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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원자력과 건전한 상식 (송진순)

시평

by 제3시대 2011. 10. 24.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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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과 건전한 상식

송진순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박사과정)

지난 3월 일본 동북부를 덮친 지진과 쓰나미는 대규모 인명피해와 함께 후쿠시마의 원자력 발전소 폭발이라는 대참사로 이어졌다. 10월 13일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대지진의 피해 복구비용이 향후 10년간 30조엔(약 450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원전 사고의 피해 복구에 드는 시간과 비용은 그 누구도 구체적으로 전망하기 어렵다. 30년이 걸릴 원전 폐쇄와 12만 톤의 방사능 오염수 같은 일차적인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10만 명의 피난민과 일본 전역과 바다에 확산되는 방사능에 대해 안정적인 복구를 전망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후쿠시마의 원전 폭발이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13배, 그곳에서 방출된 방사성 물질의 양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의 168배의 위용을 자랑한다면 그 참사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후쿠시마의 재앙은 우리 일상에서 빠르게 잊혀져갔다. 심심치 않게 들리는 일본의 세슘과 스트론튬 검출 보도조차 우리에게는 신문 한 구석의 국제 기사 중 하나일 뿐이다. 그보다는 9월의 정전사태를 극복하고 경제성장을 위해 원전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정부와 원전 산업계에 막연한 기대와 수긍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원전의 안전 신화가 후쿠시마 사고로 처참하게 무너졌음에도 우리가 핵에 대해 느끼는 위험은 여전히 제자리다. 이 불감증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가난도 전쟁도 겪어보지 못한 세대가 상상하는 방사능의 공포가 우리에게 얼마나 유효할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원자력에 대한 우리의 무지만큼이나 원전의 정당성을 심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부와 언론의 대응방식일 것이다: “청정한, 녹색 성장의, 연료비가 저렴한, 인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기준치에는 못 미치는...”

그러나 눈 가리고 아웅한다해도 원자력 발전의 분명한 함의에 대해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애당초 원자력을 안전하고 평화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낙관적 기대는 태생적으로 원자력의 탄생과는 모순된 것이었다. 원자핵을 인위적으로 분열시켜 발생하는 에너지인 원자력은 근본적으로 존재의 안정성을 파괴한데서 발생한다. 인간이 원하는 에너지를 얻기 위해 안정성을 희생시킨 대가로 치명적인 방사능, 영원히 끌 수 없는 재를 남겨 놓은 것이다. 불안정을 인간의 기술로 안전하게 방호한다 해도 그것은 실험실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시간을 뛰어넘는 물질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은 또 다른 은폐와 왜곡된 현실을 낳는다. 불안과 파괴라는 샴쌍둥이는 평화적으로 보일 수는 있어도 본능은 숨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자력이 핵의 다른 이름인 것처럼.

어찌 보면 자본주의의 수혜를 입은 모두가 원전 시스템의 공범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팡팡 트는 에어컨, 철철이 바뀌는 핸드폰, 가가호호 뉴모델 대형양문냉장고, 불야성의 금융시장.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성장위주의 소비 자본주의만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스러지는 경제신화 속에서도 밝히 빛나고 있다. 이에 경제성장과 에너지의 불가분의 관계는 원자력 발전이 뒷받침하리라는 논리가 버티고 있다. 따라서 자의든 타의든 모두의 합의 속에 추진되는 원자력 산업은 학문과 정재계의 권력과 맞물려 돌아간다. 맞물리는 거대한 힘은 그 어떤 목소리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말 그대로 중앙집권적이 된다. 원자력 문제의 바탕에는 거대 과학기술과 산업이 권력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비민주적인 체제가 깔려있는 것이다. 원전이 유치된 지역, 에너지의 주 소비지역, 원전 내 노동자, 방사성 물질의 피해, 원전 사고의 은폐, 원자력 정보의 편중. 어느 것 하나 민주주의와 원자력이 양립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후쿠시마 사태이후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의 유럽 국가들은 탈원전을 선언했다. 그들의 선언이 더 의미가 있는 것은 현재 인류와 미래 세대에 대해 준비된 정부와 깨어있는 시민의 힘이 공동으로 발휘된 데 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건전한 상식이 통하는 사회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건전한 상식은 무엇이 중요하고 먼저 되어야 하는지 아는 힘이다. 우리의 건전한 바람은 내 가족과 이웃이 안전한 땅에서 인간적이고 소박하게 사는 것이다. 나아가 다양한 많은 사람들과 미래에 공동의 안전을 기반으로 인간과 자연의 이야기가 어우러질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이상을 갖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삶을 꿈꿔야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에너지 집약적이고 대량폐기물로 넘치는 파괴적인 산업문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시대의 동력이 되어 온 원자력 발전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진행 중인 재앙을 멈출 수는 없어도 또 다른 재앙을 막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상의 안정과 신뢰를 회복하고 소외된 인간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 사회의 역량을 키우는 일이 급선무가 될 것이다. 책임있는 미래는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불편을 감수하는 소박한 삶이더라도 함께 즐겁고 안전한 삶을 꿈꿀 수 있다면 우리는 말해야 할 것이다. 문규현 신부님의 말처럼 “사랑한다면 원전은 아닙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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