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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단번에 완성된 제물 (김경호)

시평

by 제3시대 2009. 3. 24.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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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완성된 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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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들꽃향린교회 담임목사)

한사람의 죽음을 놓고 여러 가지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놓고도 정부는 “테러리스트다, 떼쓰는 폭도들이다.”고 한다. 그러나 그 가족들은 말도 안되는 모함이라는 것을 너무 잘안다. 고 이상림 씨는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계속 성경 필사를 하던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가족 모두가 그렇다. 다른 희생자들도 장사를 하거나 평범한 생활을 하던 시민들이었다. 벌써 두 달 넘게 가족들이 빈소를 지키면서 버티고 있다. 얼마나 힘이든가? 그런데도 가족들은 이대로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며 누구보다도 강경하다. 그들은 분명 죽음의 거룩한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무너질 수가 없다. 자기 부모들의 참 죽음의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가족들이 장례를 미루며 투쟁하는 것은 고인들의 명예회복이기도 하지만 고인들의  죽음이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이번 희생으로 나머지 재개발지구 세입자들이 다시는 이러한 억울함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 고인들의 희생을 모든 세입자들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위한 죽음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죽음의 거룩한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지금의 지리한 싸움은 그 분들의 죽음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재개발이 진행되면 땅이나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세입자들이다. 그 지역은 상가라 대개 권리금이 따라 붙는다. 그리고 인테리어에도 적잖게 든 비용은 모두 무시된다. 단지 2천만원 정도의 이사비용만 지급된다. 그리고 가해지는 용역들의 무차별한 인간 모독과 폭력, 이런 것들이 세입자들이 처하게 되는 상황이다. 가족들은 정부가 발표하는 터무니없는 모함을 딛고 자신들의 부모와 남편의 죽음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투쟁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예수가 단 한 번에 결정적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제거하신 제물이요 동시에 스스로의 몸을 제물로 드리신 대제사장이라고 한다.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의 죽음의 거룩한 의미를 찾았듯이 예수의 제자들, 가까이서 따르던 갈릴리 민중, 여인들은 예수에 대해서 덧 씌워진 죽음의 이유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민중을 선동하는 폭도, 정치적 정복을 꿈꾸는 유대인의 왕, 로마의 정치범, 신성모독자, 성전난동자. 그 어느 것도 예수님의 죽음의 이유일 수 없다. 그들은 사랑하는 스승의 죽음의 참 이유를 찾아내야 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찾아낸 의미는 “단번에 모든 인류의 죄를 지신 분” 이었다.

예수께서 단번에 사람들의 죄를 지고 가셨다는 말을 한국교회는 주술적으로 이해한다. 마치 주문처럼 이 사실을 시인하고, 고백하면 우리의 존재가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단번에 제물이 되신 예수의 신적 마술은 그 주문을 외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치 컴퓨터에 걸려있는 비밀번호처럼 새 일을 불러들이는 주문으로 작용한다. 예수의 십자가를 드리대면 하늘에서 신비한 변화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이런 천박함, 이런 맹랑함은 예수를 한낮 도깨비나 부뚜막 귀신 정도로 추락시킨다.

어떻게 한사람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죄를 도말할 수 있는가? 누가 반문할지 모른다. 왜 목사님은 모든 크리스천들이 자연스럽게 고백하고 믿는 바를 흔들어 놓으려고 하십니까? 바로 그 당연한 믿음 때문에 기독교는 역사하고는 상관없는 종교, 민중의 아픔과 무관한 종교, 한낮 종교로, 주술로, 자기 욕심을 합리화하고 극대화 시키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국교회가 취해있는 그 주술의 요소를 거두어 내야지만 신앙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당시의 민중들은 예수가 가르치신 세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그들의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모두가 존중받는 나라, 걸인, 병자, 장애인, 이방인 차별로 한을 가졌던 모든 사람들이 당당한 주인으로 서는 나라, 다시는 눈물도 없고, 아픔도 없는 나라, 그 꿈에 벅찼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나라를 펼치기 전에 그분은 당국에 의해 체포되고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죄 몫으로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예수가 가르쳐주신 그 나라는 아직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 나라는 자신들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 나라와 자신들의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갭이 있다. 그 갭이야 말로 바로 ‘죄’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분의 죽음이 단번에 모든 죄를 도말했다고 외치는 그 고백은 어떤 의미인가? 어떻게 해야 예수의 십자가가 거룩한 죽음이 되겠는가?
 
죽음 자체는 말이 없다. 더구나 타인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경우 어떤 메시지를 남길 여유가 없다. 그냥 억울함과 고통을 남기고 사라질 뿐이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천군천사가 하늘 문을 열고 내려와 개입하는 일은 없었다. 그냥 말없이 초라한 죽음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단번에 완전한 제물이었다고 하는 고백은 무엇인가?

그가 살아계실 때는 “그가 하려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셨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 앞에 서있다. 분명한 것은 그의 죽음으로 그가 꿈꾸었던 세상이 끝장나 버린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들 안에 새롭게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죽음의 세력 앞에 타협하지 아니하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승리이고 단번에 완성된 것이다. 그들은 단번에 모든 악의 세력을 묶고 승리하신 결과를 본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에서 세상의 모든 눈물과 아픔이 단번에 완성된 제물로 드려지는 결정적인 제사를 본다.

그 제사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동일한 아픔이 있는 현장에서 예수의 몸을 찢고 그의 피를 드리는 제사는 행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가인의 제사처럼 하나님께서 받으실지 아닐지 그 결과를 모르는 긴장된 제사는 아니다. 이미 단번에 결정적인 제사를 받으셨던 하나님의 판결이 선행된 제사일 뿐이다.

예수의 죽음 자체는 거룩하지 않다. 그냥 평범한 죽음일 뿐이다. 그러나 그 죽음의 거룩한 죽음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 그 죽음 안에 숨어있는 거룩한 뜻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마치 아들, 딸의 구속을 통해 처음에는 망설이던 어머니들이 최고의 투사가 되는 것처럼 십자가는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주님의 십자가는 단번에 모든 인류가 가진 죄를 도말시키는 거룩한 죽음이 되게 해야 한다. 그분의 십자가는 세상 어디이든지 아픔이 있고 눈물이 있는 곳에 모든 아픔을 단번에 도말 시키는 거룩한 제사로 기능하게 해야 한다. 십자가는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행렬이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이 능동과 수동은 도치된다. 우리가 그의 죽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의 피로 백성들을 거룩하게 만드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힘입을 뿐이다. 신앙의 능동이 빠지면 한낮 주술이 되지만, 수동이 빠지면 그것은 단지 제 자랑일 뿐, 신앙이 되지 못한다. 히브리서는 단번에 완성된 제사를 말하지만 마지막 장 결론 부분에서 주님께서 완성하신 제사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우리들이 드리는 찬양의 제사로 마감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 실상 우리에게는 이 땅 위에 영원한 도시가 없고, 우리는 장차 올 도시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립시다. 곧,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를 드립시다. 선행과 친교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히 13:12-16)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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