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국신학 체류기
프롤로그
필자는 작년(2009년) 6월부터 한 달에 한번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웹진 <제3시대>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 하고 있다. 연구소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며 삐대고 있던 나를 연구소로 끌어들인 김진호 목사의 제안이 결정적이긴 했지만, 그보다 내게 이제 글을 써야겠다는 동력을 제공했던 사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었다. 나는 비록 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는 아니었지만, 고인의 장례식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 이곳 시카고에서 신학공부하는 유학생들과 함께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다. 추모예배를 준비하면서,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예배에 참석하면서 몸과 마음이 화석화되고 박제화되어 버린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렇다면 지금 단계에서 내가 현실세계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던 가운데 연구소에 글을 쓰겠노라고 덜컥 말해버렸다. 그것은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가 걸어왔던 지난 시간과 공간에 대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감사에 대한 내 나름의 뒤늦은 표현이기도 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매월 글을 기고하는 가운데 몇 편의 글을 통해 이루어졌던 독자와의 대화는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 내지 공공성 같은 것들을 느끼게 해주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이메일을 보내어 글에 대한 평을 해주었던 분들도 있었는데 그 분들께는 이 자리를 빌어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글이 어느 정도 모아진 지금, 그동안 웹진에 게재되었던 졸고들을 하나씩 읽어보던 중 (물론, 언제나 자기가 쓴 글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마치 전날 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쓴 연애편지를 다음 날 아침 명료한 정신으로 읽는 기분이랄까) 문득 지금까지 매월 단편적으로 올렸던 글들을 하나로 엮을 수 있는 Key-word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 생겼다. 비록 내용상으로는 일관되게 흐르는 맥락이 없다손 치더라도 글쓴이로서 의당 지니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심리적 상태 내지, 글에 임하는 심기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아 한동안 곰곰이 생각하던 중에 ‘탈경계’라는 말이 떠올랐다. 요즘 많이 쓰이는 용어이다. 탈경계의 문화, 탈경계의 사회학, 탈경계의 인문학 등등…. 그렇다면, ‘탈경계의 신학’도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호기심에서 이 글은 시작되었다. 본격적으로 ‘탈경계의 신학’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에 앞서 21세기 초 미국 신학계의 동향과 필자가 유학하고 있는 시카고의 신학적 분위기를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왜냐하면, ‘탈경계 신학’이라는 말이 현재 미국 신학계의 전반적 흐름과 고투를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용어일 수 있기에 그렇고, 그 체험이 내 글에 녹아있으리라는 예감에서이다.
작금의 미국 신학계 흐름을 간략히(거칠게) 정리하자면, 전시대의 보혁구도에서 탈피하여 Mainline진영과 Evangelical 진영으로 재편된 채, 전 시대보다는 양자의 신학적 입장이 서로에 대해 좀 더 개방적이고, 호환 가능한 구도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근본주의(Fundamental) 진영도 존재하는데 그 부분은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미국 내 학문적 영역의 장에서 논의의 주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이할 만한 사실은 복음주의 진영의 놀라운 진화라 할 수 있다. 즉 전시대 보수주의 진영이 지녔던 경직되고 편파적인 대상에 대한 인식의 틀이 많이 무너지고 유연해 졌다는 말이다. 단적인 예로 보수와 진보의 경계를 가늠했던 과학과 종교의 문제, 타종교와의 대화문제, 인종과 문화에 대한 개방도 등에 있어 복음주의 진영은 Mainline 진영 못지않은 열린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경계의 허물어짐의 결과인지는 몰라도 Mainline 진영 신학교에서 Ph.D 과정을 밟고 있는 상당수의 학생들이 석사 과정 때 복음주의 진영에서 신학수업을 받은 학생들이라는 사실은 미국 신학계의 섞임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현상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렇듯 경계가 허물어진 것처럼 보이는 양 진영 사이에도 2%의 차이는 상존한다. 그 차이란 누가 얼마만큼 더 미시적인가? 하는 문제이다. 달리 표현하면 누가 더 소수자에 대한 구분을 조밀하고 치열하게 해내고 그에 반응하는가? 예를 들어, 성과 인종, 계급의 문제, 문화와 종교의 문제, 요 근래 예민하게 논의 되는 동성애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동안 주류담론에 소외되고 외면당했던 약자들의 아픔을 날카롭게 분석해 내고 신학적 진단과 예단을 해낼 수 있는 기민함의 차이가 여전히 남아 있는 그 2%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Mainline 진영에 속한 신학교들은 여전히 복음주의 진영의 학교들에 비하면 이러한 이슈들에 더 적극적이고 도전적이라 하겠다. 2
<시카고 남부 Hyde-Park에 위치한 시카고 대학과 시카고 신학교 전경 4>
시카고는 미국에서도 대표적인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사회이다. 시카고 경제의 3D 업종은 (불법) 멕시코 이주노동자들과 흑인들에 의해 굴러가고 있고, 한국인을 비롯한 수많은 아시안 이민자들은 택시운전, 세탁소, 음식점, 슈퍼마켓, 주유소 등지에서 고된 일상을 책임진다. 그 밖의 세계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저마다의 영역에서 자리를 잡고 각자의 특성을 발휘하며 협력과 경쟁을 통해 시카고는 지금껏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이런 이유로 당연히 각 인종별, 국가별 문화적 특색이 형형색색으로 분포된다. 뿐만 아니라, 시카고는 종교적인 분포도 다양하여, 그리스도교는 말할 것도 없고, 운전을 하다 보면 이슬람 사원(모스크)을 보는 것도 다반사이다. 또한 백인들 중에는 적지 않은 수가 유대교를 신봉하여 금요일 오후에 가족들끼리 유대교 회당으로 걸어가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아울러, 시카고는 미국에서도 대표적인 흑인인권 운동의 도시이자, 동성애 옹호의 목소리가 강한 도시 중 하나이다. 마틴루터 킹 – 제시 잭슨 목사로 이어지는 흑인인권 운동의 계보가 시카고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각종 게이, 레지비언 단체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면서 레인보우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 또한 시카고이다.
시카고의 신학은 이러한 사회적 풍토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시카고에 있는 신학교들은 저마다 실천신학 분야에서 Urban Ministry를 모토로 다원화되고 세계화된 도시 시카고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이민신학, 세계화 시대의 도시 빈민을 위한 복지신학, 다원화된 시대에 걸맞는 예배 예전 발굴과 회중의 효율적 조직화를 위한 여러 실험들에서 그와 같은 성과들을 목도할 수 있다. 5
특별히 이웃종교에 대한 이해와 대화를 위한 노력은 아주 구체적이다. 이슬람권 학생들을 신학교에서 장학금을 주어 유치하여, 코란과 성경, 예수와 마호메트 등의 과목을 개설하기도 하고, 유대교 랍비를 신학교 교수로 임용하여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하는 3대 종교간 (이슬람, 유대교, 그리스도교) 분쟁에 대한 연구와 대화모색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시카고 신학교내의 LGBTQ 센터는 Queer theology 담론 생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시카고 루터란 신학교 내에는 미국에서도 과학과 종교간 대화에 있어 그 권위를 인정받는 Zygon Center가 있다. 이 밖에도 신학과 인접학문, 신학과 사회적 이슈들을 연결하는 다양한 센터들이 시카고에는 산재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시카고 신학계는 쟝르와 경계를 넘나드는 대화와 공방으로 일년 내내 떠들썩 하다.
종합하면, 시카고의 신학은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y Studies)로 요약될 수 있다. 시카고가 지닌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의 상황속에서 시카고 신학은 이러한 시대적 질문에 대해 철저한 제 학문간 연대와 제휴를 통해 신학적으로 다양한 빛깔과 무닉를 연출하고 있다는 말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탈경계의 신학’을 위한 단초는 위에서 언급한 시카고의 신학적 토양과 깊은 연관이 있다. ‘왜, 탈경계의 신학인가?’에 대한 물음, 이를 위한 방법론에 대한 논의는 다음 번 숙제로 미룬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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