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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마당] 꽃피는 말 (손성호)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1. 1. 17.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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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말



손성호
(밀알교회 목사)


주일예배 후 교우들과 함께 자리한 식탁의 대화가 그날따라 유난히 불편했습니다. 큰 길 하나를 두고, 우리 교회는 ‘소망교회’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물론 골목 안쪽에 자리한지라, 찾기가 쉽지는 않습니다만, 우리는 이웃이며, 함께 지역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교회입니다. 매 주일 아침마다 성수대교 남단에서부터 도산공원 사거리까지 양 쪽 끝 차선에 주차된 고급승용차들과 외제차들을 봅니다. 건널목을 가득 채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성경책을 들고 소망교회로 향하는 것을 또한 봅니다. 한편 부럽기도 합니다. 저 사람들 중 몇 명이라도 우리 교회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선다면, 교우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상상해본적도 있습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린 일도 있습니다. 주일아침, 교회로 향하는 발걸음들을 보는 일만큼 목사에게 좋은 광경이 또 있겠습니까. 이름이 다르고, 교파가 다를지라도, 우리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라는 고백은 50명이 5백명, 5천명, 5만명이 부르는 찬송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교회에도 소망교회로 교적을 옮긴 교우들이 여럿 있는 터, 올 초 제직임명을 앞두고, 그분들의 이름을 교인명부에서 지웠습니다. 아팠습니다. 이런 제가, 그리고 교우들이 ‘소망교회가 아니라 실망교회’라는 세간의 비난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요. 저마다 일성을 토해냅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교회가 윤리의 마지노선이어야 할 텐데, 오히려 상식을 파괴해버렸습니다’

어느 시사주간지가 뽑아놓은 기재의 제목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주먹이라’(시사in 174호) 정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썩고 또 썩고 또 썩어버린 겁니다. 한국교회가 어떻고, 작금의 교인들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도 이제 신물이 납니다. 교회가 피로감을 더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걸으시다가, 시장하시어 바라본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 나무는 부패하고 타락한 유대교의 상징만은 아닐 것입니다.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그 나무를 보시고, 그분은 얼마나 분개하셨던지요. 이튿날 뿌리째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를 보고서, 베드로가 말합니다. “선생님 보세요.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 “하나님을 믿어라”(마가복음 11:20-21) 소망교회 사건을 두고, 저마다 하실 말씀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통탄의 소리, 자조의 소리, 분노의 소리, 빈정거림도 있을 것입니다. 제 글이 만약 여기까지 읽혀졌다면, 저도 여기에 한 소리 보태고자 합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형제교회가 그 모양인데, 그 교회를 두고 기도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소망교회로 가겠다는 교우에게 왜 그 교회로 가려 하시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크고, 사람 많고, 프로그램도 다양한 교회에서 부담 없는 신앙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그분에게 ‘그런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라고 말한 목사입니다. 소망교회뿐입니까. 최근 몇 개월 사이, 우리는 이른바 한국교회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몇몇 교회의 이름이 신문지면과 인터넷상에서 몰매를 얻어맞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섣부른 영적 우월감이 빛은 타종교에 대한 무례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장면들을 무심코 보아 넘기며, ‘나는 아닌데......’라고 혼잣말을 되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국교회를 두고 한마디 하는 자리에 있을 때마다, ‘제2의 종교개혁’ 운운하며 예리한척(?) 정직한척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지금 ‘제2의 종교개혁’이 아니라 ‘제2의 계몽주의’를 목전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바벨탑처럼 쌓아놓은 교회의 권위, 성서와 하나님의 이름을 검과 방패삼아 구축해 놓은 요새가 완전히 포위당해 버린 것 같단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 무너뜨린 하나님의 이름과 우리 스스로 불신해버린 믿음의 자리에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메시지가 더 이상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지 않는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온갖 허식과 탁상공론, 신학적 언어들의 유희가 퍽퍽한 목회현장을 더 힘겹고 씁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교회 담장안의 언어와 행위들로 축소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어느 교파 때문이라고, 어떤 신학 때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이에, ‘만민’이 우리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입니다. 사실이지 이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읽고, 체계적으로 분석할 여유가 제게는 없습니다. 당장, ‘그 몇몇 교회가 바로 한국교회가 아니냐’며, ‘기운 빠진다’고 한숨을 내쉬는 교우들을 마주해야 하는 저입니다. 우리입니다.

굶주린 노동자들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음식섭취를 거절하다가 아사해 버린 ‘시몬느 드 베이유’를 존경합니다. 그이처럼 순결하고 진실한 행동의 정점까진 못가더라도, 더 이상 한국교회를 저기에 두고, 나와 우리 교회를 여기에 둔 채 말하고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한국교회가 바로 나이고, 소망교회가 바로 우리 교회여야 할 때인 것입니다. 일부교회가 한국 개신교회를 부패와 타락의 온상으로 만들어버렸다는 판단보다는, 나의 ‘믿음없음’과 ‘영적미성숙’을 돌아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는 진보이고, 그들은 보수라 말하지 말고, 나는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고, 그들은 기도만하는 그리스도인이라 단정하지도 말고,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고, 인정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호세아처럼 말입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 호세아는 개인의 삶으로 놓고 본다면, 참으로 괴로운 사람이었을 것 같습니다. 호세아가 살던 시절, 이스라엘의 사회, 정치, 그리고 종교는 완전히 타락해 있었습니다. 모두 영적인 병자들이 되어 있었고, 기복신앙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부귀영화와 무병장수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 한마디면 족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알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하나님을 바알처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호세아라는 사람을 찾아내십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순종한다는 결의로 가득한 순박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호세아에게 바알신전의 창녀 고멜과 결혼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신전의 창녀는, 왕으로부터 백성들까지 모든 사람이 성적관계를 맺음으로써 바알이 주는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바알신앙의 매개체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호세아는 고멜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세 아들을 낳습니다. 첫째아들 이름은 ‘이스르엘’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망하게 하신다’입니다. 둘째아들은 ‘로루하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라는 뜻입니다. 셋째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입니다. 아들의 이름에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저주해야 하는 운명, 그 삶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런데 이 괴로운 사람을 두고, 고멜이 도망쳐버립니다. 신전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고멜은 신전이 아닌 어느 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호세아는 가까스로 은 열다섯과 보리 한 호멜 반을 구해 그 집 주인에게 지불한 뒤, 자신과 자식들을 버린 아내를 데리고 나옵니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호세아가 보입니다. 조금 뒤쳐져 호세아의 뒷모습을 따라 걸어가는 고멜도 보입니다. 그때 호세아가 불쑥 고개를 돌려 말합니다. “당신은 앞으로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마시오. 나도 당신에게 그리하리다”(호세아 3:3)
호세아가 무얼 했습니까? 고멜처럼 방탕했습니까? 아내와 자식들을 두고 도망친 적이 있습니까? 그런 호세아가 고멜에게 약속합니다. “나도 당신에게 그리하리다”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 뜻 안에서, 호세아는 자기 자신을 본 것입니다. 고멜이 호세아에게 방탕한 여인이었다면, 호세아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그러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저 같은 작은 교회 목사 하나가, 아파하고 회개하는 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이 거대한 몸집의 괴물들을 어떻게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냐? 돈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교회’라는 괴물과 ‘스스로 더 높아져버린 돈이라는 괴물’과 싸워야합니다. 그러하기엔, 저도 우리도 참 작습니다. 하지만, 저는 시인 박노해가 전해준 ‘희망의 말’하나를 간직합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암울한 말이 있다면
“남 하는 대로”
“나 하나쯤이야”
“세상이 그런데”
우리 시대에
남은 희망이 말이 있다면
“나 하나 만이라도”
“내가 있음으로”
“내가 먼저” 

- 박노해, ‘꽃피는 말’

저부터 고치겠습니다. 똑바로 하겠습니다. 정직하게 말하고, 삶이 메시지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살겠습니다. 사도바울의 이 말을 새기고 또 새기며 걸어가겠습니다.
‘그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가장 선한 일을 분간할 줄 알며, 눈먼 사람의 길잡이요, 어둠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라고 생각하면서, 지식과 진리가 율법에 구체화된 모습으로 들어있다고 하면서,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의 스승이요, 어린아이의 교사로 확신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남은 가르치면서도 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도, 왜 도둑질을 합니까? 간음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왜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미워하면서도, 왜 신전의 물건을 훔칩니까?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왜 율법을 어겨서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한 것과 같습니다(로마서 2:17-24).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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