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신학 정보] 타자론 III: 욕망 혹은 그것의 좌절과 얽힌 (욕구)불만에 관한 에세이 (이상철)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1. 3. 23. 21:16

본문

타자 III : 욕망 혹은 그것의 좌절과 얽힌 (욕구)불만에 관한 에세이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90년대 초반에 필자는 군생활을 했다. 당시 대한민국 곳곳에 분포되어 있었던 군부대의 역주변, 터미널주변에는 어김없이 유흥가, 윤락가, 도박판이 점점이 분포했다. 내가 군 복무를 했던 지방 소도시 역시 그랬다. 휴가 때 상경을 하려고 역주변을 서성이다 보면 골목마다 짙은 화장의 여인네들이 손짓을 한다. 불법과 음모의 은밀한 냄새가 어디선가 풍겨나고 잠시 길을 잘못 들거나 발을 헛디디면 금방이라도 이상한 나라로 빠져들 것 같은 위태로움, 아니 쾌감을 느끼며 난 그 골목을 걷는다. 그 미로를 걷다 보면 어디선가 옷깃을 잡아당기는 손길이 있다. 그리고 속삭인다. 재미있는 세계가 있다고… 그 유혹을 뿌리치고 역(驛)을 향해, 나는 순전히 서울 가는 기차를 타려고 저 역을 향해 가노라고, 그것만이 나의 진실이라고, 날 의심하지 말라며,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절대 그럴 마음이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매번 그 긴 터널을 아무일 없이 빠져 나온 후에는 뭔가 아쉬웠다. 왜 나는 그 손길들을 거부했던 걸까? 그러면서도 나는 왜 그 골목을 다시 욕망하는 걸까? 내 안에 도사린 이 묘한 충동과 그것에 대한 억제는 무엇으로 설명가능한가? 그리고, 남아 있는, 못내 아쉬워하는 내 감정의 저 찌꺼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런 나의 감정의 굴곡은 현재 논의되는 타자론과는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이런 물음들을 갖고 프로이트를, 그리고 라깡을 지금 만나러 간다. 

 


프로이트 길라잡이

 

흔히 19세기가 낳은 3대 천재로 우리는 맑스와 니체와 프로이트를 거론한다.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서구 정신사를 장악했던 지배적인 담론들에 균열을 내어 이후 전개되는 현대 사상계의 지적(知的)지형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앞서 언급했던 니체가 이성중심의 사유체계에 대한 반동을 시도했다면, 맑스는 경제적 하부구조, 즉 노동의 중요성을 이끌어냈다. 프로이트 역시 이전까지 등한시 되어왔던 의식에 반하는 무의식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력을 설득력있게 해명해면서 정신분석학이라는 새로운 장을 마련하였다.

프로이트 학설은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는 『꿈의 해석』(1899)을 중심으로 꿈, 증상, 실수 등 정상인들의 일상적 삶 속에서 드러나는 무의식의 존재와 그것의 의미에 대한 탐구를 전개하던 시기이다. 무의식 개념은 근대적 사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이성적 합리적 의식적 주체에 대한 정의를 전복시켰으며, 프로이트를 통해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발화와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의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갖고 있는 자기에 대한 의식의 정체성은 이미 주어진 자명하고 단일한 통일체가 아니라, 기나긴 정신적 발달의 산물이며, 동시에 무의식의 갑작스런 돌출과 분열의 결과물이다. 이를 통해 프로이트는 인간이 가지는 사유의 한계점을 포착하고자 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근대적 사유가 지닌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믿음과 원리에 대한 폐기 선언으로 이어졌다. 

프로이트 (Sigmund Freud, 1856-1939)


의식과 무의식의 구조화된 체계의 발견이 프로이트의 전기 작업이었다면,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1920)와 『자아와 이드』 (1923) 발표[각주:1] 후 프로이트는 인성을 욕망의 차원인 이드(Id)와 현실적 차원(ego), 그리고 도덕적 차원인 초자아(superego) 사이의 역학관계로 바라본다. 이드는 인성(Personality)의 가장 원초적이고 일차적인 원리인 ‘쾌락원리(pleasure principle)’를 충족시키는 기능을 한다. 초자아는 이드의 충동을 제압하는 도덕적 양심이다. 에고는 초자아와 이드간 발생하는 극단적인 투쟁사이에서 갈등하고 조정하는 자아, 즉 ‘현실원리(reality principle)’ 의 지배를 받는 자아이다.[각주:2]

그렇다면 필자가 군생활 하던 시기 휴가나 외박 때 역주변을 서성이며 꿈꿨던 나의 욕망과 그 욕망의 좌초는 프로이트식으로 어떻게 설명가능한 것인가? 분명 나의 의식 너머에는 부대 밖에만 나가면 그 환락의 거리가 제공하는 쾌락을 향유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시기의 나는 오직 이드(Id)에 의한 쾌락원칙만을 추구하는 기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또 다른 힘인 슈퍼에고(초자아)에 의해 진압당하고 만다. 매번 아슬아슬하게 나의 이드는 초자아의 벽을 넘지 못했다. 간발의 차이였다. 욱일승천하던 이드의 기운이 한 풀 꺾이고 뒤돌아 나오면서 다음 번에는 ‘기필코!’를 외쳐보지만 그 다음에도 어김없이 결과는 같았다. 오직 쾌락원칙만을 쫓아 질주하던 나의 이드는 왜 그 꿈을 펼치지 못하고 좌초하고 마는 걸까? 이에 대한 해명으로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Oedipus complex)를 이야기한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Oedipus complexs), 그리고 라깡을 향하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테베왕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아버지를 타도하고 어머니와 함께 하려는 무의식적 욕망을 뜻하며, 약 4세가 되면 어린아이의 쾌락원칙이 남근부위로 옮겨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각주:3] 구순기-항문기-남근기(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이어지는 어린아이의 발달단계 중 남근기 전 단계까지 아이와 엄마 사이는 완벽하게 일체한다. 아이는 자신과 엄마에 대한 구분도 뚜렷하지 않다. 이처럼 자기와 타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는 다른 아이를 때리고도 자기가 맞은 것으로 오인하고 다른 아이가 울면 따라서 울기까지 한다. 라깡은 이 시기를 아기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영상을 발견하는 시기라 하여 ‘거울 단계'[각주:4] 라 부른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거치면서, 라깡식으로 말하면 거울단계를 지나면서 아이와 엄마 사이에 가졌던 완강했던2항 관계는 아버지의 개입으로 3각 관계로 변모한다. 이후 아이는 엄마와 자기 사이에 있었던 은밀했던 근친상간적 욕망이 거대한 타자의 등장으로 폭로되고 위축되는 것을 느끼며 불안해한다. 이때 아이는 자기의 성기가 색정의 원인이므로 아버지가 자신의 남근을 제거할 것이라는 ‘거세위협(castration complex)’을 느끼게 된다. 그 결과 아이는 체념속에서 근친상간적 욕구를 억누르고 자신을 현실원리에 적용시키고 아버지에 복종하면서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간다.[각주:5] 

결국,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쾌락원리’에서 ‘현실원리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사회전반으로, 자연에서 문화로의 이행을 뜻한다.[각주:6]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아이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사회문화적 규범과 가치를 내면화한 초자아를 지니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초자아는 쾌락지향적인 이드를 억압하는 한편, 현실 지향적인 에고를 도덕적으로 규제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위와 같은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면, 군생활 시절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나의 이드, 즉, 역(驛) 주변의 쾌락을 쫓는 본능은 내 욕망의 물결을 타고 거칠고 급하게 내려오다가 오이디푸스 단계를 거치며 형성된 초자아의 벽에 가로막혀 정상적인(?) 에고의 형태로 수정된 채 그 여인들의 손길을 뿌리치는 금욕적인 성자로 나를 변모시켰다는 말인데…

나의 질문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간다. 잠시 제압당했던 그 놈이 일정 기간이 흐르고 난 뒤 다시 꿈틀거리며 어김없이 되살아 난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예감한다. 그 충동이 또다시 진압되리란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왜 나는 실패를 예상하면서 이러한 행위를 반복하는가? 이런 나의 욕동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 지점에서부터 라깡의 ‘타자론’이 펼쳐진다.  <다음 호 계속> 

 

 ⓒ 웹진 <제3시대>


  1. 1997년 간행된 프로이트 전집(총 20권) 제14권의 타이틀이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 (박찬부 역, 서울: 열린책들, 1997) 이고, 그 안에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와 ‘자아와 이드’가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2. 프로이트 사상의 구조를 좀 더 명확히 살펴보고자 한다면 C.Hall, A Primer of Freudian Psychology, 백상창 역, 『프로이트 심리학 』 (서울: 문예출판사, 2000) 중 2장 “퍼스낼리티의 구성”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3. 페미니즘 계열이나 사회과학에서 프로이트를 비판할 때 왕왕 지적하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 즉 남근중심의 ‘생물학 주의’와 ‘기원주의’이다. 변혁을 위해 역사성을 강조하며 초역사성을 무시했던 맑스의 작업과 반대로, 프로이트는 역사성을 간과하고 남근중심의 초역사성을 전제로 그의 이론을 전개하였다는 것이다. 라깡은 프로이트에 대한 이같은 비판을 극복하기 위해 페니스가 아닌 팔루스를 말하고 부친살해 사건을 역사적 사건이 아닌 구조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본문으로]
  4. 1936년 발표된 라깡의 논문제목이다. 이 논문에서 라깡은 처음으로 ‘상상계(the imaginary)’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거울상태’의 아이는 타인이 보기에는 양육을 위한 의존상태에, 그리고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불안한 상태에 있지만, ‘거울상태’의 아이가 스스로를 느끼는 이미지는 고정되고 안정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라깡은 이를 1914년 발표된 프로이트 『나르시즘에 대해-입문』과 관련시켜 이야기하고 있다 –Mardan Sarup, Jaques Lacan, (Toronto and Buffal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92), 101-103 [본문으로]
  5. 프로이트,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 박찬부 역 (서울:열린책들, 1997), 114-130. [본문으로]
  6. 프로이트는 문명발생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연관된 ‘토템향연’에 초점을 맞춰 설명한다. 원시사회에서 토템동물은 신성시되고 타부시되며 아버지로 상징된다. 최초의 아버지가 있고 모든 여인들은 원부의 차지다. 자신의 독점적 지위에 위협을 느낀 원부는 아들들을 모두 쫓아낸다. 쫓겨난 아들들은 원부의 여인들을 차지하고자 아버지를 힘을 합쳐 죽인다. 그런 다음 아버지의 살을 함께 나누어 먹는다. 원부살해에 대한 죄의식을 느낀 아들들은 1년에 한 번 짐승을 죽이고 그날을 기억하며 축제를 벌인다. 이것의 문명발생의 기원을 설명하는 ‘토템향연’이다- 프로이트,『종교의 기원』,이윤기 역 (서울: 열린책들, 1997) 中 ‘토템과 타부’ 참조 [본문으로]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