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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애도(Mourning), 그 ‘불가능한 가능성’에 관한 에세이 (이상철)

시평

by 제3시대 2014. 6. 6.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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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Mourning), 그 ‘불가능한 가능성’에 관한 에세이

이상철
(한신대 외래교수)

 

Prologue: The day after April 16

그날 이후 40일이 지났다. 아직 16명이 영혼이 바다에 잠겨있고, 대통령은 이 참사에 대해 눈물을 흘렸으며, 내각의 수반과 청와대 사람들이 경질되었다는 뉴스, 해경과 구원파가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한 희생양으로 제단에 바쳐질 듯 하고, 그 둘을 제거하고, 몇몇 관리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이번 사건 퉁치자!’는 것이 미스 박과 그녀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환관들의 바램인 듯 하다. 
그날 이후 몇 번의 집회가 있었고, 그날 이후 신학생들은 광화문 세종대왕상 위에서, 혹은 청계광장에서 구호를 외치고 삭발을 하고 단식에 돌입했다. 왜,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걸까? 탄압하고 투쟁하고 삭발하고 잡혀가고…투쟁하고 단식하고… 정말이지 이 놈의 사회는 어찌 이리도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일까? 지난 10년 유학기간 동안 나는 이런 류의 소란으로부터 자유로왔는데, 그래서 홀가분했는데, 이제 10년이나 지났으니 세상이 변했겠거니 했는데,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안 변했을까? 

May 21, 데리다 수업이 열리던 날

<해석학과 윤리> 세미나가 열리는 지난 수요일 저녁, 내 수업에 참여하는 3명의 대학원생들이 청계광장에서 삭발을 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그 전날 학생들은 내일 제출해야 될 리포트를 미리 보내며, “교수님, 에세이 보냅니다. 내일 수업에는 참여 못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떨리네요. 기도해 주세요” 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 세미나는 슐라이에르마허부터 시작하여 레비나스까지 열 한명의 굵직한 인물들의 해석학적 특징을 다룬다. 그리고 그날 5월 21일 수요일에 우리 앞에 나타난 인물은 데리다였다. 나는 원우들과 데리다가 말하는 애도의 방식을 놓고 대화를 하고 싶었다. ‘어떻게 우리는 세월호에 대한 애도를 해야할까? 그것이 가능이라도 한 것일까?’라는 물음에서부터, 데리다가 말하는 ‘불가능한 가능성’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까지 생각해보고, 그런 연후에 세월호 사건에 대한 애도의 가능성은 무엇이고, 애도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현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애도의 방법이 무엇일까?를 놓고 나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11명의 수강생 중 3명이 청계광장에 있었던 까닭에 그 논의는 하지 못했고, 농성이 끝나고 모두 모인  종강 날쯤 세미나에 대한 결론격으로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려고 한다.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 (1): 안티고네의 애도 방식

애도에 대한 고전적인 판본은 고대 그리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 이야기이다. 사건의 대강은 이렇다. 국가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 들판에 버려져 들짐승의 먹이가 되어버린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거두어 장례를 치루려는 안티고네와 반역자(폴리네이케스)에 대한 응징의 차원에서 애도를 허락치 않는 테베왕 크레온 사이 갈등이 이 비극의 줄거리다.
국가에 반역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역사의 형벌은 어느 민족이건 대체로 일치한다. 공동체 성원들 앞에서 공개적이고 잔인한 사형이 집행되고 그 주검을 마을 어귀에 대롱대롱 매달아 공포의 타산지석으로 삼게 하거나, 혹은 그냥 시체를 들판에 내동댕이쳐 독수리의 먹이가 되게 함으로써 그 반역자와 공동체간의 거친 수직적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 그것이다.
공동체에 심각한 타격을 끼친 인물에 대한 응징과 처벌은 공동체의 이익을 보호하고 공동체 성원들의 결속과 단합을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한 당연한 처사다.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대의를 위해 한 인간의 존엄도 무시되는 이 마당에 하물며 반란의 수괴를 어떻게 넉넉하게 봐줄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안티고네가 이러한 합리적인 상징계의 질서를 거부하였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안티고네는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되찾아 장례를 치루겠다는 의지를 꺽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공동체의 운영원리인 실용주의적이고 공리주의적인 현실의 원칙, 쾌락의 원칙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누구나 죽으면 장례를 치루고 고이 안장되어야 한다는 존재일반이 마땅히 누려야 할 근원적 원칙, 상상계적 원칙에 무게를 둔다.
이를 좀 더 정신분석학적으로 풀어내면, 안티고네는 공동체의 타자인 폴리네이케스를 향한 금지된 욕망을 현실 질서(법)의 위협과 협박과 조롱과 공포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관철시켰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했던 쾌락의 원칙을 넘어가는 행위다. 왜 안티고네는 그 법을 어겼을까?

쾌락의 원칙을 넘어서 (II):  “집도 주고, 밥도 주고, 몸도 줬는데…왜 가니?”

내 기억에는 안티고네보다 더 ‘쾌락의 원칙’에 충실하지 않았던 인물이 있다. 황석영의 소설 <오래된 정원>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오현우다. 나는 이 작품을 소설보다 영화를 통해 먼저 접했다. 본래 소설을 영화 한 경우 원작에 훨씬 못 미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임상수 감독의 영화 <오래된 정원>은 예외적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영화에서는 오현우의 역할을 지진희가 맡았고, 여주인공 한윤희 역을 염정아가 맡았었다. 
1970년대 말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지하조직 활동을 한 오현우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수배자가 되어 도피생활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도와준 시골학교 미술교사 한윤희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한적한 시골 외딴 마을에서 3개월 남짓 둘만의 따뜻하고 오붓한 시간을 갖지만, 오현우는 다시 동지들을 규합하여 투쟁의 길로 나서기로 마음을 먹고 길을 나선다.
서울가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 비내리는 시골길에서 한윤희가 오현우에게 이렇게 따져 묻는다: “왜 가니? 집도 주고, 밥도 주고, 몸도 줬는데…왜 가는 거야? 그곳에 뭐가 있길래…이 병신아!” 오현우는 한윤희의 이 질문에 아무런 말을 못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다 안다. 그가 죽으러 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왜, 오현우는 집도 주고, 밥도 주고, 몸까지 제공되는 쾌락의 공간과 시간을 거부하고, 그 쾌락에 만족하지 못하고 왜, 죽음을 향해 나가는 것일까? 왜, 안티고네는 공동체가 제공하는 쾌락의 원칙에 머무르지 못하고 죽은 오빠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지내야겠다고, 아직 나의 애도는 끝나지 않았다며 절규하는 것일까?
위의 경우에서와 같이 상징계속 쾌락원칙에 만족하지 못하는 욕망을 쥬이상스라 부른다. 욕망이 상징계속 타자로부터 기인한다면, 쥬이상스는 상징계의 밖 대타자가 제공하는 욕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쥬이상스로 인해 안티고네는, 그리고 소설 <오래된 정원>속 주인공 오현우는 상징계속 쾌락의 원칙을 거부하고 박차고 일어나 대타자를 향해 나가지만… 대타자 역시 비어있다.

“대타자는 없다”, 그리고 “불가능성의 가능성”

라깡은 이를 “대타자는 없다”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대타자는 없다”라는 말은 초월성이 없다는 말로 치환 가능할 것이다. 지난 60호 웹진에서 필자는 라깡의 “대타자는 없다”에 주목한 지젝의 정치적 기획 - 어떤 초월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 초월성을 망가뜨리는 틈을 부여 잡으려고 하는 - 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와 관련된 기사는 지난 웹진 60호 필자의 졸고 “세월호 침몰사건을 바라보는 지젝의 시선과 산자의 독백”을 참조하기 바람) 
라깡의 “대타자는 없다”라는 말을 안티고네에 적용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안티고네는 존재의 심층에 자리한 텅 비어 있는 공간으로부터 들려오는 사이렌의 음성에 정직하게 반응하였고, 그 음성을 차마 배반할 수 없어 그곳을 향해 묵묵이 걸어나간다. 물론, 그 음성은 텅 비어 있는 공간에서 공명되었던 소리었겠지만서도, 안티고네에게 있어 그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실재였다. 
그렇다면, 안티고네가 취한 애도의 자세를 데리다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것은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우리의 애도를 이어가는 데 있어 어떠한 성찰을 제공하는가?  
라깡이 말한 “대타자가 없다”라는 말과 데리다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는 말 사이에는 모종의 연관과 상동성이 있다. 전기 데리다의 대표적 언어가 ‘차연’이었다면, 후기 데리다를 상징하는 대표적 개념어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다.  데리다 전기는 주로 기존 형이상학 틀에 익숙한 언어, 텍스트, 의미 안에 숨어 있는 부분을 들추어 냄으로써 기존의 상식과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탈구축을 감행한다. 반면, 1993년 <맑스의 유령들>이후 출간된 데리다의 후기 저작들은 단순한 텍스트 해체에 만족하지 않고, 윤리, 종교, 정치적 이슈들과 과감히 맞서면서 실천철학적 대응을 도모한다.  
후기 저작에서 데리다는 많은 무조건적인(unconditional) 것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무조건적인 환대, 무조건적인 용서, 무조건적인 선물, 그리고 무조건적인 애도 등. 하지만, 이 무조건적이라는 강박은 오히려 역으로 그것들에 대한 불가능성을 증폭시켜 나가다가 급기야는 데리다 작품에서 중요한 역설적 아포리아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 불가능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흉흉한 소문과 유령 같은 음산함이 죽어버린 현실에 활력을 불어넣어, ‘혹여 그 불가능이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기대 섞인 전망을 내놓는 것이 데리다 후기의 기획이고, 그것은 결국 정의에 대한 해체주의적 결말을 예견케한다.

애도, 그 ‘불가능한 가능성’을 향하여

애도(哀悼)를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이렇다: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 그러므로 애도가 성공했다 함은 그 슬픔이 극복되었음을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성공한 애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한 애도가 되는 것 아닌가? 본래 애도란 망자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고, 망자의 상실로 인한 아픔을 계속 지속시키는 행위이어야 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애도란 애도의 사전적 의미, 즉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행위를 현재진행의 사건으로 계속 작동케하는 행위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인터뷰에서 빨리 슬픔에서 벗어나는 것을 꿈꾸는 것만큼이나, 이 슬픔이 완전히 극복되고 잊혀지게 되는 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애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다시 묻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불가능한 가능성’이 노리는 바는 우리의 타자를 향한 무조건적인 환대와 우리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우리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인 선물과 그리고 우리의 멈출 수 없는 무조건적인 애도라는 개념들을 살아있게 하여, 그것들로 인해 현실이 미래로 열릴 가능성을 담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세월호에 대한 애도는 미완으로 남겨져야 한다. 미완으로 남겨진 채 이어지면서 망자들을 계속 호출해 내야 하며, 그 공간에서 죽은자들과 살아남은 우리들간의 대화와 관계 맺음이 계속 유지되도록 판을 형성하는 가운데 ‘도래하는(to-come)’ 가능성을 우리는 전망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 애도의 불가능성은 오히려 변혁을 향한 가능성의 지점이자 거점으로 우리 앞에서 살아있게 된다.
이렇듯 세월호에 대한 애도는 우리사회의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을 강화할 수단과 가능성을 제공하였다. 이 비극적이고 극적인 서사가 제공하는 비탄의 되새김을 통해 복수적이고 대안적인 의미의 계열들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애도를 통해 다양한 유령들의 목소리가 현실의 복도에서 돌아다니게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과거처럼 단 하나의 목소리 큰 유령이 그 공간을 지배케 해서도 안 되고, 과거처럼 촌티나는 분파적인 헤게모니 다툼이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3류 신파극이 되어버려 우리의 애도는 끝나버리고 만다. 그 쾌락의 원칙을 넘어가야 한다.
우리의 애도는 실재를 향해야겠지만, 그 실재는 어떤 특징도 지니고 있지도 않은 실재이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실재이다. 즉, 우리의 애도는 무엇 무엇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이 애도의 한 가운데에 자리하는 공백에 대한 사랑이다. 그 공백은 앞서 말한 것처럼 환상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애도란 그 결여를 긍정할 줄 아는 태도다. 이러한 의식들을 통해 현실을 서서히 조금씩 잠식해 들어가는 것, 그렇게 현실에 조금씩 균열을 가하고 얼룩을 칠하고 조롱을 하면서 우리의 애도를 유포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 앞에 현실의 파국이 (불가능한) 가능성의 형태로 우뚝 솟아올라와 있을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애도는 완성된다.

에필로그:  청계광장에서…

문제는 우리의 애도를 완성시킬 파국을 예감케하는 행위가 무엇인가? 라는 점인데…이 문제에 대한 뾰족한 돌파구가 없었던 내게 지금 청계광장에서 벌어지는 퍼포먼스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삭발과 단식이라는 오래된 내러티브가 있는가 하면, 그 무겁고 장엄한 투쟁의 공간을 경쾌하게 날려버리는 족보도 없는 날날이 같은 댄스와 딴따라 같은 노래와 잡다한 수다들이 꼬이고 공존하면서, 그 숨막히는 메타내러티브가 지배하던 공간이 하찮은 놀이의 공간으로 변모되는 것을 본다. 그것들을 접하면서 어느새 내 안에 자리잡은 신파와 노파심과 촌스러움을 꾸짖는다. 아마도 ‘젊은 그대’는 훨씬 더 과거 그들의 선배들 보다 이 애도를 즐기면서 오랫동안 파국의 도래까지를 잘 견딜 수도 있겠다라는 예상을 한다. 
이렇듯 세월호 참사가 불러온 애도 정국은 2014년 5월 대한민국을 슬픔과 뜨거움이 공존하는 도가니로 우리를 몰아넣고 있다. 80년 광주와, 87년 6월 항쟁, 97년 IMF와 더불어 2014년 세월호는 한국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 역사적 탄식과 요청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무척 떨리고 흥분되고 소름돋는 시간을 우리는 지금 지나고 있는 셈이다. 문득, 삭발에 앞서 눈에 눈물이 파르르 고이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일 나는 다시 그들을 만나러 간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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