘 시대는 어떤 특징을 갖는 시기일까? 간력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이 시기는 지중해 사회에서 문자 혁명이 일어난 시기다. 알다시피 우리가 알려져 있는 최초의 공공도서관인,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이 수도 알렉산드리아에 건립한 거대한 도서관은 장서가 무려 70만권에 달했다고 한다. 그 이전에 비교적 큰 규모의 개인 도서관들이 세워졌고, 책의 수집에 관한 문화가 활성화되는 과정에서 국가가 건립한 거대한 도서관이 세워진 것이다. 이 사건은 책을 둘러싼 산업의 활성화를 낳았는데, 무엇보다도 책의 번역과 필사를 담당하는 문자집단, 곧 서기관 집단이 광범위하게 등장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은 비단 알렉산드리아만이 아니라 지중해 연안 도시들 전역에서 활발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서기관이라는 직업집단이 광범위하게 대두하였다는 사실 이상을 의미한다. 그들은 하나의 계층적 세력으로 주체화된 것이다. 그들 중 상당수가 귀족도 아니고 양민도 아닌, 새롭게 부상하던 소자산가 계층 출신으로, 그들이 주도한 대중운동이 많은 지역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또 자신들의 세계관, 인간관, 종교관 등이 활발하게 해석된다. 팔레스티나에서도 지혜문학이나 묵시문학은 바로 이런 계층 출신 서기관들의 활약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또 하시딤, 에세네, 바리사이 등의 종파적 사회운동 집단도 이들과 깊이 관련된다.

한편 이 시기는 지중해 사회에 빈부격차가 크게 심화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전제군주국가들이 한층 강력하고 안정된 체제를 구축하였고, 이 국가들 혹은 제국들의 왕족과 귀족들의 권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하여 그들은 국가 곳곳에서 타인의 땅을 병합하여 자신의 사유지를 넓혀갔다. 또한 도시화가 한층 발전하면서 많은 지주들은 속속 자신의 땅이 아니라 도시로 이주하였다. 하여 시골에는 지주가 부재하는 많은 땅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땅들은 대지주가 위임한 관리인(청지기)들이 대리운영하곤 했다. 이것은 소농들의 광범위한 몰락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촌락에는 토호들이 사라졌고, 그들이 차지하던 마을 사람들의 존경의 질서를 공백에 놓이게 된다. 한데 바로 그 자리를 이들 서기관 계층이 대체한다. 바로 이 시기에 말이다. 요컨대 이들 소자산가 계층은 헬레니즘 시대 대중적 사회 통합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통합의 중요한 매체 역할을 한 것이 종교였음을 의심의 여지없다.

바로 이들이 중심이 되는 종교운동을 반영하는 책들이 앞서 언급했던 「다니엘서」, 「토비트서」, 「희년서」. 「유딧서」, 「마카베오서」 등이다. 그리고 그 책들에 등장하는 공통된 요소의 하나가 음식 금기였다. 이방인의 것을 거부하는 전통을 더 급진화하여 먹거리 같이 일상적인 것까지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다.

적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적의 것을 먹지는 않겠다는 비타협적 태도다. 이러한 비타협적 태도를 먹거리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바로 이 시기에 지중해 지역 일대와 유대사회에는 일상과 그 연장선상에 있는 내면의 문제가 집중적으로 주목되기 시작한다. 주로 지혜문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제인식이다. 그것은 악이 내면으로 침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악’은, 마치 적이 우리의 강토 안으로 쳐들어와 지배하듯이, 의인화된 존재로 우리 몸 안으로 쳐들어와 지배한다는 상상이다. 바로 ‘악마’가 등장하는 것이다. 악마가 몸 안으로 들어와 존재의 내면을 지배하는 것과 같은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는 바로 음식이다. 몸 안으로 들어와 몸을 부정타게 하는 것, 바로 악마의 몸으로 변모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음식 금기를 일상화하는 신앙으로 나타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국가/제국의 통치자와 대중 사이의 갈등은 단지 토지만이 아니라 개개인의 몸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몸 자체가 전쟁터가 된 것이다.

이러한 ‘적의 음식’에 대한 금기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적이 준 음식’을 거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적과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이다. 모두 밖에서 들어온 것이 내면을 장악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한다. 문자의 혁명은 문자 계층을 중심으로 하여 이렇게 내면의 문제를 중요한 종교적 요소로 변모시킨다.

이러한 적의 밥에 대한 공포와 저항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신앙의 견고한 틀로 정착하게 된다.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났던 음식 금기 논쟁은 비유대지역에서도 강력한 유대주의적 신앙의 내용으로 여전히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되었던 것을 보여준다. 그 지역의 사정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원리를 지키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되는 셈이다.

한데 원리에 대한 충실함은 종종 현장을 고려하는 눈을 흐리게 한다. 바울이 베드로를 비난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방인들, 곧 유대 전통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그러한 인식의 틀을 마치 법처럼 내면화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현장에서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신격화된 통치자를 기리는 제의 때 배급되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만성화된 영향실조 상황을 조금이라도 면할 수 있다. 실제로 가난한 이들은 많이들 그렇게 했다. 이때 법은 그이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굴레로 작동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음식 금기 신앙은 가난한 이들을 배제하는 신학이기도 했다. 야고보 파가 주도하는 운동에 오클로스 파나 여성 제자들이 이탈한 것은 어쩌면 이러한 탈현장적 원리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를 반영하는지도 모르겠다.

예수는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장의 사정(밖의 것)을 고려하지 않는 신앙, 원리(안의 것)만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신앙은 타인을 옥죄고 괴롭힌다는 점에서 잘못된 아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가 보여준 새로운 문제의식은, 신앙의 원리라는 내면의 주장을 독선적으로 반복하는 것, 그것이 가장 위험하다는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리버디노(새번역) 혹은 ‘자유인의 회당’(공동번역)은 「사도행전」 6장 9절의 리베르티노스(Λιβερτινος)을 번역한 것인데, 이 회당은 예루살렘에서 바울처럼 헬라말을 쓰는 유대인들을 위한 예배와 생활나눔의 장으로 사용된 회당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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