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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기억의 실종 (김진호)

시평

by 제3시대 2013. 8. 7.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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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실종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 총회에 선포하시고,
이 말씀에 조금도 보탬이 없이,
그대로 두 돌판에 새겨서 나에게 주셨습니다.

―「신명기」 5,22

 

2007년 저 소란스럽던 ‘어게인 1907’의 슬로건은 그 해가 지난 뒤 슬쩍 기억에서조차 사라졌습니다. 물론 이 소란은 꽤 큰 성과를 올렸지요. 그 해 대선에서 기독교도들이 MB에게 몰표를 주었고 ‘장로대통령’을 당선시켰지요. 하여 대형교회가 주도한 보수대연합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았습니다. 권력과 자원의 점유를 둘러싼 정치게임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전통적 보수세력에게는 ‘성공’이라고 평가해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교회에겐 결코 성공일 수 없었습니다.

감소 추세인 교세는 반전되지 않았고, 교회 양극화는 훨씬 더 심화되었으며, 시민사회의 혐오 현상은 단순한 반대에서 체계적인 반대로 비약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리고 신자들의 충성심 이완 현상은 더욱 현저해 대안적 신앙을 찾는 추세가 두드러졌지요. 하여 ‘어게인 1907’은 단적으로 말해 교회에겐 실패입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감리교를 중심으로 불고 있는 ‘1903년 원산 대부흥’의 기억하기 현상이 ‘1907년 기억의 소환 작업’의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 아닐까 우려됩니다. 철저하고 냉정한 반성 없이 새로운 계기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산 대부흥운동 110주년을 맞아,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2007년의 ‘어게인 1907’의 실패한 기억에 대한 점검이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우선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원기억(原記憶)에 관해 살펴봅시다. 이 사건의 출발점은,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이라는 점을 주지해야 합니다. 전쟁터였고 군대 진군로가 되었던 평안도의 1907년의 평양은 ‘전후(戰後)’라는 파행적 체험이 응축된 시공간입니다. 전쟁을 겪은 뒤, 그 미친 불꽃을 방사시켰던 폭력성이 일상화되고 내면으로 들어가면서 벌어진 몸과 정신의 분열적 갈등이 고조된 시공간이고, 그것이 원인불명의 파괴적 징후로 신체 외부로 돌출하여 발현되는 파생적 폭력의 시공간입니다.

이때 전쟁을 겪으면서 미국의 공간이던 교회로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유입되어 들어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후’의 피폐함을 온몸으로 겪고 있던 이들이었습니다. 교회는 신자들 간의 갈등과 분열, 폭력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지요.

교회 지도자들은 골방에 들어가 원산에서처럼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한데 공교롭게도 이 기도회는 곧 신비 체험에 휩싸입니다. 기도회 참석자들 다수가 자신들이 겪고 있던 혼돈과 무력함을 단박에 사라지게 하고도 남을 만큼의 종교적 엑스타시 상태에 진입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 열광주의는 순식간에 다른 이들에게 전염됩니다.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그런 종교적 엑스타시 체험에 몰입하게 되어, 이들은 모두 신비를 공유한 체험공동체로 결속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그 신비체험은 전후의 정체 모를 퇴행적인 파괴성에서 자유로워지는 해방의 체험으로 이어집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평양대부흥운동의 원기억입니다.

이제 기억하기의 두 번째 차원, 곧 기억의 제도화 과정을 보겠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신비 체험을 ‘성령의 체험’이라고 명명했습니다. 하여 이 사건은 성령사건이 됩니다. 사건의 해석이 시작된 것입니다. 한데 해석은 늘 여러 해석들과의 경합 과정을 통해 수행됩니다.

가령 예수가 악령을 추방한 사건을 바리사이는 악령이 벌인 사건으로 해석했습니다. 반면 예수는 악령이 악령을 추방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논거를 제시하며 자신의 사건이야말로 성령의 사건임을 강변하였지요. 여러 다른 해석들이 경합을 하는 가운데, 한 해석이 경쟁에서 승리하면 그것은 지배적 기억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한데 주목할 것은, 평양의 장로교 교회들에서 해석의 주도권을 장악한 이들은 미국계 선교사들과 그들을 추종한 한국인 지도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일반적으로 영의 체험은 기존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종교적 전복의 코드가 되곤 합니다. 해서 학식 있는 자나 제의를 독점한 자들보다, 그런 일상의 체계를 기도회를 시작했으니, 기도회의 효과를 선점하고 통제권을 쥐게 된 것은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해석하는 언어를 보유하지 못한 이들이 더 자주 영의 체험을 했고, 그 체험은 그들이 비록 교육받지 못한 이들이라 하더라도 기성의 지도자들 못지않은 담론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1907년의 평양의 교회에선 학식과 제의권을 전유한 이들이 영의 체험도 전유했지요.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견제받지 않는 압도적인 신앙적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게 했습니다.

한데 그들은 당대 미국에서 가장 근본주의적인 신앙의 수호자들이었습니다. 하여 이들이 전권을 휘두른 사건의 해석은 종교적 문화적 배타성과 성공주의가 결합된 방식으로 형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정리하면,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에는 원기억과 제도화된 기억, 이 두 가지 기억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원기억’은 신비 체험 현상이며, 그 속에는 ‘전후’라는 파행적 기억이, 그 발작을 일으키는 정체 모르는 미친 상흔들(trauma)이 신비 체험에 의해 압도되어 해소되고 극복되는 ‘해방의 체험’이 들어 있습니다. 또한 그것으로 그들은 이웃을 적으로 환치시켜 그들에게 쏟아 부었던 폭력성을 속죄하고, 이웃을 그리스도의 새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관계적 체험’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원기억이 제도화되는 과정, 곧 다른 해석들을 압도하고 하나의 해석이 주도권을 갖게 되는 일종의 헤게모니화 과정과 결과가 바로 ‘제도화된 기억’입니다. 한데 평양 대부흥운동에서 제도화된 기억은 부모의 전통과 단절하고 이웃을 적대시하는 배타주의적인 해석의 제도화를 포함했습니다. 또한 그 배타성의 근거를 서구 백인 남성 중심주의적인 제국주의적/식민주의적 해석의 제도화를 포함했지요.

그러므로 나는 2007년의 ‘어게인 1907’의 기억하기의 실패가 저 1907년의 제도화된 기억을 무비판적으로 반복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로 하여금 그 신앙의 배타성과 식민주의를 청산하는 대신, 교회의 권력 지향적 패권주의를 위해 신앙적 재활의 열정을 쏟아 붓게 했던 것이지요. 그해 전국 곳곳에서, 심지어는 한인교회가 세워졌거나 한국인 선교사들이 활동하는 세계 곳곳에서, 그곳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의식을 치루는 캠페인이 벌어졌습니다. 그런 종교의례 중에 가장 위험스런 것은 이른바 ‘성시화’ 의례입니다. 왜냐면 그것을 주도한 이들이 그 도시의 시장, 고위관료, 기업인 같은 그 지역에서 자원을 독과점하고 있는 권력엘리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을 가장 적나라하게 편 이가 바로 이명박씨입니다. 그의 인사와 정책의 종교 편향성은 너무나 노골적이었지요. 그 결과 교회에 대한 사회적 혐오감은 더욱 심화되었고, 정치에 관여했던 많은 기독교 인사들은 더욱 비소통적이고 부패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하여 처음부터 잘못 꿰어진 선교사들의 해석 대신에 1907년의 원기억에서 새로운 기억의 가능성을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을 해체, 처벌하지 않고 계승하고자 한다면 말입니다.

1997년 이후 한국은 모두가 서로 경쟁자가 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승자에게는 엄청난 보상이 선사되고 패자에게는 무자비한 징벌이 부과되었습니다. 그 무렵 사회를 풍미했던 ‘부자되기 열풍’은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최후까지 살아남는 자의 미덕에 탐닉했고 그것을 위해 몸을 불사르도록 책동시켰습니다.

한데 그런 서바이벌 게임의 판타지가 무너지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한병철 씨가 피로사회에서 말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몸을 불사르며 열정을 다해 달리던 사람들 누구도 서바이벌 게임의 승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얻은 것은 피로증후군 같은 신체와 정신의 질병이었습니다. 게다가 한병철 씨가 생각 못했던 현상도 일어났습니다. 서바이벌 게임에서 퇴출되어 자신을 불태울 노동의 현장 자체가 없는 이들이 피로증후군에 해당하는 스트레스 증상을 더욱 더욱 심각하게 앓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스트레스 증후군은 분노를 일상화한다. 이 분노는, 마치 1907년의 ‘전후(戰後)’처럼, 이유도 근거도 없이 타자를 향해 퍼부어집니다. 일상의 폭력과 테러가 횡횡하는 사회,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폭력과 테러를 가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상처들이 넘쳐나고 분노와 증오가 남발되며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는 사회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세상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한데 오늘 우리의 교회는 동성애 혐오주의자로서 혹은 마초적 과잉남성주의자로서 혹은 극단의 반공주의자로서 분노와 공격성의 화신이 되고 있습니다. 한데 여기에는 1907년의 원기억이 ‘실종’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전후의 상처들이 해소되고 이웃과 화해하는 사건, 그리하여 자기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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