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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서바이벌의 종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사회적 타살로서의 자살에 관한 신학적 문제제기 (김진호)

시평

by 제3시대 2013. 7. 4. 16:14

본문

서바이벌의 종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사회적 타살로서의 자살에 관한 신학적 문제제기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금령의 뜻은 무엇일까? 카인은 아벨을 죽였고(「창세기」 4,8),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죽일 뻔 했다(「창세기」 22,10).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고 노래한다(「사무엘기상」 18,7). 성서 속의 이 무수한 살인들은 정당한 살인인가? 십계명의 살인 금령은 어떤 살인을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물론 가장 일반적인 경우인 누군가를 고의로 죽게 하는 행위가 그 첫째일 것이다(「민수기」 35,21). 한데 더 나아가서, 오래전 부족동맹 시절의 이스라엘 때부터 유래했던 ‘피의 복수’를 통한 살해(vendetta, 「민수기」 35,25)도 부당한 살인에 해당한다. 또한 ‘명예살인’ 전통(「창세기」 38,24)도 금지되어야 할 살인이었다.

요시아 왕(재위 641~609 BCE.)이 법을 반포할 때,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대중에게 알아듣기 쉽도록 만들어 포고한 십계명[각주:1]에서 ‘살인 금지령’이 담고 있는 구체적 내용은 필경 이런 함의, 고의 살인, 피의 복수 살인, 명예살인 등의 금지를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데 살인죄를 엄단하고자 할 때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과실치사 범죄자는 죽임을 면해줄 필요가 있다. 그것은 피의 복수로부터 구출해주는 것이다.(「신명기」 4,41). 또한 가해자가 명료하지 않은 살해의 경우, 그 사건을 둘러싸고 가문 간에 벌어질 수 있는 피의 복수를 막는 것도 필요했다. 하여 공식으로 그 사건은 누구도 책임이 없음을 공시함으로써 복수의 악순환을 예방하고자 했다.(「신명기」 21,1~9). 반면 존속살해자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극형에 처했다.(「신명기」 21,18~21).

여기서 보았듯이 ‘살인하지 말라’는 법령은, 간단한 듯하지만, 실은 그 내막에는 여러 가지 고려할 것이 있었다. 요시아 정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위에서 본 것처럼, 십계명의 간단한 문구와는 달리, 법을 구체적으로 적용할 때엔 여러 변수들을 함께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훨씬 더 복잡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오늘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이 계명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 계명과 더불어 신중하게 고려해야 것들은 어떤 것일까?

당연히 누군가를 죽게 하는 일은 불행한 일이며,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임에 이의가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물론 고의로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는 결코 관용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존엄사’의 경우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또 ‘낙태’의 문제도 생각을 복잡하게 한다. 나아가 사람들과 인격적, 감성적 친밀성을 교류하는 반려(伴侶) 존재의 생명권의 문제도 제기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반려동물과 반려식물, 그리고 최근에는 인조인간을 의미하는 안드로이드(Andriod)의 생명권[각주:2] 등이 고려의 대상이다. 여기에 하나 더, ‘자살’도 오늘의 상황에서 주목해야 할 문제다.

이 글에서는 바로 이 ‘자살’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자살을 ‘공격성이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해 가해진, 일종의 전도된 살해’라고 말했다.(「슬픔과 우울증」 in 『무의식에 대하여』) 또한 교회는 훨씬 이전부터 ‘자살’을 ‘자기 살해’의 관점에서 보면서, ‘살인하지 말라’라는 금령을 어긴 행동으로 간주했다. 이런 자살 반대 교리 탓에 가톨릭이나 개신교 성직자들이 자살자들의 장례미사 혹은 장례예배를 거부하는 경우도 적지 아니 있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가 자살에 대해 적대적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분명한 것은 성서의 ‘살인 금령’에는 자살 문제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서에 묘사된 대표적인 자살의 예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적에게 죽임당할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사무엘기상」 31,4). 삼손은 블레셋 신전을 무너뜨려 무수한 블레셋인들과 함께 그 돌무더기에 깔려 죽었다(「사사기」 16, 29~30). 또한 예수운동은 처음부터 무수한 순교자들과 더불어 발전했는데, 순교자 신앙은 권력에 의한 타살을 자발적 죽음으로 해석하는, 일종의 ‘자살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자살들이 살인 금령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이스카리옷 유다의 자살(「마태복음」 27,5) 같이 성서가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자살도 있지만, 그때에도 자살은 그이가 지은 죄의 당연한 귀결이지 자살 자체를 살인으로 간주하여 비난하지는 않았다. 요컨대 성서에서 자살은 살인 금령과는 무관했다.

자살을 살인으로 해석하여 자살 자체를 ‘잘못된 행위’로 비판했던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지도자는 5세기 교부(敎父)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였다. 그는 자살할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음을 강변했던 것이다. 

한데 그가 자살을 비난한 맥락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정치적이었다. 그는 아프리카 출신이지만 로마 황제와 로마 교회를 위해 일한 사람이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도나투스파 교회들이 로마 교회와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 지역의 반로마 기조와 결합되어 열렬한 대중운동으로 번져나갔다. 요컨대 이른바 도나투스 논쟁의 내막에는 로마에 의해 혹독한 착취를 당하고 있던,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하는 북아프리카 지역 대중의 반로마 감정이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때 열광적 도나투스파 사제들은 순교를 불사한 반로마 항쟁을 부추겼고, 무수한 대중이 이에 호응하고 있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 사제들이 주장한 순교를 자살이라고 격하했고, 자살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권리가 아니므로 신의 구원을 결코 받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로마 제국과 교회는 도나투스 운동과 그 대중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리고 그들의 신학을 더 이상 존립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아우구스투수의 자살 반대론은 도나투스주의에 대한 이론적 공격의 의미를 넘어서 신학적 일반론으로 격상되었다. 하여 이제 자살 문제는 자기 살인으로 해석되었고, 자살자는 교회의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교리는 잘못 자리잡은 교리다. 이 교리는 정치적 야바위에 다름 아니고, 그 대가로 자살의 사회적 현실은 망각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여 교회는 자살을 단행한 사람들의 고통, 자살할 만큼 극한의 고통에 시달리는 대중의 고통을 대면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각주:3]

하여 이제 신학은 자살에 대해 다시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망각해 버린 그 현실을 탐구하고, 그 속에 담긴 대중의 고통을 대면하는 일이 필요하다. 과거 유다국의 요시아 정부가 십계명의 살인 금령을 이야기할 때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자살의 문제를, 그리고 교회가 망각하고 폄훼했던 자살의 문제를 보다 현실감 있고, 깊이 있는 통찰을 담은 신학으로 발전시켜 내야 한다.  

더욱이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 자살률이 단연 1위다. 요컨대 자살은 한국사회의 살인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에 속한다. 그러니 자살을 신학화하는 일은 오늘 우리에게 절실한 과제인 것이다.

먼저 경제활동인구인 15~64세의 경우 자살자의 비율이 우리나라는 OECD 평균의 2배, 65세 이상은 4배나 된다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이를 좀 과장하면 자살은 개개인의 자기 살해 현상을 넘어서, 사회적인 집합적 충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좀 큰 맥락에서 사회의 추이를 살펴보자. 1980년대는 민주화의 열망이 전 사회를 휘몰아쳤다. ‘1987년’은 민주화가 더 이상 꿈이 아니라 실현되어 가는 가능성,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의 질서가 중요하게 작동하였음을 의미하는 상징적 시간이다. 하지만 그 10년 후인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한국사회는 처절한 생존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난폭하게 휘말려 들었다. 그것은 더 이상 ‘모두의 평등’, ‘모두의 행복’이라는 집단적 가치가 유효할 수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때 우리사회를 뒤흔든 것이 이른바 ‘부자 되기 열풍’이었다.

이제 전 국민은 ‘부자 되기 경제학’, ‘부자 되기 심리학’에 몰두했다. 사람들은 노동과 휴식 시간 가리지 않고 갖가지 재테크에 열을 올렸고, 모든 여력을 있는 대로 다 가동하여 스펙 쌓기에 전념했다. 남들이야 어찌되든 자기 자신만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열망이 사람들의 생각을 장악했던 것이다. 바야흐로 ‘서바이벌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MB 정권의 탄생은 그러한 부자 되기 열풍의 절정을 보여준다. 이제 도덕도 가치도 필요 없고, 단지 부자가 될 수 있는 길만을 보려 했다.

하지만 그 5년 사이 이러한 열풍은 절망으로 전도되었다. 그 미친 서바이벌 게임을 거친 뒤 사람들은 공포감에 휩싸여 버린 것이다. 현재를 살아갈 힘도, 노후를 기대할 희망도 몰락했다. 비정규직으로 추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 일터에서 퇴출되는 것에 대한 공포, 가족해체의 공포, 질병의 공포, 빈곤의 공포 등등, 온갖 공포들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제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생존에 대한 ‘공포’다. 사회는 공포에 민감해졌다. 그러자 사회적 공포감에 기생하는 시스템이 발전한다. 매스미디어는 각종 안보 파산의 공포를 유포시켰고, 보험사는 건강과 재산의 파산 공포감을 유포시켰고, 심리상담가들은 정신의 파산 공포감을 유포시켰으며, 종교는 세계 파멸의 공포감을 유포시켰다.

공포는 존재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다. 자살 증후군은 바로 이런 ‘서바이벌의 종언’과 함께 사람들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하여 자살은 곧 ‘사회적 타살’의 결과이며, 우리가 만들고 있는 이 저주의 사회는 ‘생명 파괴의 세계’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

ⓒ 웹진 <제3시대>

 

 

  1. 요시아 왕이 법을 반포할 때, 열 개 계율의 묶음인 ‘십계명’을 처음 반포하였다. 법은 문서 형식의 통치 체계를 수반하는 것인데, 대중은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대중에 대한 법의 통치를 실효성 있게 실현하기 위해 간명한 형태의 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본문으로]
  2. SF 영화의 고전인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는 안드로이드의 생명권 문제를 다루고 있다. [본문으로]
  3. 교회의 자살 금지 교리는 자살한 자에 대한 야만적인 시신 훼손의 관행을 야기시켰다. 이에 대하여는 게르트 미슐러(Gerd Mischler)가 쓴 『자살의 문화사』를 보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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