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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왜, 한신대는 ‘해석학과 윤리’를 개설했을까?(하) (이상철)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4. 2. 28.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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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신대는 ‘해석학과 윤리’를 개설했을까? (하)
: 이 냉소의 시대에 신학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상철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윤리학 박사 과정)

 

‘유학하던 10년간 대한민국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지난 웹진 58호 원고는 마감되었다. 바로 그 잃어버린 10년을 추적해 들어가면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해석의 틀을 전반적으로 검토해보고, 지난 10년간 이루어졌던 윤리적 지형의 변화를 회고하면서 어떻게 신학은 반응할 수 있을지를 예단하는 것은 이번 봄 학기,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개설되는 <해석학과 윤리>의 몇 가지 주된 강의 목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너무나, 너무나도 윤리적인 Korean!

우리가 얼마나 윤리에 정통한 국민인가? 우리는 초등학교 6년 (바른 생활)-중학교 3년(도덕)-고등학교 3년(국민윤리), 총 12년의 공교육 기간 동안 국가주도하에 체계적이고도 주도 면밀한 윤리교육을 받은 백성들이다. 필자가 지금 윤리학 Ph.D 7년 차인걸 감안하면, 12년 동안 윤리교육을 받은 대한민국 국민들은 가히 모두 윤리학 분야 박사들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있어 ‘바른 생활’과 ‘도덕’과 ‘국민윤리’는 학창시절 각종 시험 때 마다 평균점수를 올리는 전략과목으로써 달달 외워 빈칸을 메우거나, 선생님의 구미에 맞는 적당한 말을 해주면 점수를 얻는 그런 하찮은 과목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로 시작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워 쓰면 되었고, 중학교때는 국민교육헌장을 통째로 암기했으며, 고등학교때는 7.4 남북공동성명부터 전두환 정권의 통일 정책이라 할 수 있는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에 이르기까지 남한의 평화적 통일 정책이 지닌 장점을 북한의 적화통일 정책과 비교하며 남한의 손을 들어주면 그만이었다. 재수할때는 노태우의 6.29 선언의 의미를 쓰라던 문제도 윤리 모의고사 문제에 등장했었다.

이론적으로도 꽤 충실하여 ‘서양윤리사상의 흐름’과 ‘동양윤리 사상의 흐름’이 고등학교 국민윤리 교과서 Chapter 3장, 4장쯤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특별히 ‘서양윤리사상의 흐름’편을 보면 20-30페이지 남짓한 분량에 소크라테스부터 미국의 프래그머티즘까지 100명쯤 되는 철학자들의 이름이 현란하게 파워포인트 넘기듯 스쳐 지나갔었다.

당시에 있었던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지금도 외우고 있는 칸트의 유명한 정언명법인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보편 타당한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위하라!’는 고2 어느 기말고사 주관식 3번 마지막 문제의 답이었는데, ‘네 의지의 준칙’을 ‘내 의지의 준칙’이라 썼다고 틀렸던 뼈아픈 기억이 있다. 윤리시험이 아니라 받아쓰기 시험이었던 게지. 어쨌든 그렇게 우리는 초, 중, 고 12년 동안 닦고 조이고 기름칠 해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윤리전문가가 되어 사회로 진출하는데…

대한민국 사회에서 윤리가 지닌 출생의 비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사실은, 세계에서도 드물게 철저한 윤리교육을 받은 시민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사회는 너무나도 윤리적이지 못한 음란한 사회라는 점이다. 이유가 어디 있을까? 왜 우리는 윤리를 그토록 오래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가히 뼛속까지 윤리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윤리적이지 않을까? 혹여, 대한민국 사회에서 윤리란 어떤 말하지 못할, 말해서는 안 될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혹은 대학입학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풀렸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윤리란 체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수호하는 도구로, 체제에 반하는 주의나 주장을 자행하는 개인이나 단체를 구별 짓는 잣대로, 아울러 그들을 단죄하는 형벌의 근거로 작동해 왔다.
 
현 대통령의 아버지가 이 땅을 지배하던 시절, 그녀의 아버지는 유신헌법을 선포하면서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쓰며 백성들을 헷갈리게 했었다. 언뜻 보면 보편적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는 듯한데, 실상은 정반대다. ‘한국적’라는 개별성으로 ‘민주주의’라는 보편성을 포획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분단, 반공, 개발, 경제…등과 같은 당시 한국 상황의 특수성을 위해 민주주의를 제단에 헌납하겠다라는 선언이 유신헙법이었고 유신체제라고 한다면 내가 너무 유신체제를 편협하게 바라보는 것일까? 

이렇듯 민주주의가 ‘한국적’이라는 재단에 열납되듯이, 우리에게 있어 윤리란 ‘국민의 윤리’였다. ‘한국적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사실이 종개념이고, ‘윤리’는 매개념에 불과하다. 그 대한민국의 국민이란 분단체제 아래서 반공을 국시로 삼아야 하는 국민이고, 그 국민이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거대담론 아래 질서정연하게 줄 맞춰 삽질해야 하는 국민이며, 그 국민은 이제 자본의 재단에 몸과 마음을 기꺼이 맡겨야 하는 국민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윤리란 이런 국가적 이데올로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던 정말 하찮았던 과목이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윤리가 갖고 있는 출생의 비밀이고, 슬픔이다.

해석학과 윤리

그렇다면, 해석학과 윤리는 어떤 상관성이 있는 것일까?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역사적인 본문의 이해와 관련이 깊다. 저자와 독자(해석자)의 관점에서 text를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지평에서 해석은 발생하는지? 신학은 이러한 해석학적 통찰로부터 무엇을 가지고 올 수 있는지? 이상은 해석학과 연관되어 전통적으로 제기되어 왔던 대표적인 질문들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이 질문들은 해석학의 역사에 대한 통시적 접근을 불가피하게 요구한다. (이번에 개설되는 ‘해석학과 윤리’는 역시 슐라이이마허부터 레비나스까지의 해석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는 형식으로 진행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는 본문의 저자와 해석의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해석학적 긴장을 유발시킨 최초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해석학의 아버지라 불릴 만하다. 그는 해석자의 위상을 저자의 위치로까지 격상시켰다. 그리하여 해석학을 Text 이해의 문제, 즉 본문에 대한 해석의 차원을 넘어서, 이해(Verstehen)란 무엇인가? 라는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해석함’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팽팽한 긴장으로 인도한다. 
진리는 이성의, 이성에 의한 인식론적 개념 혹은 인식론적 과정이 아니고, 주체의, 주체에 의한 존재론적인 개념일 수 있다는 점, 이런 이유로 해석이란 진리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해석학적 경험이라는 점을 슐라이어마허는 말하고자 했고, 그의 시도는 이후 전개되는 다양한 해석학적 작업의 시금석이 되었다. 

이러한 해석학전 전환은 실천 철학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해석자로부터 타자적 위치에 있어왔던 Text가 우리에게 시비를 걸어와, 평온했던 우리의 삶에 균열을 조장하고, 확고했던 우리의 믿음에 혼동과 긴장을 유발시켜, 우리를 불온한 신자, 불온한 시민으로 내몰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이 해석학과 윤리가 만나는 경계이고, 바로 이런 이유로 윤리는 문제적이다. 
본디 윤리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지켜야 할 도리 혹은 규범을 찾는 학문이었다. 하지만 그 규범은 우리가 경험한 바로는 positive한 내용보다는 negative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 부정적 강제적 규범으로 말미암아 그나마 사회가 이정도 유지되고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아마도 이런 금지규범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십계명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윤리를 규범적 차원으로만 한정시키려는 시도는 윤리의 차원 중에서 가장 낮은 등급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윤리란 규범의 차원을 넘어 선택의 차원으로, 그리고 그 선택은 필연적으로 어떠한 대상과 사건에 대한 판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윤리의 어려움이 있고, 바로 그 곳에서 윤리는 해석학과 대화한다.

갖추린 Syllabus

규범이 집단주체의 것이라면, 윤리는 개별주체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전근대와 근대를 가르는 봉합선이었다. 근대적 주체란 자기들이 만들어 가야 할 세계의 빛나는 모습을 자신의 경험과 언어와 전통과 신화와 역사를 동원해 그려내고자 했던 주체였고, 근대적 윤리란 그런 개인의 확고부동한 서사를 뒷바침할 만한 주체의 행동강령을 모색하는 윤리였다. 이러한 근대적 주체에 대한 반성과 근대성의 윤리에 대한 회고를 하는 과정에서, 슐라이에르마허에서부터 리꾀르까지, 이른바 근대적 해석학이 걸어왔던 길과 겹치면서, 양자간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이번에 개설되는 <해석학과 윤리>의 전반부 과제다. 

하지만, 21세기, 오직 자본의 욕망만이 이 땅에 존재하는 세상에서 근대적 주체, 근대적 해석학이 만들어 놓은 tool은 자본이라는 유령을 해석하기에 뭔가 석연치 않는 부분이 많다. 이런 이유로 나는 현대의 윤리란 일차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투철하게 응시하는 시선의 산물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그리하여 강의 후반부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푸코와 데리다, 라깡과 지젝을 소환하고자 한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 본 강좌가 노리는 것은, 결국 타자의 해석학과 타자의 윤리학을 수강생들 스스로가 그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레비나스를 강의 맨 마지막에 배치하여 전체 강의를 마무리 하려고 하는데, 과연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에필로그

강좌를 진행하면서 수업시간에 논의되었던 이야기, 획득된 소득들, 남겨진 문제들에 대해서 웹진을 통해 소개할 것을 약속하면서 어설픈, 그리고 위태한 강의개요를 일단 접는다. 글을 쓰면서 내가 아직 얼마나 강의하기에 턱없이 준비가 안되어 있는 강사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수강신청 한 학생들 앞에서 최소한 面이 팔리지는 않아야 할 텐데…..요즘 매일 악몽을 꾼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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