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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최선과 최악 사이 (김창락)

시평

by 제3시대 2011. 2. 23.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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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과 최악 사이
- 인간중심적인, 너무나 인간중심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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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락
(본 연구소 소장)


인간없는 세상_임옥상

“사람이 산다는 것이 벌인가?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악인가?
아니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죄인가?
인간도 축생에 다름 아니어늘....
미안하다 용서라 잘 가라


 

1. 헤겔은 인간의 역사 발전 과정을 인간 자유의 신장(伸張)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즉 오직 한 사람만이 자유를 누리던 군주독재 체제가 소수의 사람이 자유를 누리는 귀족정치체제로 바뀌고 귀족정치체제가 많은 사람이 자유를 누리는 민주정치체제로 바뀌었다고 보았습니다. 1789년의 불란서 혁명은 왕과 귀족계급이 독점한 권력을 일반시민도 정치적 권리에 참여할 자유를 안겨주었습니다. 불란서혁명은 시민들이 자기네의 권리를 쟁취하는 이른바 시민혁명이었습니다. 자유가 한 사람만의 전유물에서 소수 사람의 소유물로, 소수 사람의 소유물에서 모든 시민의 소유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볼 때에 불란서 혁명은 인간 자유의 신장 과정에 획기적인 찬란한 이정표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 ‘시민’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명칭이 아니고 도시에서 상공업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이른바 제3계급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귀족과 성직자 계급인 제1계급과 사회의 밑마닥에 속하는 인민들 사이에 위치하는 중간계급으로서의 제3계급이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자본주의 혁명과 더불어 사회의 주도권을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불란서혁명을 통해서, 그리고 잇따른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서 명목상으로 모든 사람에게 자유가 보장되었다 하더라도 인종적인 차별, 성적인 차별, 빈부상의 차별, 등등 갖가지 차별이 잔존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흑인민권운동, 여성해방운동, 가난한 사람의 해방을 외치는 해방신학, 억압받고 차별받는 소외된 민중의 해방을 부르짖는 민중신학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역사’라는 용어 자체가 완전히 인간중심적인 사고의 산물입니다. ‘역사’라는 것은 인간이 이룩한 일, 인간 사회의 변천을 문제삽습니다. ‘역사’에 대립되는 용어로서 ‘자연사’(自然史, natural history)란 것이 있습니다. 자연사는 자연의 변천사. 즉 하천의 생성과 변화, 화산과 지진의 발생, 지질의 생성, 기후의 변화 등을 추적하는 것입니다. 역사가는 자연사는 역사에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자연적 사건, 예를 들어 큰 지진이나 홍수, 화산폭발 등이 인간의 역사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한에서 역사학의 대상으로 편입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신구약성서에 기록된 역사를 특히 ‘구원사’(救援史, salvation history, redemptive history)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역사를 뜻합니다. 인간이 구원을 문제삼는다고 하면서도 유대교에서는 유대민족의 구원을 중심문제로 다루었으며 그리스도교는 만민족의 구원을 주장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에 국한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대체적인 사조였습니다. 여기에서 남미 해방신학, 흑인해방신학, 여성해방신학, 한국의 민중신학은 각각 가난한 사람, 흑인, 여성, 민중을 구원의 중심 주체로 삼고 있습니다.

구원사의 중심 대상은 오로지 인간입니다. 자연계의 구원은 거의 관심 밖이거나 있다하더라도 겨우 끝자락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인간 구원이 너무나 중요하고 급선무라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변명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2. 독일에서 겪은 이야기입니다. ‘고려영행사’라고 하는 한국여행사가 개설되어 지사장이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이사왔습니다. 한국에서 가정부 아가씨도 대려왔습니다. 집에서 애완견을 키웠는데 병이 들어 설사를 하는 바람에 마루 바닥은 물론이요 애써 빨아놓은 침대 시트나 소파를 가리지 않고 똥을 마구 싸기 때문에 가정부가 화가 나서 막대기로 개를 때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가 “깽깽” 하고 울어댔습니다. 얼마 후에 경찰 들이닥쳤습니다. 그 아가씨는 동물학대죄로 경찰에 끌려 갔습니다. “깽깽”하는 개 울음 소리를 듣고 이웃집에서 경찰에 동물학대행위로 신고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만 하더라도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에 “참 한가한 나라로구나!”하고 속으로 빈정그러렸습니다. 제3세계에는 인권문제로 치열한 투쟁을 벌이는데 너희들은 ‘견권’(犬權)을 가지고 아단법석이니 가소롭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일 학생들 중에서도 제3세계의 인권문제, 반독대 민주화 투쟁등에 연대해서 데모도 하고 운동을 하는 학생들도 있는 반면에 ‘동물학대 방지 운동’을 벌이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닭들이 빽빽한 닭장에 갇혀서 추럭에 실려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확대해서 걸어놓고 닭들이 누려야 권리를 외첬습니다. 그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게도, 그 때에는 나는 이들의 주장에 별다른 감명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모피옷 반대 캠패인도 벌였습니다. 나는 “그러면 너희들은 구두와 허릿띠는 가죽 대신에 헝겁으로 만들어 쓰느냐?” 하고 속으로 빈정그렸습니다.

 

3. 지난 해 11월 23일에 경북 안동에서 구제역이 발생한 이래 2011년 1월 28일 현재까지 돼지와 소가 287만 여 마리가 매몰 처리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지난 18일에 200만 마리 였던 것이 10일 사이에 근 100만 마리가 늘어난 셈입니다.

[*구제역(口蹄疫 foot-and-mouth disease; 소, 돼지, 양, 염소, 사슴 등 발굽이 둘로 갈라진 동물(우제류)에 감염되는 질병으로 전염성이 매우 강하며 입술, 혀, 잇몸, 코, 발굽 사이등에 물집이 생기며 체온이 급격히 상승되고 식욕이 저하되어 심하게 앓거나 죽게 되는 질병으로 국제수역사무국(OIE)에서 A급질병(전파력이 빠르고 국제교역상 경제피해가 매우 큰 질병)으로 분류하며 우리나라 제1종 가축전염병으로 지정되어 있음. 입 구(口), (발)굽 제(蹄), 전염병 역(疫)]

1월 28일 현재 구제역에 걸린 돼지 272만 8천 328 마리 중에서
                                             
263만 1천 240 마리 (96.4%) 살처분 매몰
                         
"        "     소  14만 5천 823 마리 중에서
                                             
14만 4천 589 마리 (99.2%) 살처분 매몰
여기에는 조류 인풀루앤자 살처분된 닭과 오리 약 350만 마리는 계산되지 않았습니다.

히틀러 정권하에서 유대인 600만명을 살해한 사건을 역사가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수치(羞恥)라고 일컫습니다. 그것을 흔히 ‘유대인 학살 사건’이라 합니다. ‘학살’은 ‘참혹하게 마구 무찔러 죽임’을 뜻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300만 마리에 가까운 돼지와 소 (닭과 오리를 합치면 600만 마리가 훨씬 넘을)를 맹매장 하다 싶이 해서 죽이는 것을 일컬어 ‘학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살처분’(殺處分)했다고 합니다. ‘처분’이라는 말은 ① 처리하여 다룸 ② 행정, 사법 관청이 법규를 적용하는 행위 ③ 권리를 행사하는 일을 뜻한다. 살처분이라는 것은 죽여서 처분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살처분이라는 말 속에는 법규의 집행이요 권리의 행사이기 때문에 그 말 자체 속에는 하등의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셈입니다. 인간은 가축에 대해서 무슨 일이든지 행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살처분에 대한 비판이 있다면 살처분 자체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축을 안락사 시키지 않고 어미 돼지와 새끼 돼지를 산 채로 한 꺼번에 포크래인으로 짂어서 구덩이에 내던져 생매장하는 비인도적 잔인성에 대한 규탄 정도입니다.

 

4. 인간에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마 16:26) 그래서 십계명 중에도 “살인하지 말라”는 조항이 인간 관계에서 행하지 말아야 행위 중에서 제일 첫째 조항으로 등장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선포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는 전혀 사용하지 아니고 그대신에 ‘생명’ 또는 ‘영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라는 중요한 내용을 ‘생명’ 또는 ‘영생’이라는 개념과 바꾸어서 이해해도 될만큼 ‘생명’ / ‘영생’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은 인간에게 가장 귀중한 가치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여기에서 중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생명이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무슨 대가를 치러더라도/ 어떠한 희생을 치러더라도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때에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절대로 최선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마 10:39) 이것은 올바르게 사는 것이 참으로 사는 방법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5.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하여 던지신 물음은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에 아무리 바보이고 아무리 욕심에 눈이 먼 사람이라 하더라도 정답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물음 1: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물음 2: “ 목숨을 건지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는 것이 옳으냐?”

선한 일과 악한 일 중에서 선한 일을 택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며 A라는 친밀한 한 사람의 목숨/생명을 두고 그것을 살릴 것이냐 죽일 것이냐 중에서 살리는 것을 택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좋으냐? 나쁘냐?”는 물음에는 간단히 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선 무슨 일이냐가 문제되고 또 그 일이 안식일에도 불구하고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시급하고 중대하냐를 따져야 할 것입니다. 또 단순히 A라는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릴 것이냐, 죽일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A라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B라는 사람 또는 그 외의 C, D라는 다른 사람의 희생이 요구되는 경우에는 그 답변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인간의 윤리사상은 어떤 사람의 목적에 어떤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악으로 규정했습니다마는 인간 이외의 어떠한 자연물 -무생물이나 생물을 막론하고 - 도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 어떻게 사용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인간에게 무한대의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인간의 생명 유지를 위해서 언제부터인가 인간에게 육식할 권리가 허용되었다 하더라도 현재 인간들은 식도락적 향략을 위해서 고기를 과소비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축산업자들은 자본논리로 공장식 사육을 함으로써 가축을 학대하고 가축의 면역성을 저하시켰습니다. 현재로 기아에 허덕이는 인구가 수억인데 그 기아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을 분량의 곡물을 사료로 사용하여 생산한 육류로 가진 자들의 입의 향락을 도와주며 그것으로 돈을 버는 것은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초지를 만들기 위해서 삼림을 무제한적으로 베어냄으로써 기후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석유자원의 무제한적 사용의 부작용으로 환경오염의 정도를 넘어 이제는 기후붕괴의 원년으로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6. 1897년에 영국의 작가 B. Skoker가 “드라큘라” (Dracula)라는 소설을 써냈습니다. ‘드라큘라’는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성주였는데 이 사람은 죽었으나 밤마다 관속에서 깨어나와서 산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수 많은 흡혈귀 영화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재작년에 박찬욱 감독이 제작한 “박쥐”라는 영화도 장르상으로는 ‘흡혈귀’ 영화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흡혈귀가 된 어떤 특종의 인간이 벌이는 괴이한 행동을 서술한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고발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에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인 신부 현상현 (송강호)이 병원에서 이상한 병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을 바라보면서 무력감에 빠집니다. .ㄱ 때에 세계 모처에서 이 병에 대한 백식 개발을 위해서 비밀리에 생체실험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실험대상이 되겠다고 자원해서 찾아갑니다. 실험 대상이 된 사람으로서 살아나온 사람이 없습니다. 실험대상으로서 현상현도 거의 죽게 되었다가 이상한 피를 수혈받고 살아나서 돌아오게 됩니다. 본국에서는 기적을 일으킨 성자로 그를 추앙하며 그에게 안수 받으러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 때에 그가 옛날 고아원 시절에 알고 지내던 친구의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이야가는 본 궤도로 접어듭니다. 상현의 친구 강우는 정신박약 장애인입니다. 그에게는 태주 (김옥빈)라는 예쁜 아내가 있었습니다.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생체실험소에서 현상현에게 주입된 이상한 혈액은 상현의 목숨을 구해주었지만 그 대신 그를 흡혈귀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피를 먹지 않으면 얼굴에 흉칙한 물집이 생깁니다. 상현이 견지지 못하는 수혈하는 환자의 피를 한 모금 빨아먹는 순간 흉칙한 물집은 순간적으로 깜쪽같이 사라집니다. 그뿐만 아니라 피를 먹고 나면 그는 초인적인 괴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친구 강우는 어머니가 포목상을 하면서 유족하게 살아가는 가정. 강우는 정신박약 장애인. 태주(김옥빈)라는 예쁜 아내가 있음. 태주는 아마 의리 때문에 결혼했겠지마는 그녀의 결혼 생활은 생지옥과 같았습니다.

강우의 집을 방문했을 때에 상현은 강위 아내 태주와 눈길이 마주칩니다. 태주의 애처로운 눈길에 사로잡힙니다. 병원으로 돌아온 상현은 신앙과 애욕 사이의 갈등에 빠집니다. 그는 육체적 욕망의 유혹을 물리치려고 자기 몸에 물리적 고통을 가하면서 발버둥칩니다.

한편 태주는 생지옥과 같은 숨막히는 가정에서 한 순간이라도 도피하기 위하여 상현이 근무하는 병원에 밤에 자원봉사원으로 오게 됩니다. 이라햐여 두 사람은 사랑의 불꽃 속으로 몸울 내던지게 됩니다.

상현, 강우, 태주 세 사람은 물놀이를 갔습니다. 태주는 남편을 물에 빠뜨려 익사십니다. 상현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강우의 시신을 수몰된 가옥의 장농 속에 숨겨놓음으로써 살인사건이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합니다.

그 사이 태주도 자원해서 흡혈귀가 됩니다. 그녀는 더 대담해져서 수혈용 죽은 피를 더 이상 먹으려 하지 않고 산 사람의 신선한 피를 먹으려고 살인을 서스럼없이 행합니다. 어느날 밥입니다. 태주의 집 (사실은 시어머니의 집)에 늘상 와서 마작놀이를 하는 손님들이 모였습니다. 상현과 태주는 그 손님들을 모조리 죽여 피를 빨아먹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승용차로 밤길을 달립니다. 흡혈귀는 아침 햇살을 보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동해의 아침 햇살을 맞으며 죽기 위하여 달리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면서 눈을 감습니다.

상현과 태주는 사람의 피가 필요합니다. 자살한다는 것은 자기의 생명이라 하더라도 생명을 죽이는 것이니까 죄악입니다. 자살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생명의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사는 것도 죄요 죽는 것도 죄라는 모순 속에서 수행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 하겠습니다.

 

7.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생명은 반드시 다른 생명을 요구합니다. 생명이 유지되려는 다른 생명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다만 식물의 생명만은 무기물을 가지고 광합성 작용을 하여 생명을 현상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곤충, 물고기, 짐승, 사람 등의 동물은 반드시 다른 생명체를 먹이로 하여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맹수는 배가 고플 때에만 먹이를 사냥합니다. 일정하게 배가 차면 더 이상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먹이사슬의 최고봉에 있는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향락하기 위하여 먹으며 축재하기 위하여 먹이를 무한대로 생산합니다. 다른 생명을 많이 희생시키고 많이 소유할 수록 성공지수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영화 “박쥐”에서 보듯이 인간의 살아 있는 피를 먹을 때에, 즉 인간을 희생 제물로 삼는 인간일 수록 더욱 더 위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Vampire가 된 상현과 태주가 오래 생명을 유지하면 할 수록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야 하고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에 비로소 다른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악행은 끝나는 것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죄악입니다.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다른 생명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선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최선도 아니고 최악도 아닌 그 양자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동물의 생명 뿐만 아니라 식물의 생명까지도, 심지어는 무기물까지라도 인간이 무한대로 남용할 권리가 있다고 주제넘게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오늘 이 시점에서 인간이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가장 큰 죄악의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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