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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정보] 타자론 IV: 라깡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이상철)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1. 4. 28.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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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論 IV: 라깡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과정)



For Lacan: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류시화의 詩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푸른숲, 2002) 를 소개하며 라깡의 ‘타자’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연애할 때 한번쯤 류시화의 시를 인용하며 나의 요동치는 속내를, 그 알 수 없는 마음을 전하려 했던 기억이 독자들에게 있을지 모르겠다. 이 시는 우리들의 연애시절 또 다른 작업용 멘트였던 김춘수의 詩 ‘꽃’에서 언급하는 사랑론, 즉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고백을 비웃으며, 그런 ‘네가 곁에 있어도 나는 여전히 그대가 그립다’라는 위험한 발언으로 끝을 맺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표현이 암시하는 나와 그 사이의 채워지지 않는 간극은 오히려 나와 그 사이의 그리움 혹은 사랑을 완료태가 아닌 현재진행의 사건으로 계속 남겨둔 채 우리 사랑의 형태를 굳지 않게, 우리 사랑의 열정을 녹지 않게 만든다.

위에서 소개한 류시화의 시와 김춘수의 시는 헤겔의 ‘타자론’과 라깡의 ‘타자론’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기에 좋은 예이다. 헤겔에게 있어 자기의식은 타자를 전유함으로 획득되는, 주인과 노예의 처절한 권력투쟁 후에 획득되는 노획물이다. 그러므로 철저한 자기의식이란 대상을 향한 영토화의 농도가 짙을수록 확실하고 뚜렷해진다. 김춘수는 그의 시에서 주체에 의해 명명되기 이전 존재, 즉 타자를 몸짓이라 표현하였다. 또한 나의 선포를 수용한 타자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선언한다. 다분히 헤겔적이다. 헤겔에 있어 타자는 나의 의식의 망에 의해 걸러진 존재이고, 내 의식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이 헤겔의 타자론이 최종적으로 다다른 지점이다. 하지만, 라깡의 타자론은 헤겔이 멈춰선 그 지점에서부터 출발한다.

라깡(Jacques Lacan, 1901-1981)




라깡이 어쨌다구?

프로이트에게 오이디푸스 단계의 아버지가 현실적 아버지였다면, 라깡의 경우에 있어서 아버지는 아버지의 이름이 상징하는 사회문화적 규범이나 법을 의미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프로이트는 남근의 유무에 따르는 생물학적 성차별로 환원하나, 라깡은 상징적 의미를 강조한다. 이때 남근(phallus)은 남자의 성기(pennies)가 아니라 사회질서를 구축하는 법과 규범을 의미하는 일종의 기표(significant)이며, ‘거세공포(castration complex)’ 또한 남근 제거의 공포라기보다 사회적 인정의 박탈을 뜻하는 상징적 기표로 파악된다. 이렇듯, 라깡에게 있어 상징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어떤 시스템 속에 편입되는 것이다. 상상계 속에서 엄마와의 2항 관계만을 경험했던 아이로서는 거대한 상징 시스템은 아주 큰 타자, 대타자(the Other)다. 쉽게 말해, 사회(화), 문명(화), 도덕, 윤리 같은 거다. 이렇게 라깡이 프로이트 이론의 지경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구조주의 언어학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각주:1]

라깡의 실험은 프로이트를 다시 태어나게 했을 뿐 아니라, 현재 지젝으로 상징되는 슬로베니아학파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정신분석학과 맑시즘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지적 장르 형성에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부터 살펴볼 내용은 프로이트에게는 없지만 라깡에는 있는 특별한 그것, 즉 라깡의 언어관에 대한 부분이다. 라깡에게 있어 타자의 문제는 인간이 언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 등장한다. 인간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알파벳을 알고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시스템속, 즉 기호(상징)들의 체계와 질서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각주:2] 그리고, 그 언어의 작용방식 내지 기능을 일컫는 말이 ‘기표들의 차이(difference)’, ‘기표들의 놀이(play)’라는 용어이다.


play of difference 차이들의 놀이

우리가 (후기)구조주의 책들을 읽다 보면 play of difference(차이들의 놀이)라는 용어를 종종 접한다. 이는 라깡에게 있어서는 상징계속 욕망이 기표들의 차이를 따라 계속 미끄러져 나가는 것을, 데리다에게 있어서는 텍스트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설명하는 특수 용어다. 차이와 놀이는 기본적으로 ‘변화(베르그송)’, ‘과정(화이트헤드)’, ‘되기(들뢰즈)’등 현대철학에서 등장하는 생성존재론의 새로운 함의들에 영향을 받은 바 크다.[각주:3] 존재란 고정되어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차이가 있고 운동이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가 창궐하여 돌아다니는 장이다.

작년 남아공에서 열렸던 2010년 월드컵 우승팀 스페인 축구의 특색이 정확하고 빠른 패스였다. 선 굵은 스타일을 구사하는 힘의 유럽축구와 현란한 개인기에 의존하는 남미의 축구 스타일 사이에서 스페인은 나름의 독창적인 자기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는데 3-4m 안에서 정교한 패스를 구사하며 상대를 압박하는 것이다. 보통 한 골이 들어가려면 15-18회 패스를 거친다고 하는데, 스페인은 30회가 넘는 패스를 거쳤다고 한다.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지만, 30회가 넘는 패스를 하면서도 상대방에게 볼을 빼앗기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스페인 축구의 정교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상징계를 커다란 축구장, 기표들을 축구 선수들의 패스에 의해 옮겨 다니는 공이라고 가정할 때, 축구경기에서 골을 넣기 위해 수많은 패스가 필요했던 것처럼 상징계 안에서 기표에 의미가 부여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상징계속 기표는 축구장에서 공이 패스에 의해 옮겨다니는 것처럼 돌아다녀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의미가 생성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play of difference(차이의 놀이) 이다.

예를 들어, 나는 수 많은 성씨 중에서 이氏이고, 이씨 중에서도 전주 이씨이며, 전주 이씨 중에서도 양녕 대군의 후손이다(그 족보에 별로 신빙성이 가지는 않지만). 필자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은 미국, 미국 중에서도 동부도 아니고 서부도 아닌 중부, 중부에 있는 도시 중 위스콘신이나 인디애나가 아닌 시카고에 살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신학교와 진보적인 교단 출신이고, 미국에서 유학하는 현재도 가장 진보적인 신학교라 평가받는 시카고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나는 순복음 출신이나 총신출신이 아니고, 사우스웨스턴이나 플러 같은 보수적인 신학교에서 유학하고 있지 않다. 대충 필자의 모습이 그려지는가? 필자 이상철이 지닌 오리지널한 무엇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수많은 차이들 한신, 총신, 감신, 장신, 연신 중 한신/ 기장, 예장, 감리, 성결, 순복음 목사중 기장목사/ 그 밖의 수많은 차이들 중 무엇, 그 무엇 무엇을 모으고 조합하는 과정이 라깡이 말하는 play of difference(차이의 놀이)이다.[각주:4]


욕망(desire) in 상징계

어떤 아이가 태어난다 함은 그 순간 이미 이런 언어시스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비록 상상계에서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아이는 이런 기표들의 놀이와 차이속으로 빠져든다. 아이 자체는 사라지고 한국, 미국, 일본, 중국…중에서 한국/ 김씨, 이씨, 박씨…중에서 이씨/ 빈곤층, 중산층, 부유층…중 무엇이라는 기표만 남는다. 이런 이유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넘어온 아이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상징과 무의식적 욕망에 예속된 소외된 존재를 뜻한다고 라깡은 지적한다.[각주:5]

인간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어떤 기표를 부여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일등 신랑감이 되려면 명문대 출신에, 연봉은 1억은 되어야 되고, 최소한 40평정도 되는 아파트와 고급 외제 승용차를 몰아야 한다. 이런 기표가 나를 표상하는 선에서 나는 일등 신랑감이 된다. 교육열이 넘치는 한국에서 좋은 자식이란 부모의 기표를 잘 수행하는 아들과 딸들이다. 영어유치원-특목고-과학고-외고-명문대-해외유학-판검사-의사-교수 등등으로 미끄러지면서 부모는 자식에게 심벌릭한 세계를 투영하고 아이는 부모(사회)가 제시한 기표들을 따라 다닌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나의 의지와 노력이 일부 개입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100% 나의 자발적인 선택과 고민의 과정이었는지 묻는다면 어딘가 꺼림칙하다. 누군가가 쳐놓은 망 안에서 뺑뺑이 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 지점에서 라깡은 욕망(desire)과 향유(jouissance)를 구분한다. 욕망은 상징계 안에서의 욕망, 즉 기표들을 따르는 것이다. 그 기표들의 놀이는 연봉 5천에서 1억으로, 30평 아파트에서 40평 아파트로, 소나타에서 그렌저로 이어지며 멈출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만들고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기표들은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하니까 남들이 원하니까 그래야 내가 인정받으니까 그것을 욕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라깡이 말하는 상징계 속의 욕망이다. 그 욕망은 새로운 기표를 찾아 상징계(the symbolic) 속을 계속 미끌어져 나간다. 그렇다면 주체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에서 주체란 말인가? 라깡의 다음 질문은 이 지점에서 다시 시작된다.


향유(jouissance) in 실재(계)

우리는 지금 상상계(the imaginary)와 상징계(the symbolic)를 지나 실재(계)(the real)에 이르렀다. 앞서 필자는 상상계속의 아이가 언어를 습득함으로 상징계속 질서로 편입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사회와 규범에 동화되어가는 과정이라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상상계속에 있었던 모든것이 상징계안으로 완전히 녹아들어가지는 않는다.

다시 서두에서 언급했던 류시화의 시로 돌아가 보자. 시인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말한다. 라깡에 따르면 앞에 나와있는 ‘그대’는 상징계의 기표이고, 상징계속 욕망의 대상이다. 뒤에 나오는 실재계속 ‘그대’를 찾기 위해 상징계의 기표 ‘그대’를 끊임없이 갈아치우며 play(놀이)를 하지만, 주체는 여전히 실재계속 그대와는 불통한다. 상상계속에 있었으나 상징계속에 편입되지 않고 여전히 저 아래에 남아있는 부유물을 향한 욕망을 라깡은 향유(jousissance, 쥬이상스)라 부르고, 상징계속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욕망(desire)과 분리시킨다.[각주:6]

즉,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들어설 때 제외되는 부분, 엄마와의 2항 관계에서 아버지의 질서로 들어설 때 억압되는 부분, 휴가를 나가기전 역 주변의 쾌락에 대해 동경하나 막상 아무일 없이 서울행 기차를 타고 올라올 때 느끼는 내 마음 깊숙한 곳의 아쉬움, 그대가 곁에 있는데도 여전히 그리운 그대! 이 모두가 향유를 설명할 수 있는 예라 할 수 있겠는데 영 마땅치가 않다. 왜 깔끔하게 설명을 해내지 못하는 걸까? 복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상상계속에 있었던 그 이미지는 다시 복제가 안된다. 다시 복제가 안되고 복원이 불가능한 것을 욕망하는 것이 향유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가 곁에 있어도 여전히 나는 그대가 그리운 것이다. 얼마나 슬프고 비극적인가!

라깡은 복구가 안되는 그것을 대상 소타자 혹은 대상 a(objet a 오브제 아)라 부른다. 그것은 실재계에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 상징계를 찢고 뚫고 나오는 어떤 것이다. 라깡은 그것의 예로 항문, 페니스, 질, 젖가슴, 목소리(조용하고 엄숙한 연주회장에서의 괴성,비명 같은), 오물, 구멍 같은 것을 든다.[각주:7] 그것은 상징계의 작동을 잠시 멈추게 하는, 그래서 상징계를 지배하는 현실적 원리들에 타격을 가하는 게릴라같은, 혹은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유령’같은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는 실재를 모른다. 복구가 안되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나 이상철을 모른다. 나 역시 궁금한 나를 그대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정치적으로는 민노당을 지지하나 막상 대선에서는 노무현을 찍는 나, 문화적으로는 거대자본의 논리로 운영되는 주류 대중문화를 비판하고 이에 반하는 B급 문화를 선호한다고는 하지만 소녀시대나 카라같은 걸그룹의 뮤직비디오도 간간히 침을 흘리며 훔쳐보는 나, 경동교회에서 자라 한신에서 신학수업을 받고 한국에서 가장 개혁적인 교단인 기독교장로회 소속 목사인 나, 미국내에서도 신자유주의 문제, 동성애 문제, 낙태문제, 이민정책, 흑백문제, 미국의 패권적 태도 등에 대해 가장 진보적 신학담론을 생산하는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나, 하지만 현재 본토보다도 더 강한 레드 콤플렉스와 좌파히스테리에 빠져있는 이민교회에서 적절히 이곳의 보수적 교민들의 상식에 크게 반하지 않는 설교를 하고 있는 나! 돌이켜보니 나 역시 온통 상징계의 기표들속에서 놀고(play)있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그 이상철이다. 그렇다면 상징계속 질서에서 허우적 거리는 나는 언제 나의 실재와 대면하는가? 라깡에 의하면, 실재계에 존재하고 있었던 '대상 소타자(대상 a)'가 현실세계인 상징계에 구멍을 낼 때다. 오물, 쓰레기, 성기, 괴성, 뾰족한 무엇으로 질서정연한 상징계에 흠집을 내는 순간 실재가 우리에게 잠시 열린다. 이 순간이 바로 라깡이 주목하는 윤리의 새로운 영역이다.[각주:8] <다음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1. 구조주의 언어관: 우리(주체)가 무엇인가(대상)를 보고, 듣고, 만져서 지각(perception)한 후 우리의 이성은 그 모든 정보들을 종합하여 그 사물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 관념(Idea)을 만들어낸다. 내게 관념이 생겼다고 함은 내가 지각했던 그 무엇이 비록 이 순간 내 앞에 없다손 치더라도 내가 다시 그것을 표상(representation)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현대철학 전까지 언어란 우리 마음에 있는 관념을 외화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구조주의 출현 이후 이러한 전통적 인식론에 대한 반론이 생겨났다. 확고 부동할 것이라고 믿었던 관념이 장(場)의 논리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드는 예로, 의자와 책상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을 의자로, 저것을 책상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의자를 가방이라 부르든, 책상을 나무라 부르든 중요한 것은 둘 간의 차이만 확보되면 된다. 언어의 본질은 그 언어가 가리키는 대상의 관념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호들의 체계가 중요한 것이다. 책상을 의자로, 의자를 꽃병으로, 나무를 바위로 부르면 어떤가? 그것이 어떤 공동체 속에서 통한다면 그 시스템이 의미를 발생시켰다 함이 옳다. 결론적으로 구조주의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한다 함은 기호들, 기호의 시스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그렇게 확고한 것이 아니다. 단지, 기호(기표)들의 차이와 놀이를 매개로 만나는 것이다. [본문으로]
  2. “상상계(the imaginary)와 상징계(the symbolic)는 연속적인 단계가 아니라 얽혀 있는 것이다…. 상징계는 상상계를 잠식해 들어가고, 조직하며 방향을 제공한다. …라깡은 말을 습득한 인간 주체는 그(녀)를 기존의 상징계에 편입시키고, 그리하여 자기의 욕망을 이 계의 체계적 압력들에 복종시킨다고 지적한다: 언어를 받아들임으로써 주체는 자기의 ‘자유로운’ 본능 에너지가 작용되고 조직되도록 허용한다는 것이다”- Mardan Sarup, Jaques Lacan, (Toronto and Buffal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92), 105-106 [본문으로]
  3. 시카고 신학교의 창의적인 여성신학자 슈나이더(Laurel Schneider) 교수가 2008년에 출간한 Beyond Monotheism: A theology of Multiplicity. (New York: Routeldge, 2008)과 Drew에 있는 설명이 필요없는 신학자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가 쓴 Face of the Deep: A Theology of Becoming. (New York: Routeldge, 2003)은 생성존재론에 입각한 신 개념을 제안하는 도발적인 책으로 주목받고 있다. [본문으로]
  4. “라깡에게 있어 의미는 객관화될 수 없다. 오히려 의미는 근본적으로 그 유연함과 예상불가능에 의해 특징지워 진다. 어떤 기표도 자동적으로 그것에 앞선 기표를 따라가지 않기 때문에, 주체의 어떤 부분이 기표들 사이의 틈새(차이)에서 드러나게 된다.” – Ibid., 49. [본문으로]
  5. 자끄 라깡, 『욕망이론』, 권택영 외 역 (서울: 문예출판사, 1994), 265-267. [본문으로]
  6. 칸트윤리학에 대한 라깡적 비판을 하고 있는 슬로베니아 학파의 차세대 주자 쥬판치치는 그의 대표작 Ethics of the Real: Kant, Lacan 에서 상징계속으로 용해되지 않는 실재를 ‘자기를 알지 못하는’(this knowledge that does not know itself)/’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것’ (this knowledge that remains unknown) 으로 적고있다- ,Alenka Zupancic, Ethics of the Real: Kant, Lacan (New Yourk: Verso, 2000), 201 [본문으로]
  7. “대상 소타자(=대상 a)는 (동굴, 管 따위의)구멍 일수도 있고 젖가슴일 수도 있다. 이것은 (날카로운) 끄트머리나 절단과 관계가 있다: 입술, 이빨을 형성하는 울타리, 항문 테두리, 페니스의 끝, 질, 눈까풀에 의해 형성된 가늘고 길게 째진 곳…이 같은 목록에 라깡은 음소(音素), 응시, 목소리를 첨가한다” - Mardan Sarup, Jaques Lacan,, 98. [본문으로]
  8. “the question of ethics is to be articulated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location of man in relation to the real”-Jacques Lacan, Seminar VII: The Ethics of Psychoanalysis, trans. Dennis Porter, (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92), 1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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