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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갈등축소 기술’로서의 정치를 넘어서- 공정사회 담론에 대한 단상 (유승태)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0. 9. 1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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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축소 기술’로서의 정치를 넘어서
- 공정사회 담론에 대한 단상

 

유승태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공정사회’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인터넷 글들을 검색하다가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한나라당의 현기환 의원이 “이명박 대통령이 ‘공정한 사회’를 화두로 던지는 순간 진보, 좌파세력에게 졌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는 기사가 그것이다.(폴리뉴스 2010.9.9) 이명박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모든 분야에서 기회를 균등하게 주고, 그런 후에 결과에 대해서는 각자가 책임져야 한다’며 ‘공정사회론’을 새 국정지표로 제시했다. 그런데 위 기사에 따르면, 이에 대해 현 의원이 “공정보다는 ‘품격’이라든지,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화두를 던졌어야 했다”며, “품격이라는 것은 혜택을 본 사람이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또 성공한 사람을 인정해주는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는 것이다.

물론 기사를 더 읽어보면,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정의로운 자기희생적인 모습의 공정은 박근혜 전 대표에게서 볼 수 있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 예비한, 지문 닳도록 손바닥 비비는 소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주로 이명박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하거나 ‘공정사회’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갈 것인지를 묻는 상황에서 나온 이러한 주장은 다소 엉뚱한 듯하면서도 어떤 핵심을 사유하게 해준다. ‘공정사회론’을 읽는 그의 독법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공공의 것’을 상상하기 위해 익숙하게 사용하는 독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다른 지점으로 논의를 옮겨가보자. 소위 ‘자유주의적 정의론’을 거칠게 정리하면,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공정하게 할당하는 것을 정의라고 보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주어진 몫’이란 자연적(=우연)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판단과정에 참여하는 주체가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이 판단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정의론은 개인을 ‘몰역사적’인 자리에서 발견하려 하고, 개인이 사회․역사적 맥락에서 주체로 구성된다는 것을 간과한다는 점 때문에 공동체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공동체주의자들은 개인의 정치적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의 ‘덕’을 먼저 구축하고자 하며, 공동체 구성원의 연대와 협력, 상호존중을 통해 정의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서로 상반된 전제를 갖고 있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이론은 한국에서 이를 소비하는 담론 속에서 손쉽게 통합되고 있는 듯하다. 박세일 등의 학자들이 말하는 ‘공동체적 자유주의’라는 용어를 보면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공통분모를 찾아 두 이론의 급진성을 탈각시키고 통치의 논리로 전환하는 동물적 감각이 엿보인다. 물론 이와 같은 이론적 ‘통합’의 가능성은 두 이론을 수용하는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반(反)갈등주의’적 성향 때문에 애초에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이론적 대립이 정치철학적 관심에서 형성돼온 것을 생각할 때, 두 이론의 반갈등주의적 성향은 ‘정치’의 자리를 합의와 타협의 자리에서 발견하려는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정치란 (자유주의자에게든, 공동체주의자에게든) ‘갈등축소의 기술’인 것이다.

그러나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시도는 현실 속에서 많은 경우 갈등을 은폐하는 기술로 손쉽게 전환되고 그래서 그 근본에는 더 큰 갈등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이번 호(제27호) 웹진의 시평 “길들여진 혀 - 공정사회 비판”[각주:1]에서 김진호는 ‘공정사회론’이 목표로 하고 있는 ‘기회의 평등’에 “가난한 이가 ...(중략)... 왜 불결한 사람으로 취급되는지에 대한 검토가 없”음을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가난은 단지 가진 것이 없는 현상만이 아니라 ‘무력함’을 동반하기에 동등한 기회만으로 공정성, 곧 정의는 실현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이 시평은, 정의를 둘러싼 근래의 논의들이 ‘무능력한’ 주체가 재생산되는 문제 그리고 그로 인해 유지되는 불공정한 사회의 문제에 해답을 주기 어려움을 지적하고 있다는 데 그 함의가 있다.

앞서 언급한 한나라당 의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의 공정사회론 독법을 보면 ‘갈등축소 기술’로서의 정치가 한국사회에서 어떤 담론적 양식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공정’을 ‘평등담론’과 등치시키고 그것을 좌파의 몫으로 분배했다. 그리고 ‘품위’는 ‘혜택을 본 사람’과 ‘성공한 사람’의 몫으로 할당하고 있는데, 명시적으로 말하진 않았으나 그가 대비시키고 있는 구도 상에서 이들은 성공한 우파를 지칭한다. 그는 ‘좌파’와 ‘성공한 사람’ 등의 동일성 혹은 정체성을 가정하고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행위하게 됨을 전제하고 있다. 즉, 주체의 정치적 행위는 그의 정체성이나 속성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갈등을 축소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속성을 변경해야 하는데, 이러한 담론 양식에서 이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주체를 정의하는 방식 자체가 그의 고유한 속성을 주체에 할당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의 속성을 변경한다는 것은 주체의 경계를 해체하거나 속성이 변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방법밖에 없다. 따라서 이때 갈등축소 기술로서의 정치는 강자가 약자의 불만이 폭발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기술 또는 주체 간의 차이를 은폐하고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하는 기술과 동의어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 속에서는 갈등의 요인이 될 수 있는 이들이 자신의 무력함을 스스로 인정할 때에만 공동체의 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사회에서 ‘갈등축소 기술’로서의 정치는 무력한 이들의 고통을 은폐함으로써 ‘불공정한 사회’를 정당화하는 기능만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제공되는 ‘공정한 기회’는 정작 그 기회를 누려야 할 주체가 침묵할 때에만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공정사회에 대한 논의는, 무능력한 이들을 재생산하는 '갈등축소 기술'을 넘어, 상대와의 근본적 적대를 은폐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와 공존 혹은 연대할 수 있을 것인지를 묻는 방식으로 제기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22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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