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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IV): 쫄지마, 이데올로기 (이상철)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3. 5. 27.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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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지젝을 아느냐? (IV)
: 쫄지마, 이데올로기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다소 긴 프롤로그

독자들은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접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난 솔직히 숨이 막힌다. 답답해서…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 사이의 역학 속에서 인간이 품는 현실적이며 이념적인 의식 형태를 이데올로기라 부른다고 사전에는 정의되어 있다. 아울러, 이런 설명들도 추가된다. 이데올로기는 인간 존재의 기반이 되는 가치 체계, 혹은 사회적인 조건에 대한 판단의 선택 체계 등등… 이 얼마나 지루하고 따분한, 김빠진 콜라 같은 말들인가?
이렇게 밍밍한 콜라를 마시고 있던 우리에게 청량하고 자극적인 신상품이 하나 출시되었다. 그가 바로 지젝이다. 감사하게도 지젝의 이데올로기 논의는 21세기 사상계의 전체 지형에서 볼 때 진정 김빠진 콜라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데올로기 비판을 다시 메뉴판에 당당히 입적시켜 우리로 하여금 간만에 이데올로기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물론, 지젝이 일으키는 요란함으로 인해 간혹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젝이 일으키는 이 소동이 좋다.
우선, 온갖 것에 시비를 걸어대는 싸움닭 같은 그의 태도가 나를 매료시킨다. 복서로 따지면 전형적인 인파이터다. 나는 지젝을 읽을 때 마다, 80년대 웰터급의 왕좌를 놓고 토마스 헌즈와 세기의 대결을 연출했던 슈거레이 레너드를 떠올린다. 토마스 헌즈가 큰 키와 긴 리치를 이용하여 날카로운 잽과 강력한 스트레이트를 바탕으로 링 주의를 돌면서 우아한 아웃복싱을 전개했다면, 슈거레이 레너드는 쉴새없이 헌즈를 파고든다. 물론, 레너드의 펀치는 헤비급의 조지포먼 만큼 강력하지도, 미들급 세계챔피언 마빈 헤글러같이 묵직하지도 않았지만, 그 빈도와 펀치가 나가는 다양한 각도만큼은 당대 최고였다. 결국, 학같이 우아했던 헌즈는 레너드의 집요함 앞에 무릅을 꿇고 만다. 지젝의 발언들을 지켜보면서 왜 나는 80년대 전설의 복서였던 슈거레이 레너드가 생각나는 걸까?
내가 지젝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지젝 증후군’으로 나타나는 그가 일으키는 후폭풍이다. 지젝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지젝의 이론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실천적 측면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꼬집는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지젝을 오독한 것이다. 자본의 전 지구적 재편이 완료된, 미국식 세계 자본주의가 세계를 덥고 있는 현 시점에서 혁명이 요원하다는 사실을 이제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또한 지젝이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이러한 현실의 이 엄연함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지젝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똘아이처럼 지젝은 마치 이 모든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혁명을 연기한다.
이런 지젝을 지난 시대가 지녔던 혁명의 프레임 안에 집어넣어 바라본다면 불편해진다. 지젝은 혁명 그 자체를 말하려는 것보다는 우리에게 현시대 이념적 지형과 그로부터 야기되는 폭력적 증상과 징후들을 하나씩 보여주고, 거기에 적합한 혁명의 조건들을 맛나게 나열한 후에, 최종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 엄연한 현실속에서 다시금 혁명에 대한 발칙한 상상을 도발케한다. 이러한 ‘지젝 현상’이 지금 시대를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런지 아직 실험 중이지만, 그것만으로 나는 지젝이 충분히 본인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고 본다.
사상적으로 지젝이 지닌 특이점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혁명과 정신분석을 결합시켰다는 점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프로이트로 대변되는 정신분석학은 혁명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왔었다. 지젝은 바로 그 정신분석을 혁명을 이해하는 도구로 끌어들인다. 이 말은 지젝이 혁명을 그 전 인물들과 다르게 해석한다는 말이다. 지젝에게 있어 혁명은 단순히 인민을 굴종시키는 오래된 억압과 착취의 물리적 체제를 전복시키는 행위가 아니다. 전통적 혁명론이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모토 하에, 주체의 투철한 의지와 인식론적인 앎이 조화를 이루는 철인의 혁명론이라면, 지젝의 혁명론은 그 주체의 꿈꾸는 방식에 주목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깨어있는 시민이라 자부하는 우리는 무슨 공청회장에서는 아이들을 입시지옥에서 해방시켜야 된다고, 전인적인 인성교육이 절실하다고 열변을 토하다가도, 정작 집으로 돌아와서는 한글도 모르는 아이를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초등학교 3학년부터 아이들을 특목고 대비반에 몰아넣는 속물적인 우리들이다. 물론, 우리는 이런 자신의 잘못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행동은 계속되는 것인가? 지젝이 혁명을 이야기하면서 정신분석학과 공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시대의 혁명은 단지 국가를 전복시키는 행위가 아니다. 우리 의식을 마비시키고 있는 자본의 욕망을 건드리지 못하고 그 욕망이 꿈꾸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혁명이 요원하다는 사실을 지젝은 알아차렸던 것이다.
지젝은 이러한 본인 사상의 밑그림을 선보이면서, 그것의 첫 단추를 이데올로기 비판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지젝을 읽는 것은 우선, 지젝식 이데올로기 비판의 화법을 따라 가는 것이다. 그 순서를 거치면서 우리는 지젝이 말하는 실재와 실재의 윤리와 유물론적 믿음과 만난다. 지젝의 발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외치게 하고,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는지는 물론 좀 더 지켜봐야 할 성질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지젝을 통해 우리는 사상사를 수놓았던 (지젝을 통과한) 철인들을 다시 만나고, 그들이 고민했던 문제와 대안을 벗삼아 오늘의 문제를 다시 다각도에서 반추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다시 혁명을 이야기 할 수 있다면……그래서, 나는 지젝이 일으키고 이 소동이 유쾌하고 흥미롭다. 이제야 비로소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넘어갑니다. Are you 뤠디?


고전적 이데올로기 비판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의 세 가지 차원을 언급하고 있다.
우선, 고전적 의미의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맑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아닐까 싶다.[각주:1] 맑스에 의하면, 역사란 이데올로기의 오류인식과정이고, 이데올로기는 계급에 의해 결정되며, 그런 의미에서 다분히 당파적이다. 계급과 당파는 ‘쭉~’ 계속 보편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변하고 뒤틀리고 역전된다. 그러므로 맑스에게 있어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관계와 그 역학을 밝히고, 그 과정에서 작동하는 허위의식과 순진함을 까발리는 일이다. 즉, 체제의 의해 왜곡된 현실과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민의 순진함을 해부해 보이는 것이 고전적 이데올로기 비판의 주된 임무였다.
지젝은 이 대목에서 냉소주의를 거론하며 고전적 이데올로기 비판이 지니는 나이브함을 역으로 고발한다. 오늘날의 우리는 체제에 의해 자행되는 현실에 대한 왜곡과 모순의 매카니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체제는 더 이상 우리를 속이지 못한다. 우리의 집요한 네티즌들과 인터넷 논객들이 그것을 가만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현실을 거부하지 못하고 오히려 전 시대보다 체제에 편입하고자 더 목을 매는 이유는 무엇인가?[각주:2]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결국 지젝의 욕망과 환상에 대한 이론일텐데, 연재를 거듭하면서 이 부분은 계속 보충되고 증액될 것이다.)


다시, 알튀세를 위하여...

고전적 이데올로기 비판이 지배자와 피지배라는 구조를 전제로 한다면, 이보다 좀 더 진화한이데올로기 비판은 이데올로기가 특정 집단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와 제도를 통해 작동된다는 원리다. 이것의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지난 <웹진 51호>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알튀세의 호명이론이 아닐까 싶다. 
맑시즘과 정신분석학은 각각 걸어온 길이 다르고, 방법론이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의 오류인식을 본인들 사상의 발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를 닮았다. 맑스에게 있어서는 역사가 이데올로기의 오류인식이었고, 프로이트에게는 근대적 이성에 기반하고 중심이 꽉 차 있었다고 믿어왔던 주체가 이데올로기의 오류인식이었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에게 있어 주체란 명료한 의식이 아닌 불확실한 무의식에 기반한 주체이고, 꽉 차있는 중심이 아닌, 비어있는 중심을 기반으로 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각주:3]
알튀세는 바로 이러한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공통점을 알아차리고,[각주:4] 양자의 결합을 시도하여, 맑스주의에는 없는 무의식(타자)의 개념을 정신분석학(라깡)에서 끌어온다. 라깡이 무의식의 영역인 상상계와 상징계를 거치면서 어떻게 개인이 주체로 되어가는지를 분석하듯,[각주:5] 알튀세 역시 무의식과도 같은 이데올로기(대중적 표상체계로서의) 속에서 개개인이 어떻게 주체로 만들어지는지에 주목한다. 
근대적 주체는 타자의 영역을 지우고, 그 타자의 영토에 깃발을 휘날리면서 자신의 주인됨을 입증하려 했던 존재였고, 그런 의미에서 타자란 정복과 제거의 대상이지, 성찰과 관조와 대화의 대상이 아니었다. 맑스주의는 이런 근대적 주체론의 결정판이었고…그런데 맑스주의자 알튀세가 우리안의 타자, 즉 무의식을 맑스주의안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알튀세는 맑스주의 논쟁사에서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중요한 인물이 된다.


대타자의 호명 앞으로!

알튀세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허위의식과 순진함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같이 구조화되고 내재화된 이데올로기 장치(ex: 국가)를 통해 작동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길을 가는데 전경이 내 뒤통수에 대고 “어이~, 학생, 가방 좀 봅시다”라고 하면서 나를 불러 세운다. 이때, 내가 뒤를 돌아보면서 “저요? 저 아무짓도 안 했는데요...”라고 반응한다면? 나는 아주 충실한 이데올로기적인 주체로 호명당하는 그 주체이다. 내가 전경에게 급 쫄아서 보인 반응은 사고하고 의식하고 학습해서 보인 반응이 아니다. 사고하고 의식했다면 개겼어야 맞다. 이 말은 우리의 의식보다 먼저 작동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영어로 representation, 번역하면 표상 혹은 재현체계, 즉 구조이다.
본디 의식이란 칸트 이래 인식론적인 전통에서 보면 무엇 무엇에 대한 의식이고, 그 의식은 반드시 표상체계 안에서 일어나는 의식이었다. 그것이 칸트에게는 ‘범주’로, 후설에게는 ‘선험적 의식’으로, 가다머에게는 ‘지평’으로 표현되는데, 이 말들에는 공히 우리의 의식에 앞서 어떤 재현체계가 먼저 선행됨이 깔려있다. 그 ‘선행한다!’는 말의 의미를 달리 표현해 ‘무의식적!’이라 불러도 어느 정도 무방하리라.
이를 종합하여 내가 전경에게 보인 반응을 판단하면, 나의 국가를 향한 말과 태도는 대한민국(이데올로기 장치)이라는 거대한 표상체계 안에서 드러나는 나의 무의식적 반응이라는 말인데. 결국, 알튀세에게 있어 인간 주체란 무의식적 체계를 통과한 이데올로기적 존재이고, 그 이데올로기는 신념과 지식의 차원이 아닌, 재현의 차원, 즉 구조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적인 비판이란 체계와 구조에 의해 자행되는 이데올로기적 신화화에 대한 비신화화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겠다. 
지젝 역시 라깡을 정치적으로 전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알튀세 계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젝은 알튀세를 넘어간다. 알튀세가 라깡의 초기이론 의지했다면, 지젝은 라깡의 후기이론을 차용하여 본인의 이데올로기론으로 나아간다. (이 부분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다음 웹진부터 전개될 것이다) 

예고편: 지젝이 나를 아프게 하는 이유

살짝 짧게 다음 웹진 원고의 시놉시스를 공개한다. (내가) 헛소리 하지 않도록.
지젝에 있어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맑스가 말하는 기만적인 허위의식에 대한 비판도 아니고, 알튀세가 지적하는 무의식의 구조화도 아니다. 이 말은 이데올로기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앎의 차원(인식론적 차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정녕 이데올로기가 겨냥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다. 우리는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 왜, 우리는 다 알면서 그렇게 행위하지 않는가? 우리의 행위를 지배하는 그 매커니즘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SNS를 통하여, 페이스북 담벼락에다 이명박과 박근혜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글을 몇 자 끄적이고, 또 다른 그런 류의 글들에 like 버튼을 힘껏 누르는 것으로 우리는 양심적 진보적 개혁적 민주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명박과 박근혜식 논리와 정책을 허락하고 그들에게 한 표를 던진 우리들의 무의식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빛나는 계몽이성을 바탕으로 부단히 학습하고 갈고 닦고 조이면 밝혀질 것 같았던 이데올로기의 정체는 기실 우리의 무의식적 환상 너머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었고, 그것을 추동케하는 원리가 바로 욕망이며, 그 욕망에 맞춰 우리는 미친X 널뛰듯 춤을 추고 있다. 그 춤에 대한 연구가, 그 춤을 추게 하는 바람에 대한 연구가 바로 지젝식 이데올로기 비판인 셈이고, 그 비판을 통해 우리는 내 안에 도사린 무의식적 욕망과 섬뜩하게 대면한다. 하여 지젝을 읽는 것은 때때로 불편하고, 그래서 가끔은 아프다.  (다음 호에 계속)

ⓒ 웹진 <제3시대>

 

  1. “The most elementary definition of ideology is probably the well-known phrase from Marx’s Capital: ‘Sie wissen das nicht, aber sie tun es’ – ‘they do not know it, but they are doing it’. The very concept of ideology implies a kind of basic, constitutive naivete.” – Zizek, Slavoj.,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New York: Verso, 1989), 28. [본문으로]
  2. “one knows the falsehood very well, one is well aware of a particular interest hidden behind an ideological universality, but still one does not renounce it.”-Ibid., 29 [본문으로]
  3. 익히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근대적 인간이란 의지적으로나 이성적으로 꽉 차있는 주체이고, 근대사회는 그 주체가 담지하고 있는 신념과 믿음에 대한 전적 신뢰와 희망에 의지했던 사회였다. 그렇다고 볼 때, 근대적 주체에 대한 딴지와 그 주체가 그려내는 사회와 역사에 대해 조소를 날렸던 맑스와 프로이트는 포스트모던을 열어젖힌 선구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실례로 20세 중반 이후 거세게 몰아친 포스트모던 백가쟁명이 거의 예외없이 맑스와 프로이트로부터 지적 세례를 받은 후예들에 의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만 하다. 현대사상에서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간의 통섭과 간섭, 그리고 교차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본문으로]
  4. Louis Althusser, Lenin and Philosophy and Other Essay, trans. Ben Brewster,(New Yoor: Monthly Review, 1971), 218-219. [본문으로]
  5. 알튀세는 라깡의 초기이론(무의식의 구조화)을 받아들여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그 무엇으로 보았다. 라깡의 초기 이론은 크게 거울단계와 상징계로 요약할 수 있다. 거울단계는 아이와 엄마 사이 형성되는 완벽한 2항 관계를 일컫는 말로, 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하기 전까지 지속된다. 이때 아이의 자기 동일성은 상상적 오인에 의존하고 있다. 상상계(거울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아이는 언어를 습득하면서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는데, 이것은 인간의 사회화 과정을 의미한다. 아이는 상징계의 질서로 진입하면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리는 대타자의 법과 규율과 관습을 받아들이고, 대타자가 제시하는 기표를 따라 살면서 드디어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렇게 성장한 주체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큰 주체의 부름에 “예”라고 화답하는, 즉 대타자의 호명에 응답하는 주체인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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