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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바울신학가이드8] 바울과 탈식민주의III - 탈식민주의, 바울, 그리고 여성 (한수현)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4. 6. 6.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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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8]

바울신학과 탈식민주의III

- 탈식민주의, 바울, 그리고 여성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필자가 다니는 CTS (Chicago Theological Seminary)에서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을 가르치는 수잔 띠쓸트웨잇 (Susan Thistlethwaite) 교수는 신학교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학자중의 한명이다. UN이나 각종 세계 평화회의에 주요 패널로 참석하기도하고 정치권이나 각종 TV 토론 프로그램에도 얼굴을 비친다. 교회의 각종 강연에서 진보적 신학의 필요성과 여성의 관점에서 교회의 복음등이 재해석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녀가 이야기 해준 여러 재미있고도 의미심장한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해본다. 어느날 교회에서 강연하던 중 어느 한 화난 여성의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뜨쓸트웨잇 교수의 강의에 화가 났는디 일어나서 열심히 성서는 그런식으로 읽혀져서는 안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방식으로 그렇게 재단하면 안된다는 흔하다면 흔한 그러나 쉽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녀에게 답한 띠쓸트웨잇 교수의 말 “그래요? 그럼 제가 당신이 원하는 방식인 성경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거기 여성분! 입 다무시고 앉으세요! 고린도전서 14장의 말씀입니다.” 좀 심하다 싶지만 어쩌면 오늘의 우리가 성스럽게 생각하는 성서가 얼마나 여성차별적인 시각에서 쓰여졌는지 가르쳐 주는 이야기이다. 필자는 오늘 탈식민주의와 바울이라는 주제를 마치면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한다. 여성신학과 탈식민주의의 관계, 그리고 여성의 관점으로 본 성서와 탈식민주의에 대한 문제를 간단하게나마 소개할 것이다. 어렵지 않은 표현과 정보들로 되도록이면 독자들이 간단하게나마 탈식민주의와 여성신학이란 주제에 익숙해 지게 하기 위한 글이 될 것이니,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면 아래에 소개하는 몇가지 텍스트로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흔히들 여성을 이해하기 위해 남성들에게 권하는 책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등이 있고, 유튜브에 찾다보면 여성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한 유머와 위트가 있는 동영상들도 있다. <화성에서…>라는 책을 전체 일독한 것은 아니지만 몇페이지를 넘기며 내가 생각한 것은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우리가 어쩌면 당연한 듯 생각하는 지식이라 불리우는 것들은 마치 푸코의 담론이론처럼, 그리고 사이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연구에서 서구인들이 중동과 아시아에 대해 가진 생각들과 비슷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방법은 이러하다. 현대의 여성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의 특징을 조사한다. 그 특징들에서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언뜻 합리적인 방법인것 같지만 여성을 어떻게 연구하고, 묘사할 것이냐의 문제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여성에 대한 연구 자체에 대해 심도있게 공부해보진 않았으나, 여성이란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꽤나 근대적인 관심일 것이다. 물론 그 연구를 시작한 것은 남성일 것이다. 여기서 남성이란 생물학적 남자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생물한적 여자또한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꽤나 남성적 가치나 판단등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결국 마치 서구인들이 동양인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가치관에서 열등한 존재로 치부할 수 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이란 존재는 연구를 통해 여러가지 관점에서 열등한 존재로 보이게 된다. 여성의 감정적이고도 섬세한 성격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데 아주 제한적인 능력으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런데 누가 여성은 감정적이고 섬세하다고 하였나? 오히려 여성은 그런 존재라는 사회적 통념을 충실하게 흡수하여 자라난 존재들이 여성들이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질문은 여성에 대해 이야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상황과 담론들에 나타난 여성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성서가 쓰여진 시대의 여성관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 풍부한 자료들은 없으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등의 저작을 보면 남성과 여성은 절대 두 극을 형성하는 대등한 존재들이거나 상하관계의 두 개채를 뜻하지는 않는다.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이라는 눈에 보이는 차이는 존재하지만 고대 헬라 사회의 유일한 판단의 기준은 남성성(Masculinity)의 유무이다. 얼마나 마초적이냐를 기준으로 남성성의 상징인 영웅과 전사가 가장 상위이고 가장 남성성이 없는 여자가 최하위이다. 이는 만약에 여자라 할지라도 남성성을 많이 가졌다면 여성적 남자보다 상위에 설수 있음을 뜻한다. 즉 여성은 남성성의 부재를 뜻하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인식체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상황이다 보니 바울이 여성의 인권을 위해 싸웠다라고 하거나 예수가 여성의 인권을 위해 노력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논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권주의신장이라는 말은 여성이라는 의미에 대한 확인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미 우리는 여성을 바라볼때 탈식민주의에서 말해왔던 ‘타자화’라든가 ‘재현’의 문제가 여전히 존재하고 탈식민주의의 쟁점들을 활용하여 여성을 라볼때 더욱 심도있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스피박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Can the Subaltern Speak?

   스파박을 일약 스타덤에 올린 짧은 논문인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는 여성주의 탈식민주의 연구에 경종을 울린 기념비적 작품이다. 원래 서발턴 (Subaltern)은 그람시의 글에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가질 수 없는자들’을 뜻하는 것으로 the other(altern) 보다 더 아래 (sub)에 있는 자들을 뜻한다. 인도에는 서발턴 스터디 그룹들이 있는데 그들은 영국 아래의 식민지 생활동안 계속된 저항운동에서 나타난 서구의 근대적 담론에 대항하는 고유의 대항담론을 찾아내어 연구하는 자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스파박이 던진 질문은 식민지시대하에서 그리고 탈식민지시대하에서 진정한 서발턴들은 바로 여성들이며 그들의 정치적 행동이나 목소리들은 언제나 오해되고 이용된다는 것 이었다. 어쩌면 서발턴들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들리워지지 않는다. 한국의 상황을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짧다면 짧은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여성들은 국가의 독립이라는 대의 명분아래 그들의 삶을 희생했다. 광복 이후로 계속된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에서 여성들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자들로 기록되어졌다.  유관순은 그런 예에 대표적인 인물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태극기를 들고 일어선 젊은 여성이라는 아이콘은 민족애라는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장치이지만 거기에 내재한 여성성은 정치적 주체라기 보다는 민족적 감흥을 자극하기 위한 기폭제로만 사용되고 이내 사라진다. 노동운동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자신의 젊음을 바쳐 조국의 근대화에 기여하고 사라져간, 그리고 저항한 그들이 그려지는 것은 젊은 대학생의 혈기를 끌어올리거나 교과서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기 위해 사용될 뿐이다. 그들의 목소리, 그들이 참으로 원하는 것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은 얼마나 관심이 있어왔을까?
   우리의 교회를 보자. 필자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무렵, 필자보다 똑똑하고 열심인 많은 여학생들이 있었다. 그랬던 그들은 지금은 목사의 사모들로 조그만 교회의 목사들로 헌신한다.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숨기고 교인들의 스트레스를 푸는 수단으로 목사를 돕는 도우미로 살아간다. 돈이 없다고 불평하면 믿음이 없는 사모가 되고 가정형편을 돕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할려고 치면 사모가 바깥으로 돈다는 불평의 목소리를 각오해야 한다. 그러한 불평을 하는 사람들중의 많은 이들이 또한 같은 여성신도들이다. 수많은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내며 자신의 시간을 들여 헌신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남성 목회자들의 그림자를 자처해야하는 지금의 상황은 한국사회에서 여성문제를 들여다보는 작은 단편일 뿐이다. 근대화의 발전과 민주정치의 발전의 그림자에서 언제나 어둠속에 있어야 하는 인간의 개체수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 여자들은 그러기에 진정한 서발턴 들이다. 물론 모든 여성들이 서발턴이라고 하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여성들 중에서도 상위 3% 속하는 사람들이 있고, 유색인종들에 비해 언제나 상위를 차지한 백인 여성들도 있으며, 선진국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차별과 많은 기회를 확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기에 탈식민주의는 여성의 문제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의 복잡한 고리들속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 이러한 생각의 방식이 성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자.

 

   바울서신, 그 복잡한 여성과의 관계

   이제 신약성서로, 또한 바울서신으로 들어가보자. 먼저 바울 서신에서 여성에 대한 논쟁은 여성학적 성서해석이 시작된 이후로 계속 되었는데,  바울은 과연 여성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또는 바울은 여성 차별주의자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혹자들은 바울의 서신에서 여성에게 침묵을 강요하고 출산을 담당하는 것으로 여성의 지위를 국한 시키는 것을 가르쳐 바울은 여성차별론자임을 강조하고, 또 다른편에서는 본문은 후대의 첨가를 가능성이 많고 바울이 서신에 여성 지도자들을 로마서와 빌립보서에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진보한 사상을 가진 남녀차별철패론자로 본다. 시대가 더함에 따라 논쟁은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에 왔다가도 변화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연구들을 계속 읽다보면 바울에 대해 궁금한 것이라기 보다는 연구자들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연구를 거듭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치 슈바이쩌가 그의 유명한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역사적 예수를 발굴해내기 위해 지난한 노력을 하고 난후, 그려낸 예수는 바로 연구자 자신의 얼굴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 것과 같이 말이다. 이에 반해 탈식민주의 성서읽기는 해석의 스포트라이트를 바울에 맞추기를 거부한다. 성서의 시대의 여성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성서라는 텍스트는 여성들을 바라보기 위한 통로의 구실을 한다. 당시의 여성들의 모습이 문자에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이 않고 여러 복잡다단한 거미줄과 같은 그물망으로 가려져 있기에 하나, 하나 그 그물망을 그러내어 그 안에서 여성을 재발견해내야 한다. 아마도 그러한 복잡다단한 연구를 하는 이유는 당시의 여성의 모습속에 드러난 기독교 신앙과 마주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왜 이러한 연구가 기독교 신학에 기여할 수 있는지 짧게 나마 논해보자.
   성서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 문자화되어 기록된 것이라는 표현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이른바 축자영감을 따른다면 글자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되어 있으므로 성서 자체가 직접계시라는 말이 되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경험을 통해 여러 형태의 문명적 결과물과 조화되어, 언어를 통해 기록된 것이 성서라고 생각한다면 말씀에 대한 해석은 어떻게 그 안의 인간의 경험물들을 이해해 가느냐가 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바울의 기록은 그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 언어속에 들어있는 바울의 고뇌와 체험을 이해할 때만이 예수의 부활을 전하려 몸무림친 바울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간접적이나마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초기 1세기의 신앙인들의 기록이 신약성서에 담겨있고, 가장 예수와 지근 거리에 있었던 그들의 삶을 이해할때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대해서 다시금 결단할 수 있는 용기와 말씀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자, 이제 당시의 여성들에게 눈을 돌려보자. 인간 사회의 먹이사슬의 가장 밑바닥에 존재했던, 그저 한 집안이나 개인의 사유재산 정도로 존재했던 사람들이 바로 여성들이었다.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을까? 사회의 불의를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구원은 어떤 의미였을까? 구약의 히브리 백성의 신앙의 시작이 노예생활로 부터의 탈출이었다면, 신약의 여성들에게는 예수의 부활이 어떤 의미였을까? 그 해답의 단초는 오로지 성서라는 텍스트 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신약성서의 기록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이루어졌고, 성서의 기록자들 또한 그러한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가깝게나마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여성학적 성서해석은 탈식민주의안에서 영근 이론들을 바탕으로 성서에 접근하게 된 것이다.

 

   신약성서의 여성들

   이 장에서는 간략하게나마 여성주의적 성서해석으로부터 탈식민주의 여성주의적 성서해석까지를 대표적인 몇몇의 학자들을 통해 소개 한다.

   엘리자벳 S. 피오렌자 (Elizabeth S. Fiorenza)는 불모의 성서신학계에서 여성주의적 해석의 씨를 뿌리고 거두기까지 한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녀의 대표작 ‘In Memory of Her’는 마가복음 14장 9절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각주:1]는 말씀을 연구의 시작점으로 놓는다. 예수에게 최고의 찬사를 받은 이름없는 여인의 행적이 왜 이후의 복음사역에서는 사라져 버렸을까? 피오렌자는 초기 기독교의 역사가 바로 기독교 공동체의 가부장제화(Patriarchalization)가 이루어진 시기라고 본다.[각주:2] 바로 예수의 시대에 복음의 중심이 되었던 여성들의 신앙들이 그 이후에 서서히 사라져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피오렌자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전통적인 양식비평의 방법으로 후기의 전승을 담고 있는 다른 복음서들의 같은 이야기들을 마가복음과 비교하여 어떻게 이 이름없는 여인의 이야기가 퇴색되고 사라져가는지 보여준다. 바로 전통적인 성서비평을 방법을 통하여 어떻게 여성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낼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피오렌자가 주장하는 바는 성서에 남아있는 비가부장적 전승의 흔적들을 통하여 초기기독교 공동체가 남녀평등의 공동체를 꿈꾸었음을, 적어도 남성과 여성 지도자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공동체였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다. 피오렌자는 성서를 통한 여성해방은 바로 기독교 공동체의 초기 모습을 발굴하고 어떻게 그 공동체가 남성과 제국중심의 종교로 변화되어 갔는지 밝힘으로 가능한 것이라 믿었다.[각주:3]
   탈식민주의 시각에서 최초의 여성학적 성서해석을 시도한 무사 두베 (Musa S. Dube)는 피오렌자의 업적은 인정하면서도 그녀의 방법론의 문제점이 결국 성과 제국주의 담론이 얽혀있음을 보지 못하는 실패를 낳아 결국 여성을 얽매고 있는 복잡다단한 제국의 논리를 밝혀내지 못했음을 지적하였다. 두베는 먼저 피오렌자의 방법론이 전통적인 편집비평과 양식비평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함으로 텍스트 밖의 이데올로기를 지배하고 있었던 제국과 식민담론을 읽어내는 데 실패했다고 비판한다.[각주:4] 여성에 촛점을 맞추다보니 오히려 더 큰 콘텍스트에 대한 시각에서 멀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필자는 두베의 이러한 비판을 인정하면서, 그러한 피오렌자의 방법론이 초기 기독교를 이상화하는 결과를 낳았고 식민지시대의 저항공동체였던 기독교 공동체가 남녀의 평등을 실현한 이상적 공동체로 읽히워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두베는 아울러 종래의 예수 대 제국의 담론을 비판한다. 예수 공동체와 제국을 대립관계로 놓고 예수의 복음에서 정치적 저항의 메세지를 찾아내는 연구는 저항의 한 축을 담당했던 여성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는 것이다. 성서 해석을 명확한 두축의 갈등 (지배자와 피지배자)으로 봄으로 여성에 대한 시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한 해석은 현대 정치를 비판하는 윤리적인 해석으로 보일지는 모르나 바로 남성과 곁에 있는 여성의 문제들, 가정폭력, 이혼, 낙태, 임금 불평등, 인신매매, 성매매등과 같은 것들에 대한 하등의 비판적 능력을 상실한 비윤리적 해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두베는 성서의 진정한 해방적 관점은 이 두가지를 아우르는 해석이어야 하며 성서에 여전히 존재하는 가부장제와 제국의 논리를 벗기고 성서를 탈식민화 (Decolonization) 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바로 성서의  중심에 내재하는 제국주의적 복음화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때에야 비로소 성서는 여성과 남성의 평등과 우주적 하나님의 지혜 (Universal Sophia of God)를 말할 수 있는 텍스트로 읽히워 질 수 있다는 것이다.[각주:5]
   피오렌자가 치나치게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이상화하는 방식으로, 두베가 끝없이 성서의 제국담론을 벗기는 방법으로 여성과 식민해방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다면, 다비나 C. 로페즈 (Davina C. Lopez)는 그녀의 저서, The Apostle to the Conquered (정복당한 자들의 사도)에서 바울을 다시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여성에 대한 담론을 개진한다. 로페즈는 바울의 역사적 상황이 식민담론, 제국주의, 인종, 여성, 이원론등의 복잡다단한 거미줄 망으로 얽혀있었지만 그 중 가장 전면에 선명하게 대두되었던 이미지는 바로 남성과 여성의 이미지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당시의 로마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던 로마의 신전에 조각들중 클라우디어스 황제의 브리타니아(현재의 영국) 정복을 기록한 조각에서 로마의 황제는 남성으로 피정복민인 브라타니아는 여성으로 조각되어 있음에 주목한다. 반나의 여성으로 조각된 브리타니아는 그녀의 머리채를 로마의 남성전사에게 잡히워 진채 몸부림 치고 있다. 이에 로페즈는 여성이 피식민인과 피지배자로 형상화됨을 통해, 남성인 로마의 사유재산이 되고 그의 보호를 받아야 됨을 너무나 간단하게 이데올로기화 됨을 지적하였다. 결국 여성은 제국의 담론이 피지배자들에게 형상화 시켰던 이미지이고 이러한 이미지는 피지배자들의 마음에 아로새겨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남성적 이미지를 투사함으로 타민족에게 우월감을 형성하는 이데올로기는 유대민족에게도 존재했다. 이전의 웹진에서도 논했듯이 유대민족이 제국을 통해 내면화시켰던 제국의 이미지는 다웟왕국의 제건이나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소망하에서도 등장한다. 또한 끊임없이 복음안에서 제국주의적 복음주의로 나타난다.
   로페즈는 위와 같은 관점에서 바울의 회심사건을 남성적인 제국적, 유대적 이데올로기에서 예수의 부활을 토대로한 여성적, 이방인들을 (모든 다른 민족들) 위한 복음의 사도로의 전환으로 해석한다. 여타의 제국주의를 콘텍스트로한 성서신학 담론들이 로마제국이나 유대민족주의 속에 숨겨진 이데올로기에는 주목하였으나 정작 이방인 (Gentiles, pagans)의 정치, 사회적 콘텍스트를 읽어내지 못해온 것을 비판하면서, 로페즈는 할례에 대한 바울의 비판이나 바울 자신을 ‘어머니’ (갈 4:19)로 묘사하는 것을 새롭게 해석하여 바울의 복음은 남성적 제국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핍박받는 여성으로 묘사된 피식민인에게 향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의 박해자에서 박해받는자로의 역전은 종교적 영역을 벗어나 정치,사회적 영역에서 읽히워 질 수 있으며 여성학적 입장이 바울을 다시 봄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비록 로페즈가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와 식민상황을 남성과 여성의 관계로 지나치게 환원시킨감이 있지만, 바울의 회심사건을 새롭게 해석하여 피지배자을 위한 복음에 재해석은 바울을 정치적인 관점과 종교적인 관점에서 함께 해석할 수 있는 탁월한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짧게나마 세번으로 나누어 탈식민주의와 바울의 관계에 대하여 약술해 보았다. 탈식민주의와 바울은 아직도 새롭게 조명되는 분야이므로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되는 학문의 장이 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개역개정 막 14:9 [본문으로]
  2. Fiorenza, In Memory of Her, 35. [본문으로]
  3. Ibid. [본문으로]
  4. Dube Shomanah, Postcolonial Feminist Interpretation of the Bible, 39. [본문으로]
  5. Ibid., 4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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