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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힐링 서울 (김진호)

시평

by 제3시대 2013. 2. 26.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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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서울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나도 모든 일을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내가 내 이로움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이로움을 추구하여,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10,33

 

춘절을 맞은 중국의 귀성 인구는 수억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한국의 설날 귀성 인구도 엄청나서 정부가 추산한 수는 2천 8백만 명을 상회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인구의 58% 이상이나 된다는 얘기지요. 한국과 중국처럼 근대화가 몇몇 도시 중심으로 심하게 불균등하게 진행된 사회는 광범위한 이촌향도 현상이 초래될 수밖에 없지요. 더욱이 이 두 사회는 확대가족의 의미가 여전히 강한 사회이니 명절은 그 반대로 대대적인 귀성의 물결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귀성을 할 때 어떤 생각을 할까요? 확대가족의 온화하고 친근한 품을 상상할까요? 적어도 귀성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탈가족화는 근대화가 초래한 노동체제로 인한 불가피한 현상이었지요. 가족이 핵가족 단위로 협소해졌고, 그나마 가족 간의 연결고리가 너무 심하게 해체되었다는 것이지요. 하여 이러한 노동체제는 사람들에게 가족의 품을 상실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귀성은 일시적으로라도 가족의 품을 체감하게 함으로써 삶의 활력을 되찾게 해준다는 이데올로기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한데 실상 이런 이데올로기는 이제 그다지 실제 경험을 반영하지 않는 ‘죽은 담론’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명절에 흩어진 가족이 같은 시간에 모이기도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족 간의 갈등 요소들이 위험수위를 넘나들곤 합니다. 식구들의 경제적 차이, 성적 차이, 종교적 차이, 세대 차이 등이 싸움으로 비화되는 일이 어느 때보다도 흔하게 일어나지요. 그리고 과거에 비해 그런 갈등의 거중조장자로서 어른의 위상은 크게 실추했습니다. 그러니 명절은 가족의 품보다는 가족의 피로감이 증폭되는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요컨대 명절의 귀성은, 가뜩이나 피폐해진 도시민들, 힐링이 간절히 필요한 그이들의 각박한 삶을 거의 힐링하지 못합니다. 힐링 이데올로기가 넘쳐나는 시간에 힐링의 실상은 없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서울 얘기를 해봅시다. 한국 자체가 일종의 확대된 서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한국은 도심 서울과 그 외곽으로 이루어진 ‘도시국가 서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서울 얘기란 도심인 서울의 논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얘기이기도 합니다.
바야흐로 서울은 힐링 신드롬에 휩싸여 있습니다. 방송마다 ‘힐링’ 운운하는 말로 넘쳐나고, 무수한 공적, 사적 단체들마다 힐링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교회도 힐링 목회가 유행하고 있지요. 가는 곳마다 멘토-멘티 짝짓기가 성행하고, 시민의 멘토 역할을 하는 대중스타들이 탄생하였지요. 심지어는 어느 동네에는 ‘힐링 헤어’라는 이름의 미용실이 나왔고, ‘힐링 국밥’라는 음식 메뉴가 등장하기까지 했습니다. 힐링과 아무 관계없는 것도 힐링을 표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힐링에 ‘미쳐’ 있을까요? 물론 자기가 병들어 있다는 상실감이 널리 퍼져 있기에 그렇겠지요. 우선 건강검진의 일반화가 질병의 일상화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국민 누구나 건강검진을 하는 제도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질병 걸린 몸’으로 자기를 설명하게 하는 담론 현상을 낳은 것입니다. 심지어는 아직 병증은 아니지만 잠재적인 병증까지도 자기 설명의 목록에 포함되게 되었지요. 그렇게 사람들은 병에 예민해진 것입니다.
거기에 서울이 매우 활발한 소비사회로 발달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대단히 예민해졌습니다. 자기 취향, 자기 감정, 자기 의지 등에 대해 과민해진 것이지요. 어떤 학자는 이런 현상을 ‘자기 과민’이라고 이름 붙였지요. 요컨대 자기 과민 상황에 처해 있고, 이런 자기 상황에 약간의 위기감이 오면 그것을 병증으로 생각하는 현상이 도시국가 서울의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일컫는 말이 ‘트라우마’가 일상어가 되기까지 했지요.
한데 신자유주의가 맹렬하게 사회를 휘젓고 다니면서 사람들은 소비사회적 ‘자기 과민성’과는 모순적인 존재가 되라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강력한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삼성의 총수 이건희는 그 요구를 단적으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모조리 바꿔라.”
이 말은 타인에게 자기의 것을 팔기 위해 자기를 해체하고 그 사람이 되라는 주문입니다. 총체적인 자기 쇄신의 방향은 자기 해체에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 목적은 자기 자신의 교환가치를 최대화하는 것입니다.
자기 과민의 존재에게 자기 해체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결국에는 과민할 대로 과민한 자기 욕구를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과민 현상은 미래를 향해 자기를 유보할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현재의 결핍을 병증으로 인식할 만큼 현재에 집착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자신이 필요한 것을 소비하고야 마는 소비적 욕구로 최대한 충전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충분히 성공해야 하고, 충분히 성공하려면 자기 해체를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자가당착에 빠집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모순 관계, 그 속에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힐링에 집착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일종의 삶은 전쟁터입니다. 하지만 그 후방지대인 명절도 별로 뾰족한 대안이 아닙니다. 아니 명절은 명절대로 새로운 괴로움을 안겨주곤 하니 말이지요. 하여 힐링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서울은 힐링되지 않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한편, 흥미롭게도, 「고린도전서」 10,33에서 바울은 마치 2천년대의 재벌총수 이건희와 흡사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도 모든 일을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 앞에는 이 말의 부연설명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자의식이 있지만 유대주의자들에게는 유대주의자처럼, 그리스인에게는 그리스인처럼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친 제사 재물을 먹는 것에 거리낌이 있는 사람에게는 거리낌 있는 사람처럼 행하고, 그런 터부가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먹는 이가 되겠다는 것이지요.
바울 당시의 고린도는 과거에 전쟁으로 처절한 파괴를 당했지만 불과 한 세기도 못돼서 지중해 전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의 하나로 급상승한 땅입니다. 한데 이곳은 로마에 대한 식민성이 높고, 물건을 팔아야만 존속할 수 있는 무역 의존성이 절대적인 도시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고린도가 서울과 매우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도 전쟁으로 처절하게 파괴되었지만 불과 60여년 만에 놀랍도록 발전한 도시였지요. 또한 미국과 자본주의에 대한 충성도가 대단히 높은 도시이고, 특히 한⋅미 FTA 비준은 그러한 충성도의 질을 한층 높여 놓았지요. 게다가 도시국가 서울은 외국과의 상업적 거래에 대한 의존성이 절대적이라는 특성을 갖습니다.
이런 도시의 주민들은 끊임없이 자기 해체의 주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소비자의 마음으로 생산하고 판매를 합니다. 노동자들은 주인의 마음으로 노동을 하고, 이 도시 주민은 종주국 도시의 마음으로 살고자 그 도시를 선망합니다. 곧 높은 자의 마음이 되고자 낮은 자인 자신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이런 요구가 일상인 도시 고린도에서 유대주의자들은 자기 해체를 다른 곳에 적용하여 해석합니다. 무수한 종족 결사체들이 저마다 자기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일이 다반사인 도시에서, 그 제사음식을 먹는 것은 그 음식을 베풀어 놓은 이들의 신앙심을 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한데 바울은 그런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빗대면서 다른 논지를 폅니다. 일종의 패러디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는 전혀 다른 논지를 폅니다. 자기 자신은 자유인이지만, 곧 예속되지 않은 자이지만, 예속된 낮은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해체하겠다고 합니다. 높은 자를 선망하는 자기 해체가 아니라 낮은 자에게 구원을 선사하기 위한 자기 해체를 주장하는 것이지요.
정리하면 힐링이 필요한 사회는 높아짐을 위한 자기 해체를 강요하는 사회입니다. 그런 사회에서 자기 해체는 높은 곳을 선망하는 자기 욕구와 갈등을 일으킵니다. 한데 바울은 낮아짐을 위한 자기 해체를 주장합니다. 그것은 힐링 받아야 하는 자기가 아니라 남에게 힐링을 주는 자기가 되라는 것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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