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를 끔찍이 좋아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강아지는 더 이상 애완용이 아니다.
‘애완견’이란 말은 어느덧 폭력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가 되어 버렸고
공식적으로는 ‘반려견’, 사적으로는 ‘우리 애기’ ‘우리 막내’로 부르고 있는게 보통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도 ‘개 주인’이란 당최 그 못생긴 명칭 대신
‘엄마, 아빠’라는 가족애 넘치는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나와 우리 딸아이가 ‘동동이’의 엄마, 누나가 된지 벌써 2년째다.
(남편은 아직 동동이 아빠가 되기를 완강히 거부한 채 방황하는 중...)
세상 다른 경우도 그렇지만 개를 키우는 이들에게도 그들끼리의
무언의 소통함이 있는 법이다.
특히나 녀석들을 끌고 산책을 하다 만나는 경우, 마치 남들 아직 이불 속에서 게으름 피우는 일요일 오전, 성경책 한 손에 들고 종종거리며 길을 가다가 저 만치
각진 정장입고 지나쳐가는 어떤 이의 손에도 두꺼운 검정 책이 들려져 있을 때
그럴 때 느끼는 ‘천국 동창 의식’ 뭐 그런 비슷한 걸 강아지 산책 도상에서
서로에게 느끼는 거다.
얼마 전 동동이를 안고 집 앞 슈퍼에 갔을 때의 일이다.
평범하게 생긴 어떤 아주머니가 ‘아기 몇 살이냐고, 착하게 생겼다고 ’ 말하며 다가와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의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 아주머니 말인즉슨, 작년에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단다. 너무 착하고 예쁜 마르티즈였고
한 식구로 살던 개가 죽는 걸 지켜보는 건 정말 가슴 아픈 일이라 했다.
사실 나도 동동이 전에 키우던 푸들을 하늘로 보낸 적이 있는지라 말하는 우리 둘 다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소통과 고통을 오가고 있었는데
그런데 특이 사항이 그 이 후부터 나타났다.
그 아주머니 왈, 강아지가 죽는 순간 그 강아지가 아주머니에게 하는 말을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단다. 그 강아지가 말하기를
“나는 이제 멀리 가요. 나는 요정이었어요. 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과 사랑을 전해 주기 위해 이 땅에 온 요정이고 천사였어요~
그 순간 나는 ‘아~ 예~’하고 말을 흐리며 재빨리 생각하기 시작했다.
‘혹시 이 분이 살짝~?’ ‘아님, 이 분이 외계인과 소통한다는 그 유명한 빵상 아줌마?’
의심이 거기까지 이르자 갑자기 눈가에 눈물이 마르고 다음에 또 뵙겠다고 건조한 인사를 건넨 뒤 잰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딸아이에게 이상한 아줌마 다 봤다고 한참을 웃고 떠들었는데... 그러나 비웃는 것도 잠깐
아, 이게 무슨 ‘빵상 바이러스’인지 우리 동동이를 볼 때마다 그 아줌마 말이 생각나면서
‘그래 맞아 저렇게 순진한 모습으로 사람의 맘을 맑게 해주는 저 녀석이 천사가 아니면
도대체 뭐가 천사지?’ 하는 감염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였다.
그리고 이제 나는 당근 빵상 아줌마가 되었다.
내 귀에도 ‘나는 천사예요’라 말하는 동동이 말이 확실히 들리니까!
희고 평온하고 빅 사이즈 귀여움이라는 언발란스한 쾌감을 주는 저 <아오모리의 개>는
유치한 것을 내놓고 좋아해도 된다고,
역사적 기념비만이 거대 공간의 주인이 아니라고,
장난스런 강아지 모습도 단단한 소재로 거대하게 표현 할 수 있다고,
그 것이 서브 컬쳐건 뭐건 메인 스트림 눈치를 보며
네 취향을 감추지 않아도 된다고 당당하게 외계 언어로 말 하고 있다.
“빵상~!”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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