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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 What does this mean? (이상철)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4. 8. 6. 08:28

본문


What does this mean?[각주:1]

이상철
(한신대 외래교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사도행전 1:8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 사도행전 2:6-8


Greeting

10년 유학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 돌아온 지 열흘 정도 되었는데, 아직까지 시차 때문에 고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제가 지금 사는 곳이 사당3동인데, 7.30 보궐선거가 이루어지는 요란스러운 동네입니다. 선거와 관련된 시끄러운 뉴스들, 유병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터무니 없는 뉴스, 세월호 100일 지났다는 슬픈 뉴스, 이런 뉴스들이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저에게 꿈결에서 들리는 것처럼 다가왔던 한 주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한 주간 동안 제일 저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시차적응으로 인한 고생도 아니고, 조국의 서글픈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오늘 설교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설교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아니라, 설교를 하는 교회가 하필이면 한백교회라는 억압이 저를 힘들게 했던 한 주였습니다. 

왠지 한백교회에서 설교를 하려면 심오하고 어려운 말을 해야 될 것 같고, 멋있는 학문적 표현을 날리면서, 그리고 진보적인 해석과 성찰, 뭐 그런 이야기들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 억압이 저를 더 시차에 적응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원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조금 전까지 이런 이유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렇게 앞으로 나와 여러분들 얼굴을 보니까 그래도 조금은 기분이 낫습니다. 제가 설교하다가 (시차 때문에) 졸거나, 횡성수설하면서 설교를 죽 쑤더라도 너그러이 양해주실 줄 믿고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왜, 성령강림(절) 인가?

오늘이 교회력 상으로 성령강림절 여덟 번째 주일입니다. 보통 교회에서 가장 큰 명절이 2가지가 있는데,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이죠.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기간을 대강절이라고 하고,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을 사순절이라고 합니다.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말고, 교회의 명절을 하나 더 고르라면 추수감사절도 물론 있겠지만, 저는 성령강림절을 꼽고 싶습니다.  

성령강림절이 중요한 이유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사건 이후,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에클레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공동체인 교회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성경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강림 사건을 그리는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본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는 구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도입질문을 하나 던지겠습니다. 성령이 뭘까요? 여러분, 성령 받으셨나요? 성령을 받았다는 의미가 뭘까요? 성령을 받은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들은 초대교회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반복적으로 되풀이 되는 질문입니다. 저도 이런 질문을 받으면 솔직히 자신있게 할 말을 못 찾겠습니다.   

비록 제가 성령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성령을 받았는지 조차 자신 있게 확신할 수 없는 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성령이 임하는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이어야 할런지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저로 하여금 추측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던 본문입니다. 


‘영성 현상(학)’을 둘러싼 기억, 혹은 회상

오늘 설교제목을 ‘성령임재와 사회적 영성’이라 정했습니다. 영성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쓰여졌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죠. 하지만, 영성이라는 신학적 언어의 기원은 알 수 없습니다. 학자들마다 고대 사막의 교부들, 중세 수도원 전통, 종교개혁의 전통속에 그 기원이 있다고 말은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영성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 그 현상 자체는 중요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영성이라는 말의 유행은 20세기말 세기말적인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종교적 언어의 발굴이 시급했던 요청속에서 파생된 부산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별히 한국신학계에서 영성 신드롬의 확산에 결정적 공헌을 한 책이 하비콕스가 썼던 <영성, 음악, 여성>이라는 책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그 책을 읽고 독서보고서를 썼던 것 같은데, 지금 그 책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단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책의 원제목입니다. 그 책의 한국말 제목은 <영성, 음악, 여성>이라는 근사한 제목인데 반해, 그 책의 원제목은 Fire From Heaven이라는 다소 섬뜩한 제목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과 연관이 있는 책 제목입니다. 그 이후로 저는 영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나, 영성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사도행전 1장과 2장을 근거로 이야기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오늘 설교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사도행전 본문에 대한 주석학적인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임재와 연관시켜 ‘사회적 영성’이라는 부분을 숙고하는 것입니다. 현재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에서 사회적 영성에 대한 작업들, 글들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이 부분에 대해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10년 동안 고국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 적합한 ‘사회적 영성’을 이야기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대신 여러분들이 오늘 본문을 현재 한국 사회에 적합한 사회적 영성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지? 에 대해 이따가 설교 후 토론 시간을 통해 저에게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여기까지가 설교의 서론이었고, 지금부터 본격적인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땅 끝’에 대한 오해와 진실 

조금 전 제가 도입질문에서 ‘성령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성령 받으셨나요?’라는 폭력적인 질문을 여러분들에게 던졌습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질문은 누구든 한두 번씩은 받아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첫 번 답변에 대한 tip이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8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성경구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말씀하셨던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예전부터 부여하여 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유언을 하잖아요. 그 유언을 우리는 꼭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초대교인들이 이 말씀을 예수님의 유언처럼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 잘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예수님의 이 마지막 말씀은 선교를 떠나는 선교사님들이 몸에 지니고 다니는 성경구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본문은 크리스챤들에게 대표적으로 잘 못 알려진, 진리를 호도하는 성경구절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통상 한국교회 이 본문을 해석할 때 강조되는 단어가 뭘까요?   ‘성령’과 ‘증인’, 그리고 ‘땅 끝’일 것입니다. 이 중 문제가 되는 것은 ‘땅 끝’에 대한 오해입니다. 이 본문을 갖고 설교할 때 거의 모든 목사님들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땅 끝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로 결론을 짓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논리가 교권이라는 이름으로 평신도를 장악하려는 교회권력자들에 의해 잘못 해석되면 이렇게 변질되기도 합니다.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만이 성령을 잘 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해석되면 이 말씀은 교인들을 정죄하고 교권을 강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하지만, 이 본문은 그런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오늘 본문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When the Holy Spirit has come on you, you shall be my witnesses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Samaria and to the end of the earth.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나의 증인이 되는데, 어디서? ‘예루살렘 and 유다와 사마리아 and 땅끝에서 나의 증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이 중요한가요? 유다와 사마리아가 중요한가요? 땅끝이 중요한가요?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은 등위접속사 ’and’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등위접속사(예: and, but, or, nor, so등등)의 성격이 뭐죠? 등위접속사로 연결된 대상들은 성, 수, 격이 똑같아야 됩니다. 똑같은 의미와 같은 중요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and 유다와 사마리아 and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했을 때,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 사이 관계 설정에 있어 셋 중 어느 하나에 무게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셋이 공히 같은 비중과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위의 성경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지금 내가 거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 이 공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과 이 공간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말입니다. 굳이 땅끝까지 가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미국에서, 지금 폭염에 휩싸인 팔레스틴땅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아프리카에서…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일하는 직장에서, 학교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내가 성령을 받았다면 마땅히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땅끝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히스테리적인 경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깃발을 꼿아야 신앙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땅 끝을 찍고 와야 뿌듯하고 자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져있었다는 말입니다. 안으로는 곯아터지고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묵인하고 땅끝을 향해 가려고만 하는 한국교회의 선교정책이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내가 지금 있는 이곳에서 주변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주변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땅끝까지 갈 수 있겠습니까?  


너희가 성령을 아느냐?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사는 것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첫 번째 원칙이라면, 오늘 우리가 읽은 두 번째 본문 사도행전 2장은 ‘성령의 현상학’, 뭐 그런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2장은 유명한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임재한 성령강림에 대한 기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하늘로부터 강한 바람”(2:2)이 내려온 이후에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2:3) 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방언의 은사가 발생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스터리 한 것은 그 다음구절입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2장 6절-7절). 

이 본문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간단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남왕국 유다가 587년에 망한 후에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60-70년 세월이 흐른 후 에스라-느헤미아때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죠. 하지만, 그때 돌아오지 못하고 바벨론에 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일제시대를 연상하면 됩니다. 해방이 된 후에 일본으로, 만주로, 연해주로, 중국으로, 중앙아시아로 끌려갔거나 흩어졌던 조선백성들이 해방 후에 한국으로 모두 돌아오지 못했던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벨론 포로 귀환 후부터 500년 이상 흐른 시간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오백년이면 세대로 따져도 15세대 이상이 흐른 다음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지 어언 70년이 되어갑니다. 지금 각지로 흩어져사는 한민족들이 이민 2세대, 혹은 3세대까지 생겨났습니다. 사할린에, 일본에, 만주에, 중국본토에, 러시아에,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한국어를 잘 구사할까요? 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 자제들인 경우 대부분 영어만 사용할 줄 알았지 한국말 구사는 못하는 경우가 거의 다반사입니다. 

이렇듯 2세대 3세대까지 흘러도 모국어를 잃어버리는데, 바벨론 패망 이후 500년이 넘게, 15세대, 16세대, 17세대 넘게 이방 땅에서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 마찬가지 경우가 아니었을까요? 그들 역시 흩어져서 지금 거하고 있는 그 땅의 풍토와 문화와 언어에 동화된 채 오랜 세월을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고국의 언어를 잃어버리지 않았을까요?   

다행히 그 세월속에서 야훼 신앙을 간직했던 사람들이 있어 그들이 민족의 명절인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들이 바대인, 매대인, 엘람인,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보도와 아시아….등지에서 몰려들었다고 적혀있습니다(사도행전 2:9-11). 우리로 따지면 재일교포 15세, 재미교포 16세, 재중 교포 16세, 재러시아 교포 17세, 재멕시코 교포 15세, 재하와이 교포 16세, 재타슈겐트 교포 15세, 재사할린 교포 15세가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여한 것이다.   

그 사람들 앞에서 제자들이 말을 했다고 적혀있습니다. 제자들이 그 사람들 앞에서 무슨 말을 했을까요? 복음을 전했겠죠: “내가 만났던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 분은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받습니다. 그 분은 우리 같은 약한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내가 곧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 그 분이 말한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  


What does this mean?

이렇게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 성령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뭐가 그리 놀랍다는 거죠? 내가 지금 한국말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미국사람, 일본사람, 중국사람, 멕시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한국말을 모르죠. 그런데 성령의 바람이 임하니까 내가 한국말로 설교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나라말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너무 놀라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냐?” 

 “저 사람이 지금 한국말로 설교를 하고 있는데, 난 영어밖에 모르는데, 나는 일본말 밖에 모르는데, 나는 중국말 밖에 모르는데, 나는 한국 말은 배워 본 적도 없는데, 어찌하여 한국말 설교가 내 귀에 들리는 거지? 이게 어찌 된 일이야? What does this mean?”                         

“나는 메소보다미아 말밖에 모르는데, 나는 갑바도기아 말밖에 모르는데, 나는 아라비아 말밖에 모르는데, 나는 로마말 밖에 모르는데, 나는 이스라엘 말을 모르는데 어찌하여 이스라엘 사람이 하는 설교가 내 귀에 들리는 거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What does this mean?” 

우리가 출신 성분도 다르고, 자라온 배경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역사도 다르고, 문화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임해서 그 모든 차이와 다름이 극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What does this mean? 

여러분 성령을 체험했다는 것은 무슨 마술적인 신비체험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차이와 차별을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치는 공동체입니다.  진정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우리 사이에 있는 모순과 분열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가 되게끔 하는 공동체 입니다.   진정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우리 사이에 있는 상처와 아픔을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하는 공동체 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을 종합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방언의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치유의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며, 예언의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성령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 성령을 받은 사람의 중요한 특징은, 우리 안에 있는 분열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관계가 깨진 그 공동체를 하나가 되게끔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란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우리 한백교회 위에 이러한 성령의 능력이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2014년 미국 장로교 총회, 그리고 ‘사회적 영성’에 대한 데자뷰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에 나와있는 ‘성령의 임재’를 둘러싼 해석이었다면, 남아있는 오늘 설교의 과제는 이러한 성령의 임재를 어떻게 ‘사회적 영성’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 에 대한 문제입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부분은 제가 오히려 여러분들에게 듣고 싶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고, 그런 상황속에서 성령을 받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지? 에 대해 이따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통해 저에게 일러주시기 바랍니다. 

그 전에 ‘사회적 영성’과 관련하여 이번에 제가 이번 미국에 있는 한 달 동안 있었던 일화를 하나 소개한 후에 여러분들에게 마이크를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달에 미국장로교 총회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전통적 main line church 4개입니다. 감리교, 루터교, 성공회, 장로교, 하나를 더 더하자면 회중교회가 있습니다. 장로교는 미국내에서 크지 않습니다. 교단차원의 규모와 영향력에 있어 감리교가 일단 우위에 있고, 루터교, 성공회가 그 다음이고, 장로교가 그 뒤를 잇습니다. (물론, 남침례교회가 가장 수적으로는 우세하나, 워낙 개교회 중심적이라 교단차원의 영향력은 생각보다는 크지 않음)  

그런데 미국장로교가 중요한 이유는 미국의 독립과정, 남북전쟁 등 미국정신의 근간이 형성해가던 무렵 나름의 역할을 감당하였다는 점입니다. 미국 헌법을 기초하는 과정에서 장로교 헌법을 참고하였고, 남북전쟁과정에서는 미국 장로교가 분열하면서 미국 시민사회의 발전에 일정부분 공헌을 합니다. 물론 미국 장로교가 전보다는 교세가 많이 쇄락했다고는 하나, 미국 역사발전에서 남긴 족적만으로도 그 영향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미국장로교 총회에서 발표된 동성결혼에 대한 발언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2014년 6월 14일부터 21일 사이에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미국 장로교 제221차 총회에서 많은 논란과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결혼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바꾸는 헌의안이 찬성 429대 반대175 (약 7:3)로 통과되었습니다. 쟁점이 되었던 내용은 아래 문구였습니다. 

Marriage involves a unique commitment between two people, traditionally a man and a woman to love and support each other for the rest of their lives. 

전통적으로 남자와 여자 사이에 형성되었던 독특한 헌신을 결혼이라 정의했었는데, 개정된 결혼에 대한 정의는 남자와 여자 대신 ‘두 사람(two people)’이라 명시한 것입니다.  총회가 끝나갈 무렵인6월 19일에 이 결정이 내려졌고, 이 발표 이후 미국 장로교 소속 한인교회들은 거의 모두 반대의사를 표명하면서 미국 장로교에서 탈퇴까지 불사하겠다는 강한 유감의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 50개 주 가운데 현재 19개 주에서 동성애 결혼이 합법화 되어 있습니다. 이미 UCC와 미국성공회, 미국 루터란은 미국 장로교보다 이 안건을 먼저 통과시킨바 있습니다. 그때도 이와 비슷한 사회적 논란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들 가운데 이번 미국 장로교 총회에 다녀왔던 목사님들이 있어 그 곳 분위기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동성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동성 결혼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이 공교롭게도 다 같았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인해 교회가 분열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동성 결혼을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미국 장로교도들이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분리와 차별로 인해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말하고,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입장에서도 미국 장로교가 이 안건이 통과되면 분열될 것이라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 진영 모두 교회를 하나로 이끄는 성령의 임재를 기원했다고 하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죠.


성령의 임재와 사회적 영성은 결국 다름에 대한 성찰에서 부터…

21세기 미국 진보신학계의 화두는 신자유주의와 동성애 논란에 대한 신학적 대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이민자들의 나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다름을 수용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기술과 능력에 있어 나름의 노하우를 갖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입니다. 신분적, 계급적, 존재론적 차이와 다름으로 야기되는 사회적 갈등을 적당히 분출하면서, 어떻게 사회적 통합의 과정으로 이끌어낼는지에 대해 잘 학습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여성차별의 문제, 흑백문제, 이민자 문제 등이 대표적인 이슈였다고 할 수 있고, 근래에는 동성애문제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Queer theology를 공부하다보면 오늘날 사상계에서 논의되는 성담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성서 안에 들어있는 동성애관련 문구에 대한 새로운 접근들,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발생했던 차이와 다름에 대한 억압들, 그리고 그것을 타파하려했던 변혁적 몸부림, 그 연장선상에 위치했던 교회의 응전들을 살피면서 비교적 통전적인 차원에서 동성애 문제에 접근합니다. 아울러 오늘 본문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에 대한 면밀한 검토도 시도합니다. 

사도행전에 드러난 성령의 임재에 대한 해석을 미국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등장하는 차이와 다름으로 인해 야기되는 억압과 불평등을 깨는 성서적 근거로, 그리고 현 미국사회의 갈등의 원인인 동성애 논란을 극복하는 중요한 성서적 근거로 끌어오려는 노력은, 물론 좀 더 예각화할 필요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본문은 성령의 임재와 사회적 영성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해석학적 작업인 것 만은 분명한 듯 합니다. 

물론, 여기에도 위험이 도사리고는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성령의 임재’라는 구호가 자칫 포스트모더니즘의 다문화주의가 구사하는 느슨한 수평적 연대에 정박되어 고착화됨으로써 다문화주의를 프로파간다로 내세우는 신자유주의와 공모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We are the World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모순과 부조리가 순화되고 묻혀버리는…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변혁의 의지를 감소시키고, 결국에는 냉소주의로 빠지게 한다는 것이죠. 이런 이유로 성령제일주의와 영성의 남발을 경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 부분은 따로 시간을 내어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Closing  

오늘 저는 지금 ‘성령의 임재와 사회적 영성’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일어난 성령임재 사건을 바라보며 어떻게 말했다고 적혀 있습니까? “What does this mean?”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

결론적으로 말해 성령의 임재와 사회적 영성은 떨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차이와 불평등은 오랜 사회적 역사와 사회적 연관관계 속에서 작동되어 왔고, 결코 사회와 독립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은, 모든 차이들- 그것이 성적 차이든, 계급적 차이든, 문화적 차이든, 인종적 차이든 간에-, 그 차이로 인한 부당한 폭력이 잔존하는 그곳으로, 성령은 임재해야 합니다. 이 말은 성령의 임재는 결코 개인적인 체험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고, 이 말은 성령의 임재는 집단적 경험으로, 그리고 그것이 집단적 기억으로 전승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임재와 사회적 영성이 지니는 방정식 입니다. 제가 준비한 설교는 여기까지 입니다. 잠시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도록 합시다.    

ⓒ 웹진 <제3시대>



  1. 이 글은 지난 7월 27일 한백교회 설교 “성령강림과 사회적 영성”(본문: 사도행전 1:8-11/ 2:1-13)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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