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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정보: 바울신학가이드3]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주의 - E. P. 샌더스의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읽기 (한수현)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3. 9. 17.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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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3]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주의

E. P. 샌더스의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읽기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출 20:2). 왜 십계명이 오경의 처음부터 기록되지 않았을까? 이런 비유가 있다. 이렇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비유는 다음과 같다: 한 왕이 마을로 가서 주민들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의 왕이 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사람들은 그에게 “우리가 당신을 섬겨야 할만큼 우리에게 뭔가 주신 적이 있습니까?” 라고 말했다. 그럼 그 왕은 어떻게 해야 할까? 왕은 성벽을 만들고, 수로를 만들어 물을 공급하고, 전쟁에서 싸웠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물었다. “내가 너희의 왕이 될 수 있느냐?” 주민들이 말했다. “물론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로 부터 구하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만나를 주시고, 우물을 만드시고, 매추라기를 주셨다. 이스라엘을 위해 아멜렉과 싸우셨다. 이제 그가 이스라엘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희들의 왕이다.” 그러자 그들은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메킬타-출애굽기에 대한 랍비의 해설- 중)

 

 

    지난 웹진에서 1 세기의 랍비문학을 소개했다. 위의 인용은 메킬타, 출애굽기에 대한 미드라쉬중 하나이다. 오경의 내용들에 랍비들은 이처럼 설명을 곁들여 기록하였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역사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또는 필요에 의해 여러 방법으로 설명한 기록들이 랍비들의 문헌이고 이러한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한마디로 하면 말씀과 말씀에 대한 해석에 목숨을 건 민족이 바로 유대민족들이다.  E. P. 샌더스는 이전 웹진에서도 소개했듯이, 1세기의 유대교를 순수하게 율법을 준수함으로 구원받는 종교라는 전통적인 이해에 도전하면서, 1~2세기의 유대인들이 남긴 문헌들을 연구해 유대교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정립한 학자이다. 이번 글에서는 샌더스의 방법론과 그의 연구 결과들을 그의 책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을 중심으로 살펴 볼 것이다.
    샌더스의 연구 결과가 전통적인 1세기 유대교의 이해를 바꾸어 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긴 했지만, 샌더스는 전통적인 이해에 대한 반론을 펴는 형식으로 연구를 진행하지 않는다. 즉, 이러 이러한 문헌학적 증거들이 있으니 전통적인 이해는 틀렸다는 방식이 아닌 것이다. 적어도 랍비 문헌에 대해서는 이러한 방법은 좋지 않다는 것을 샌더스도 알고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일단 랍비 문헌의 기록자들이 조직신학을 하듯 체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러한 담론을 추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전통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철저한 율법주의적인 가르침들을 찾으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는 가르침들도 많은 것이다. 복음서에도 율법에 대한 철저한 준수를 예수가 가르치기도 하지 않았던가.(마 5:17-20) 샌더스는 논쟁의 한복판에서 살짝 물러서서 두 개의 커다란 체계를 비교해보자고 한다. 바로 바울의 서신들과 당시의 유대문헌들이다. 결국 유대주의에 대한 오해의 논쟁이 일어난 계기가 바울서신의 이해로부터 파생된 것이므로 바울서신과 유대문헌과의 관계에 촛점을 맞추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두 개의 문헌들을 비교할 것인가?
    샌더스는 ‘종교적 패턴’ (Pattern of Religion)을 비교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한다. 바울서신들이나 유대문헌들을 무작위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 다 하나의 주제나 체계에 대한 서술들이 아니고 특히나 유대문헌들은 그 저자와 저작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샌더스는 거창한 조직신학적 신론, 우주론 등등의 체계를 먼저 세우고 그 둘을 비교하기보다 ‘종교적 패턴’ 다시 말하면, 종교의 참 역할에 준하는 ‘구원론’에 그 역점을 두고 둘을 비교할 것을 제안한다.[각주:1] 여기서 샌더스가 말하는 ‘종교’라는 의미가 유대교와 기독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리교’와 ‘장로교’라고 하는 것이 어울린다. 두개의 교파가 가지고 있는 ‘구원론’이 같은가 또는 다른가? 라고 물을 때 그 둘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좀 더 명확하게 보인다고 샌더스는 생각했다. 결국, 어떻게 구원을 이해하고 있는가를 보자는 것인데, 이 방법으로 샌더스는 1~2세기의 유대교가 가지고 있던 구원에 대한 생각을 상당히 설득력있게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유대교와 바울 서신을 바라보기 위한 렌즈의 촛점을 ‘구원론’에 제한함으로써 샌더스의 연구는 분명한 한계를 처음부터 가지게 된다. 그 한계는 그 후의 연구에도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논하기로 하겠다.
   
    탄나틱 문헌 (Tannaitic Literature)
    이른바 랍비들 (보통은 율법선생들이라 불리는)이 남긴 기록들을 읽음에 있어서 먼저 샌더스가 짚고 넘어가는 것은 이른바 랍비들과 신약성서의 바리새인들이 같을 것이라는 생각은 오해일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의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과 경쟁하는 하나의 정치적 모임내지는 집단으로 표시되며, 예수의 비유속에서 정결법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하며 안식일 준수 등에 상당히 경직된 이해를 보여주지만, 랍비들이 하나의 공동체나 분파를 형성하여 자신들을 다른 이스라엘인들과 구별된 존재라고 생각했다는 증거를 찾기 힘들다.(바리새란 말은 ‘분리되었다’는 뜻이다.)
    바리새주의라는 표현에서 벗어나서 랍비들의 문헌들을 살펴보면, 랍비들의 오경의 이야기에 대한 주석인 학가다(Haggadah)는 많은 부분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심에 대한 질문과 설명에 그 촛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정하셨는지에 대한 이유는 중요한데 여기가 바로 이른바 ‘공로주의’에 대한 첫번째 논쟁점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자신의 백성으로 만들었는가? 세가지 대답이 존재하는데 첫번째는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계약에 응답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아브라함 등의 선조들의 믿음 덕분이고, 세번째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각주:2] 언뜻 보면 처음 두가지에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뭔가 내세울 것이 있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랍비들의 말은 한결같다. 처음에 필자가 인용한 이야기를 기억해보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기 위해, 즉 이스라엘의 대답 또는 믿음을 얻기 위해 먼저 무엇인가를 하셨다는 것이다. 즉,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셨나는 질문에는 여러 다양한 대답이 존재하는데, 그 안에는 하나의 큰 동의가 랍비들 사이에 있다.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그의 자비로움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각주:3]
    하나님의 은혜 다음에 ‘그의 이름을 위해’(For his name’s sake) 율법이 주어졌다. 하나님의 왕되심이 먼저이고 왕과 백성의 관계안에서 주어진 율법을 준수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왕과 백성의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바로 율법에 대한 행함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자연스럽게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는 상급과 벌을 통하여 유지된다. 이를 샌더스는 ‘계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 보통 언약적 율법주의라고도 함.)라 불렀는데, “언약적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서 자신의 자리가 계약에 기초하여 세워지는 것을 뜻한다. 이 계약은 적절한 응답을 필요로하는데, 이는 율법에 대한 순종이다. 계약안에는 불순종을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도 들어있다.”[각주:4]
    순종과 불순종, 바꾸어 말하면 율법을 행함과 위반은 구원에 대한 조건이 되지 않는다. 이는 상급과 벌에 대한 조건일 뿐이며 그 목적은 구원과 심판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계약 안에 머물러있게 하기 위한 방편이다. 하나님의 상급은 언제나 하나님의 징계보다 크고,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정의를 뒤덮는다는 것이 랍비들의 하나님에 대한 기본 입장이다.[각주:5]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실 때 그 개인과 맺은 것이 아니라 그 백성 전체와 맺으셨으므로 장차 올 세상에서 모든 이스라엘은 함께 그 영광을 누릴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필수적으로 전재되어야 하는 것이 ‘속죄론’ (Atonement)의 확립이었다. 이스라엘에게 ‘속죄’란 율법을 어겨 하나님과의 계약 밖으로 벗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행하는 생활속 규범이었는데, 예루살렘의 멸망이후에 ‘희생 제사’의 기능이 사라지고, ‘회개’(Repentance)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다.[각주:6] 이는 랍비적 유대주의가 성전을 잃어버린 후 ‘회개’ 등의 방법으로 하나님과의 계약에 머무를 수 있는 방편들을 제공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당시의 랍비적 유대교에서 중요한 것은 행함이 아니라 의도였음을 알 수 있다. 실수에는 그를 만회할 수 있는 ‘회개’의 길이 있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은 전체 이스라엘에게 해당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하나님의 계약안에 머무르려 하는 의지와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려 하는 의지가 행함이라는 방편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바로 당시의 유대교 신앙이었다는 것이다.

     사해사본 (Dead Sea Scrolls)
     한 이름없는 목동이 1946년에 사해에서 1마일 정도 떨어진 한 동굴에서 7개의 두루마리를 우연히 발견하였을 때, 이 발견이 성서학에 미칠 엄청난 영향을 상상이나 하였을까? 약 10여년간의 발굴끝에 학자들은 발굴된 사본들중 40%가 히브리 성서 (구약성서)에 가장 오래된 사본들, 30%는 제2성전기의 문서들(Book of Enoch, Jubilees, the Book of Tobit, the Wisdom of Sirach, Psalms 152-55 등), 그리고 나머지는 이른바 후대에 쿰란 공동체라고 불리우는 이들이 기록했던 문서들임을 밝혀내었다. 그 중 이 공동체의 문서들로는 공동체 규정집(Community Rule), 전쟁 문서(War Scroll), 하박국 주석(Pesher on Habakkuk), 그리고 축복에 대한 규정(The Rule of the Blessing) 등이 있다. 첫번째 동굴에서 나온 문서들이 쿰란공동체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보통 첫번째 동굴의 자료들을 부를 때 숫자 1을 붙이고, 쿰란을 뜻하는 Q를 붙이고, 공동체 규정집에는 S, 전쟁문서에는 M 등을 붙여서 1QS(Community Rule), 1QM(War Scroll) 등으로 표시한다. 샌더스가 주로 사용한 자료들은 위의 자료들인데, 쿰란공동체의 구원론을 탐구하기 위해서 그들이 어떻게 선민이 되었는지와, 구원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였다.
    과연 쿰란공동체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것은 아직 논쟁중에 있다. 전통적으로 에세네(Essene)파였다는 이론이 힘을 얻었고, 이들이 바로 요세푸스가 말한 에세네파였고, 그 영향을 받은 것이 세례요한이며, 예수는 세례요한의 제자였다는 이론으로 발전되어 예수의 정체성과 복음에 대한 이해를 쿰란문서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재구성하려 하였다. 이후에 이에 대한 반론이 생겨나면서 쿰란공동체는 예루살렘의 제사장 무리에서 밀려난 사독계의 제사장 중심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였다는 이론이 힘을 얻기도 하였다. 쿰란 공동체의 자료들의 연대가 공동시대 이전 (주전) 408년부터 공동시대 이후 (주후) 318년까지 걸쳐 있는 것으로 보아 남유다가 바빌론에 의해 멸망한 이후 (BCE 587) 시작된 제2성전기의 유대주의에 대한 중요한 연구자료로서 인정되고 있다. 연속되는 제국의 압제의 시대를 살았던 한 유대교 종파가 가졌던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이해는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하는 데 큰 단초를 제공할 뿐 아니라 1~2세기의 유대교가 가질 수 있는 종교적 이해에 대한 단면을 보여줌으로써,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유대주의를 그려내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샌더스는 믿고 있다.
    전통적인 사해문서에 대한 연구에서, 이들이 하나의 분파(Sect)를 형성하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다른 문서들에 비해 엄격한 규율의 행함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쿰란공동체를 통하여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에서 율법주의적인 종교로 변화하게 되는 문헌적 증거를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샌더스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계약’의 의미가 무엇이고 어떻게 구원을 이루어가는지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사해사본을 들여다고 보고 있다.
    쿰란공동체는 그들이 새로운 계약(A New Covenant)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계약은 당시의 예루살렘이나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샌더스는 그들이 말하는 새로운 계약이란 이스라엘의 다른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계약과 다른 것이 아니라 원래의 계약에 숨겨져 있던 의미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완전히 새로운 계약을 그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원래 모세 등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계약에서 다시 찾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각주:7] 그러므로 계약 그자체는 연속적으로 이어져 왔으며, 중요한 것은 계약의 숨겨진, 또는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결국 새계약과 그에 따른 규율을 행함이 공동체가 이해했던 종교적 구원론의 핵심이 아니라, 여전히 계약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통해 계약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에 있다. 즉, 랍비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계약의 이해가 이들에게도 있었다는 것이다.[각주:8]
    이들이 자신들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계약의 의미를 나타내셨다고 믿었고, 이와는 달리 이스라엘의 많은 수가 하나님과의 계약에서 등을 돌렸다고 생각했고, 게다가 계약속에서 엄격한 규율들을 통해서 자신들을 ‘의인’(the righteous), ‘빛의 아들들’(the sons of light), ‘진리의 아들들’(the sons of truth)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샌더스는 그들이 자신만이 옳고 다른 이스라엘은 틀렸으며 자신들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그들은 최후의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선택된 자들이며[각주:9] 이들은 옛 이스라엘의 죄를 위하여 기도했던, 제사를 지냈던 제사장들 집단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최후의 전쟁 이후에 쿰란 공동체는 자신들 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이스라엘이 살아남아 쿰란공동체를 통하여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는 것이다.[각주:10] 계약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새계약에 대한 이해를 얻는 개인의 회개의 결단을 중요시하게 된다. 이와 함께 쿰란 공동체는 이러한 개인의 결단마저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는 예정론을 발전시킨다. 이 예정론의 정수는 칼빈의 예정론처럼 구원의 섭리가 바로 하나님에 은혜에 있다는 이해를 위한 하나의 방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쿰란공동체가 개인의 결단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랍비적 유대교처럼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중심을 두고 있고, 그를 통한 계약을 중심으로 율법이 뒤따르고 이러한 율법적 행함이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한 응답으로 작용되고 이를 통하여 신자는 계약속에 온전히 머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음을 샌더스는 사해사본의 포괄적 읽기를 통하여 증명하고 있다.[각주:11]

    외경과 위경
    샌더스는 여러 외경과 위경중에서 다음의 5권을 선정한다. 벤 시라(Ben Sirach), 에녹 일서(I Enoch), 희년서(Jubilee), 솔로몬의 지혜서(The Psalms of Solomon), 에스라 사서(IV Ezra). 그 이유는 이 문서들이 공동시대 이전 200 부터 이후 200 사이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쓰여진 유대문헌이며 기독교 공동체의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각주:12]

벤시라 
벤시라서는 여전히 강력한 하나님의 택정하심에 대해 강조하며,[각주:13] 개인보다는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각주:14] 여러 방면에서 라비직 유대주의와 비슷한 구원론을 보여준다.[각주:15]

에녹 1서
흥미로운 것은 에녹 1서의 의인은 절대 실수하지 않는다.[각주:16] 그렇기 때문에 회개에 대한 명확한 말들은 나오지 않는다. 불의한 자들은 의인들과 대적하고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며 결국 마지막 날에 심판받게 된다. ‘의인’들은 ‘진정한 이스라엘’ 또는 ‘선택받은 자들,’ ‘거룩한 자들’로 칭해지는데 ‘의인들’이건 ‘불의한 자들’이건 개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개인의 행위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이다. 선택받음에 대한 강한 강조와 그들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계약에 대한 생각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각주:17]

Jubilees 희년서
희년서라고 불리는 쥬블리는 보통 공동시대 100 이전에 쓰여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계약에 관한 명확한 언급이 눈에 띈다. 계약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은 계약을 간직하는 역할을 하고(희년서 15: 11) 공동체 사이의 율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36:8-11)이다.[각주:18] 게다가 희년서는 반복해서 구원은 계약에 대한 소속과 충성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한다.[각주:19] 율법을 어기게 되면 회개를 통해 계약의 백성을 지위를 허락받을 수 있지만, 특이하게도 희년서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의 목록이 나오는데, 이는 바울에게 반대했던 예루살렘 공동체가 지키고자 했던 할례와 안식일, 그리고 피와 함께 고기를 먹는것과 성적 타락 등이 기록되어 있다.[각주:20] 이러한 변화는 이방세계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시도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본적인 패턴은 라비닉 유대주의와 그리 다르지 않다. 때로는 엄격한 율법주의의 일면을 보여주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문서 전체를 통해 강조하고 있고, 하나님의 구원이 개인의 행위에 달린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선택에 달린 것임을 강조한다.[각주:21]

솔로몬의 잠언 (The Psalms of Solomon)
다수의 저자들에 의해 공동시대 (주전) 1세기에 히브리어로 쓰여진 솔로몬의 잠언서는 라비닉 유대주의와 가장 유사한 구원론을 보여주는데,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그의 선택한 백성에 대한 구원을 강조하고 있다.[각주:22] 계약은 구원의 기초이며 오직 회개없는 죄악만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근거가 된다.[각주:23]

4 에스라 (IV Ezra)
에스라 사서는 외경과 위경 중에서 당시의 유대교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다. 에스라 사서는 개인의 구원을 말하며 그 속에서 계약적 율법주의는 내파되고 오로지 율법주의적 완전주의만이 남는다.[각주:24]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율법의 행함을 통한 의를 강조한다. 쿰란 문서에서 선택받은 자들도 연약함으로 인해 죄를 짓지만 그 연약함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에스라 사서에서는 그러한 연약함으로 짓는 죄로 인한 멸망을 말하고 있다.[각주:25] 이러한 완전주의적 율법주의는 많은 학자들에게 유대주의가 율법주의적 종교로 변하는 증거라고 받아들여져 왔으나, 샌더스는 에스라 사서의 독특성이 전체 유대주의의 성격을 대변한다는 증거는 오로지 에스라 사서 자체밖에는 없으며, 이를 하나의 유대주의로 볼 수는 있지만 1-2세기 유대주의의 보편적인 특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샌더스는 에스라서가 율법주의를 말하기는 하지만 율법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행함은 계약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며, 이는 율법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또는 은혜를 입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각주:26]

    결론적으로 400페이지에 달하는 긴 연구끝에 샌더스는 1-2세기 유대주의는 율법주의라기보다는 계약주의라고 보는 것이 옮으며, 율법은 이 계약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기에 이를 종합하여 계약적 율법주의(또는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이름하였다. 당시의 여러 유대교 문헌의 요점은 어떻게 계약적인 의무를 이행할 것인가의 문제였던 것이다.

    “자비와 정의에 관한 두가지의 다른 이해가 형성되었는데, 하나는 라비닉 유대주의에서 하나님의 자비는 그의 정의보다 크다는 것이고, 다른 문헌들에서는 악한 자는 그의 행위에 준하는 벌을, 선한 자에게는 자비로 응답함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각주:27] 그러므로 벌과 자비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배풀기 위한 방편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계약적 율법주의란 “1)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2)율법을 주셨고, 율법은 3)하나님의 택정하심에 대한 약속과 4)율법에 대한 준수를 의미한다. 5)율법은 속죄의 도구로 베풀어 졌고, 6)속죄는 계약적인 관계를 유지 또는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7)복종에 대한 계약 안에 머무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모두 구원받을 것이다.”[각주:28]

    바울의 종교적 패턴 (바울의 구원론)
    앞으로의 원고는 바울에 대한 것이 주를 이룰 것이고, 자연스럽게 바울서신의 여러 내용들이 쟁점화될 것이므로 샌더스의 바울 이해를 세심하게 살피지는 않을 것이다. 몇가지 요점을 중심으로 샌더가 생각한 바울의 구원론을 알아보자.
    바울을 말하기 전에 샌더스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바울 시대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주의가 가지고 있었던 구원 이해를 계약적 율법주의라는 단어로 정리하였다. 그러므로 바울 신학의 원류를 율법주의적 신앙으로 잡는 것은 그의 선택지에 이미 없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말한다면 율법주의적 신앙이 가지는 문제점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얻는 의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럼 핵심은 바로 믿음으로 얻는 칭의일 것이다.[각주:29] 샌더스는 이를 뒤집고, 예수 그리스도를 제일 먼저 제시한다. 즉, 예수가, 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바울신학의 출발점이다. 문제로부터 해결책으로 나간 것이 아니라, 해결책을 만났고 그 안에서 문제들을 재발견한 것이다.[각주:30] 갈라디아서 2장 21절은 이런 바울의 심정을 잘 나타내준다. ‘만약에 의가 율법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된 것.’ 바울은 예수와 부활을 토대로 역으로 칭의와 구원의 의미를 밝혀나간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의 구원관, 교회관, 신앙생활에 대한 원칙들은 예수를 떠나서는 설명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인 바울에게는 보편적 구원론의 확립을 위해서 예수를 선택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러나 거꾸로 예수를 통해서 새로운 구원을 발견하게 되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자연스럽게 예수 이후의 바울에게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그리 다르지 않은 상황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원에 대하여 평등한 입장을 가진다는 것은 선택받은 민족의 일원으로서 계약적 율법주의 안에 있었던 바울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이 또한 예수를 출발점으로 볼 때 이해될 수 있다.[각주:31] 그러므로 바울의 구원론을 정리하자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주 그리고 세계의 구세주로 정하셨고, 그를 믿는 자는 미래의 완전한 구원의 증표로 성령을 얻고, 현재의 주님의 몸된 교회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성령과 하나되어 생활하며, 그들이 속한 성령 또한 그리스도를 주로 섬긴다.”[각주:32]
    이러한 바울의 구원론에 중심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예수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확립된 구원론에 행함보다 ‘믿음’이 강조되는 이유또한 바울의 구원론의 출발점이 예수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믿음’이 바로 믿는자/불신자를 나누는 중심점이 된다. 바울의 구원론의 출발점이 예수로부터 시작하여, 유대인과 헬라인을 거쳐,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결과로 샌더스는 바울에게서 율법폐기론이 나온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의 스승 W. D. 데이비스의 바울 이해에 대립각을 세운다. 데이비스는 바울의 예수 이해는 전통적인 유대주의의 메시아를 좀 더 급진화시킨 것이라고 생각한 것에 반해 샌더스는 그 어떤 유대교의 이해에도 메시아가 율법을 폐기한다고 하는 기록은 없다고 하면서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당시의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와는 다른 종교적 패턴, 또는 구원론을 구현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각주:33] 또한 샌더스는 데이비스가 이야기했던 바울의 구원론이 새로운 언약에 기반한 계약적 율법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반하여, 결정적으로 바울이 계약적 율법주의와 다를 수 밖에 없는 두개의 이유를 제시한다.
    비록 여전히 바울의 구원론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그 기반을 두고 있으나, 첫째, 바울의 ‘새로운 피조물’ (고후 5:17; 갈 6:15)은 모세의 계약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아담에 대한 것이다. 즉, 최초의 인간와 예수의 대조는 바울의 계약에 대한 인식이 전통적인 유대교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바울의 구원론은 계약적 율법주의의 핵심인 계약안에 머무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로운 삶을 구현하며 새로운 피조물로써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다. 머무름 (Remaining) 이 아니라 옮기워짐 (Transferring)이 바울의 핵심이다.[각주:34]
 
    샌더스, 이전의 바울 연구에 마침표를 찍다.
    1-2세기 유대교에 대한 샌더스의 연구의 결론인 계약적 율법주의가 바울신학연구에 미친 여파는 점점 울리고 퍼져 이제는 복음주의 계열에서도 비판적 수용이든 전적인 비판이든 어떠한 형식으로든 반응하게 만들고 있을 정도이다. 샌더스 이전에는 헤겔을 품은 신약신학이든, 하이데거를 전유한 불트만의 신학이든, 복음주의나 근본주의 신학이든 하나의 거대한 동의(Consensus) 하에서 바울신학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기독교는 유대교의 모순에서 출발한 종교라는 것이었다. 이를 기독교 우월주의 (Supersessionism)이라 부른다. 기독교가 확장함에 따라 이 거대한 우월주의는 타종교들을 불교 또는 이슬람교, 율법주의적 유대교라는 틀 안에 묶고, 기독교가 이들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입장을 개진하는 데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샌더스의 연구로 이러한 흐름에 빨간불이 켜지게 된 것이다. 샌더스의 대답은 단순명료하다. 그 둘은 ‘다르다’이다. 그 둘은 다를 뿐 변증적 관계, 즉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 둘 사이에는 연속된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써 그 이전까지 바울신학의 거대한 주제를 이루었던 유대교에서 발전한 기독교, 또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의 변증법적 변화 도식은 어떤 의미에서 그 영향력을 마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샌더스의 연구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같다는 의미가 아니었으므로, 그 이후의 학자들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과연 바울 복음의 기원은 대체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유대교가 기도교의 동인이 아니라면 무엇이 바울을 유대교와는 다른 구원론을 말하게 한 것인가? 이 질문을 시작으로 바울신학의 새관점이라는 연구 흐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바울신학의 새관점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비록 유대교가 바울이 묘사하는 그림에 합당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바울이 말하고 있는 유대교에는 그것이 오해든 무엇이든 율법주의적인 성향이 분명히 존재하며, 결국 바울의 복음은 이러한 율법주의적 구원론에 대한 반론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바울신학은 전통적으로 말해온 바울 복음의 보편성을 다시금 획득하려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를 새관점주의에 반하는 흐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샌더스의 연구를 받아들이고, 바울신학의 기원에 대한 재탐구를 시도하는 신학적 흐름이 있다. 이 흐름은 일반적으로 바울의 새관점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불리는 제임스 던(James Dunn)이나 좀 더 복음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는 톰 라이트(N. T. Wright)의 연구로 발전하게 된다. 필자가 보기에 이들은 샌더스의 연구를 받아들이지만 정작 계약적 율법주의 자체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주제는 바울 신학의 기원에 대한 탐구에 있다. 다음 웹진에 차례로 소개될 제임스 던과 톰 라이트에 대한 글은 그들의 연구가 어떻게 기독교의 정체성을 바울에게서 다시 찾아가는지에 촛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세번째로 좀 더 급진적인 바울신학의 연구 흐름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연속성에 촛점을 맞추고 샌더스의 유대교에 대한 연구를 받아들이되 샌더스의 바울해석에는 반기를 드는 그래서 유대주의와 기독교의 벽을 허물고 화해를 시도하는 흐름이 있다. 이는 샌더스 이전의 그의 스승 데이비스에게서 이미 시작된 것으로 로이드 가스턴(Lloyd Gaston), 마크 나노스(Mark Nanos), 케티 에렌스퍼거(Kathy Ehrensperger) 등이 이러한 흐름에 속한다.
    네번째로 기독교 우월주의의 족쇄에서 벗어난 것을 계기로, 전통적으로 강조되어 오던 바울 신학의 주제들(속죄론, 교회론, 구원론) 등에서 벗어나 바울을 종교적 테두리 밖으로 데리고 나와 좀 더 넓은 지평에서 바라보는 흐름이 있다. 이 연구들의 공통점은 바울 신학의 기원을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제국의 정치적 콘텍스트에서 바라본다는 점이다. 1-2세기의 사회와 문화를 지배했던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와 종교의 틈바구니에서 종교와 정치를 분리해서 이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는 것에 착안해서 바울의 메시아적 종말론이 왜 발현되게 되었고, 그 종교, 사회,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이 이 흐름의 전반적인 목적이다. 탈식민주의, 맑스주의, 여성주의 등 정치신학적 관점들이 주를 이룬다. 특히나 2000년대에 들어와서 바울의 정치적 관점(Fresh Perspective),[각주:35] 바울과 제국(Paul and Empire), 바울과 탈식민주의(Paul and Postcolonialism) 등이 현재 바울학계에서 통용되는 주제들이다.
    다섯번째 흐름은 바울과 철학(Paul and Philosophy)라는 이름으로 학계에 유통되고 있는데, 현재의 지구화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바울에게서 찾는 것으로 슬라보예 지젝 (Slavoj Žižek),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등이 이에 속하며, 데리다를 통해 네번째와 다섯번째의 흐름을 종합한 테오도르 제닝스(Theodore Jennings)가 이에 속할 것이다. 이상 다섯까지의 흐름은 필자의 생각이며 두번째부터 마지막까지 순차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앞으로의 [바울신학가이드]의 얼개가 될 것이다. 앞으로의 긴 여정에 독자들의 관심을 기대해 본다.

ⓒ 웹진 <제3시대>

 

 

  1.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a Comparison of Patterns of Religio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7), 16–18. [본문으로]
  2. Ibid., 87. [본문으로]
  3. Ibid., 99. [본문으로]
  4. Ibid., 73. [본문으로]
  5. Ibid., 123-124. [본문으로]
  6. Ibid., 177. [본문으로]
  7. Ibid., 240. [본문으로]
  8. Ibid., 241–243. [본문으로]
  9. Ibid., 245. [본문으로]
  10. Ibid., 247. [본문으로]
  11. Ibid., 320. [본문으로]
  12. 바룩 2서는 4 에스라서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므로 제외되었다. [본문으로]
  13.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329. [본문으로]
  14. Ibid., 333. [본문으로]
  15. Ibid., 341. [본문으로]
  16. Ibid., 361. [본문으로]
  17. Ibid. [본문으로]
  18. Ibid., 364–365. [본문으로]
  19. Ibid., 367. [본문으로]
  20. Ibid., 370. [본문으로]
  21. Ibid., 375. [본문으로]
  22. Ibid., 389. [본문으로]
  23. Ibid., 408. [본문으로]
  24. Ibid., 409. [본문으로]
  25. Ibid., 418. [본문으로]
  26. Ibid., 420. [본문으로]
  27. Ibid., 421. [본문으로]
  28. Ibid., 422. [본문으로]
  29. Ibid., 437. [본문으로]
  30. Ibid., 443. [본문으로]
  31. Ibid., 443–444. [본문으로]
  32. Ibid., 463. [본문으로]
  33. Ibid., 496–497. [본문으로]
  34. Ibid., 514. [본문으로]
  35. 비록 이 이름은 톰 라이트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필자는 라이트를 네번째 카테고리에 넣지 않는다. 그 이유는 톰 라이트를 다룰 때 설명할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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