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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정보] 어느 늙은 민중신학자의 편지(III) (이상철)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3. 5. 27.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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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늙은 민중신학자의 편지(III)[각주:1]

: 민중신학이 윤리를 말할 때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1

형! 오늘은 <민중신학이 윤리를 말할 때…>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편지를 띄웁니다. 倫理의 한자를 풀이하면, 理는 ‘도리, 이치, 사리, 다스리다’를 뜻하고, 倫은 ‘차례, 순차, 나무결, 동류, 동등’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윤리란 사물의 이치를 마치 나무 결이 배열되어 있는 것처럼 차례로, 순차적으로 정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해진 이치를 차례대로 잘 다스리고 지키는 것이 윤리의 동양적 의미인 셈입니다.
서양 윤리학의 전통에서 보자면, 애초에 플라톤이 말했던 덕(arête)은 선함이 아니라 무엇보다 우수함이었고,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윤리학의 궁극적 관심이 포괄적인 의미의 좋음, 즉 행복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이런 전통을 목적론적 윤리학이라고 하죠. 에피쿠르스, 영국의 경험주의, 공리주의, 실용주의, 그리고 80년대 이후 미국을 지배하는 공동체주의가 크게 이 흐름 속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각주:2] 어찌 보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선함’과 ‘좋음’은 동류항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양자 사이에 별다른 구별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서양인들은 칸트에 이르러 비로소 그것을 구분해냅니다. 즉, ‘어떤 목적을 위해 좋은 것’과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을 칸트는 갈라냈고, 후자를 윤리학의 새로운 영역으로 선언하였죠. 목적론적 윤리학과 더불어 서양윤리학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는 의무론적 윤리학은 이렇게 탄생하였습니다.
하지만, 목적론적 윤리학이나 의무론적 윤리학이 각자가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할 지라도, 윤리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행위에 방점이 있는 학문인지라 나름 현실에서의 실천 강령을 필요로 하였는데,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 칸트는 ‘정언명법’이라 불렀습니다. 현실세계에서 살아갈 법도와 순서를 규정한 것입니다.
이렇듯 동.서양 전통에서 윤리란 공히 삶의 이치와 그에 따르는 법도를 세우는 것이었고, 그 원리와 룰을 잘 지키는 사람을 윤리적 인간, 혹은 도덕적 인간이라 불렀습니다. 흔히 어른들이 ‘상철이가 군대갔다 오더니 사람되었네!’ ‘희선이가 시집가서 애를 낳더니 사람되었네’라고 말할 때, 한국 사회에서 남자 인간은 군대를 다녀와야, 여자 인간은 시집가서 애를 낳아야 비로소 사람대접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사회는 남자 인간을 처음 만났을 때 ‘군대 갔다 왔어?’를 묻는 것이고, 여자 인간에게는 ‘애가 몇 이야?’를 묻습니다. 군대라는 전체주의를 통과한 그 인간, 가정이라는 가부장제를 통과한 그 인간이 비로소 사람대접 받는 그 나라, 그곳이 바로 대한민국인 셈이죠.

2

지난 52호 웹진에서 저는 ‘민중신학의 위기론에 부쳐’라는 글에서 부정성에 입각한 민중신학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 글에서 제가 민중신학의 부정성을 언급했던 이유는 어떤 보편적 입법에 의해 소외되는 개별자(singularity)들의 차이와 다름이 존중되고 각광받는 사회를 향한 비평적 무기를 확보한다는 점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거대서사의 논리에 입각한 민중신학의 내러티브가 오히려 시대착오적이지 않나? 라는 의심에서 기인합니다.
형, 솔직히 민중신학만큼 거대한 이야기가 어디 있나요? 지금도 민중신학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 나이에도 가슴이 짠하고 뭉클하면서 눈물이 고이는 이 숭고함을 어찌 설명해야 할런지? 원래 미학이론에서 말하는 숭고함이란 우리 앞에 펼쳐진 거대한 광경, 장면, 사건 앞에서 미적 주체가 느끼는 황홀경 일반을 지칭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적 대상의 거대함 앞에서 미적 주체는 한 없이 작아져 그 거대함을 어찌 표현할 줄 몰라, 결국에는 추상의 형태로 밖에는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위대함과 거대함 앞에서 침묵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 그 충격과 전율을 그냥 감내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 시대의 운동 논리였고, 그 원리는 상당기간 절대적 강령이었으며, 지금도 어느 정도 그것은 유효합니다.     
우리가 자유와 민주와 정의와 통일이라는 말 앞에서 느끼는 숭고함은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의 그것과 사실은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 역시 그 나이에 조국 근대화, 반공, 잘 살아보세!, 경제강국이라는 거대함과 위대함 앞에서 눈물을 주루룩 흘립니다. 어쩌면 한국사회는 이 두 가지 포획되지 않는 숭고함의 에너르기가 공존하는 리비도의 각축장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형과 내가 공히 좋아했던 니체가 그랬던가요?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동안 들여다 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 보게 될 것이다” 고 말입니다. 나는 이 문장을 접하는 순간 몸이 얼어붙는 듯한 착각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우리의 치부를 들켜버린 부끄러움이랄까요. 민중신학 진영 역시 전선 저편의 그들처럼 진영의 논리속에 오랫동안 갇혀 있다 보니, 무언가를 받아 들이는 감각에 있어 더디고, 그 과정에서도 ‘의심의 해석함’에만 의존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그것이 마치 우리의 미덕인양 자위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난 시절이 워낙 혹독하였던 지라 우리의 의식과 영혼 역시 그 잔혹함에 맞서 싸우느라 그들처럼 우리의 영혼도 차갑게 식어간것은 아닌지? 천재 시인 이상은 이런 우리의 현실을 그의 시 <거울>에서 짧지만 아주 섬뜩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꽤 닮았소

 

3

이런 까닭에 부정성을 인간 행위의 근거로 내세우는 새로운 윤리적 제안은 진영의 논리안에서 긍정의 윤리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들을 혼란과 불안가운데 빠지게 합니다.  하지만, 한 꺼플 벗겨보면, 긍정의 윤리는 보편자(이치, 중용, 정언명법…)안으로 개별자를 일방적으로 줄 세우는 상징계의 원칙이고, 전체성의 논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본질과 토대를 상징하는 이데아를 상정한 후, 그 절대자의 음성에 따라 모든 개별자들에게 일사분란한 선택과 행위를 강요하는, 니체의 말대로라면 노예의 도덕인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웹진에서 언급한 부정성에 기반한 민중신학이 윤리와 만나게 되면 윤리 본연의 뜻은 역전됩니다. 오히려 개별자가 자기의 윤리를 만들어 내고 그것이 동시에 보편자가 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입증하고, 설득하고, 투쟁하고, 관철하는 이 모든 일련의 행위들이 새로운 윤리적 준칙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정해진 이치를 뒤집어 보는 것, 기존의 질서를 부정하고 의심하는 것이 윤리적 태도의 첫 걸음이 되는 셈이죠. 푸코는 죽기 바로 직전 이를 가리켜 ‘자기에의 배려’(The Care of the Self)라 칭하였고, 그것이 <성의 역사III>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민중신학 역시 이제는 ‘거대서사의 윤리’가 아닌, ‘자기배려의 윤리’로의 전환을 이루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지워야 할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안 좋은 습관이 있죠. 진리와 정의를 동류함으로 보는 것이 그것입니다. 진리를 둘러싼 담론이 반드시 정의로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정의란 차이와 다름으로 인한 충돌이 지속가능한 상태이고, 그 충돌이 소모적이라는 이유로, 국민 화합에 저해가 된다는 이유로, 국가기강을 해이하게 한다는 이유로, 북한의 개입이라는 이유로 진압이 되지 않는 상황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한국적 상황에서는 그렇습니다. 이 논의는 예전에 한동안 유행했던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둘러싼 논쟁의 화두이기도 했습니다.

 

4

일찍이 포스트모던 논쟁을 주도했던 리오타르가 거대서사의 붕괴, 작은 이야기들의 발굴을 이야기 하였고, 이에 대한 하버마스로 대표되는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게 등장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90년대 초. 중반이 그랬죠. 당시 형이랑 불꽃 튀기며 ‘포스트모더니즘’을 놓고 갑론을박했던 날들이 기억나는 군요. 물론, 한국사회에서 그 논쟁들은 얼마 가지 않아 흐지부지되고 말았지만, 저는 지금도 리오타르의 의견에 여전히 심정적으로 동의합니다.
사실 포스트모던 논쟁은 ‘이성의 합리성’과 ‘이성의 광기’를 둘러싼 서로 다른 입장과 해석의 차이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양자의 대결은 ‘세상에는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 있는가?’라는 말로 유명한 파르메니데스와 ‘만물은 변한다’라고 반박한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시작된 고대 그리스의 일자와 다자 논쟁, 중세의 실재론과 유명론 논쟁, 근대의 이성과 실존의 문제 등으로 이어져왔던 오랜 서구철학 논쟁사의 끝자락에 위치합니다. 하지만, 역사가 우리에게 준 교훈은 이러한 논쟁이 신비화되고 탈역사화 되었을 경우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과 역사속에서 어떤 함의로 다가오는지 묻지 않는다면 울리는 징과 같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하버마스와 리오타르만을 따지고 보자면, 전자의 경우 인간은 사회적, 역사적 망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고, 그 규범성이 인간됨의 조건임을 전제합니다. 후자는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구요. 즉, 하버마스에게 있어 규범은 인간의 삶의 조건인 반면, 리오타르는 그 규범으로부터의 해방이 인간 삶의 조건인 셈입니다.
자신들의 사상적 준거점을 확보하고 나서 양자는 서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격을 가합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규범은 자칫 악용되면 전 시대와 같은 전체주의로 변모될 수 있음이, 후자를 향해서는 허무주의로 변하여 비역사성 내지 비사회성을 초래할 수도 있음이 지적됩니다. 물론, 그에 대한 반론 역시 양자는 많은 논쟁을 거치면서 마련하였답니다. 하버마스는 유명한 대화적 이성에 입각한 의사소통 행위를 내세웠고, 반대편에서도 비역사성, 비사회성에 대한 지적에 맞서 타자성을 내세웁니다. 데리다, 레비나스 등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런 계보학적인 흐름에서 볼 때, 하버마스가 내세우는 제안은 이성의 자기발전, 자기변명이라는 측면에서 도구적 이성의 질주를 제재할 만한 좋은 의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칫 이상적 의사소통 행위에 참여할 수 있는 합리적 주체들만의 잔치가 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들만의 리그가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타자성을 테마로 내세우는 윤리적 전략이 요즘 주목을 받는 이유일 것입니다.

 

5

제가 기대하는 민중신학의 윤리적 함의 역시 이러한 타자성을 기반으로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민중신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적당히 버무리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하여 저지르기 쉬운 대표적인 실수 중 하나가 포스트모니즘 일반을 범박한 타자성으로 덧칠해버리는 경우입니다.
<The Weakness of God>(2006)의 저자이자 미국학계에서 아주 충실한 데리다 전달자이자 해석자인 존 카푸토(John D. Caputo)는 포스트모던 논쟁이 한창이던 1993년에 <Against Ethics>(1993)이라는 책을 출판한 바 있습니다. 그 책에서 카푸토는 포스트모던 사상의 일반적 특징을 heterology라 명하였고, 더 조밀하게는 heteromorophism과 heteronomism으로 나눕니다.
전자는 니체로부터 기인하여 들뢰즈, 푸코로 이어지는 라인이고, 후자는 굳이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키에르케고르로부터 시작하여 레비나스와 데리다로 이어지는 진영입니다. 니체가 그랬듯이 전자가 디오니소스적인 축제를 찬양하고 자기에 대한 긍정과 삶에 대한 환희를 내세우는 유쾌한(?)한 세계관이라면, 후자에는 존재 일반이 지닌 무한성으로부터 비롯되는 불안, 공포, 책임, 신비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을 거론할 때 니체로부터 이어지는 계보를 먼저 떠올리기 쉬운데, 근래에는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별도로 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아 더 조밀해지고 파편화 된 채 착취당하며 사라져가는 다양한 타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차원에서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타자성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민중신학과 관련하여 제가 관심하는 부분입니다.
민중신학은 이제 거대하고 묵직했던 실천이론보다는 작은 진실들, 즉 혁명의 시대를 살아내느라 미처 챙기지 못했던 소소한 일상의 것들을 제대로 응시할 수 있는 시선의 확보를 통해 ‘민중신학의 위기’를 관통할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레비나스와 데리다불러들여 민중신학과의 비판적 우호적 대화를 통해 하나씩 풀어가려 합니다. 그 과정을 지나면서 민중신학의 과거에 대한 회고와 현재에 대한 진단,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까지가 다 아우러지기를 기대합니다. 제가 너무 큰 욕심을 내는 걸까요? 

형. 그동안 저의 넋두리를 듣느라 수고 했수다. 함께 있었더라면 저의 발언을 향해 예의 그 꼬장꼬장한 시선과 말투로 한바탕 퍼부었을텐데……형의 그 일성이 그립구려. 논문 쓰다가 답답한 부분, 풀리지 않는 매듭이 등장하면 다시 편지를 띄우겠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평안을…

ⓒ 웹진 <제3시대>

 

  1. 졸고는 현재 진행중인 필자의 학위 논문 [The Turn to the Other: Minjung Theology in a Dialogue with Levinasian Ethics and Derrida’s Deconstruction Ethics]중 서론의 일부를 번역 각색한 원고입니다. 글의 제목으로 사용된 ‘어느 늙은 민중신학자’는 특정인이 아니라, 논문을 웹진 원고로 번역 각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중화자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졸고의 내용은 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입장과는 무관함을 아울러 명시합니다. [본문으로]
  2. 공동체주의: 한국에서 인기가 높은 마이클 샌델, 맥킨타이어, 찰슨테일러 등이 공동체주의를 대표하는 학자들이다. 서구 근대를 규정하는 몇 가지 중요한 원칙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봉건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개인의 발견이 아닐까 싶다. 그 개인을 이 전 시대 개인과 구분하여 자율적 개인이라 부르고, 그 개인은 막 형성되고 발전하기 시작한 자본주의 시대에서 그동안 억압되었던 이드를 마음껏 분출하기 시작한다. 이 욕망은 급기야 개인의 차원을 벗어나 공동체의 차원으로 확대되어 제국주의화 된다. 이러한 욕망의 파국이 바로 1.2차 대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후 세계는 나치즘과 파시즘 같은 극단적 공동체주의에 대한 경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냉전이 종식되고 전세계가 자본주의 시장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자유주의(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새로운 공동체주의가 등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현재 일고 있는 공동체주의에 대한 간략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자유주의가 지나치게 개인의 자율성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인간의 삶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공동체가 간과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홀로 독립된 섬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안에서의 연대와 협력을 통해 비로소 자아를 완성하는 과정적 존재이다. 결국, 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 사회에서 표류하는 개인을 공동체 안으로 복귀시킴으로 사회전체의 행복의 총량에 관심한다는 점에서 공리주의의 연장선에 있다고 하겠다. 공동체주의에 대한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은데, 이는 다음에 기회를 봐서 몇 회에 걸쳐 연재하기로 하겠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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