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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 보게 하는 것과 보지 못하게 하는 것 (정용택)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4. 8. 6.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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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게 하는 것과 보지 못하게 하는 것[각주:1]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35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사람(나면서부터 눈 멀었다가 예수로부터 고침을 받은 사람)을 내쫓았다는 말을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만나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36 그는 대답하였다. “주여, 그분이 어느 분입니까? 내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3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38 그는 “주님, 내가 믿습니다” 하고 말하고서, 예수께 엎드려서 경배하였다. 39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볼 수 있게 하고, 볼 수 있는 사람은 눈이 멀게(blind) 하려는 것이다.” 40 예수와 함께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4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 요한복음 9장 35-41

[7:53 그리고 그들은 제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8:1 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많은 백성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실 때에, 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4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레 20:10; 신 22:22-24)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7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8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9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다.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11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 요한복음 7장 53-8장 11절
 

1. 보지 못하던 사람은 볼 수 있게, 보고 있던 사람은 보지 못하게

요한복음 9장은 예수님 당대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다22절의 상당히 독특한 진술로 인해, 요한복음 연구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논란의 중심에 있어온 본문입니다. 예컨대 22절에 등장하는 회당으로부터 축출하다출교하다로 번역되는 단어인 아포쉬나고고스’(aposynagogos) 때문에 그런 것인데요. 이 단어가 예수님 당대의 상황 보다는 1세기 후반의 요한공동체가 처해 있었던 유대교 회당과의 갈등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마틴(J. L. Martyn)의 획기적인 주장 이후 요한공동체의 역사와 신학에 관한 수많은 가설들이 제기되었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예수님 사후부터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가 로마에 완전히 종속되는 70년 전쟁 이전까지의 역사적 상황이 반영된 사도행전이나 바울서신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에서 공식적으로 쫓겨났다는 진술은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85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유대교 회당의 공공 기도문인 쉐모네 에스레(Shemone Esre)의 비르카트 하-미님(Birkath ha-Minim)에 나타난 나사렛파와 이단들에 대한 저주가 발견이 되었는데, 마틴은 요한복음 922(그리고 12:42, 16:2)의 아포쉬나고고스가 이 기도를 통해 일어난 회당으로부터의 그리스도인 축출 사건을 가리키는 전문용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전하고 있듯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이들이 예수님 당대에 회당에서 쫓겨났다는 보도는 요한공동체가 자신들의 현재적 경험을 예수님 당시의 과거로 투영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마틴은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이 요한공동체와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결합된 두 차원의 드라마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러한 저간의 사정으로 인해, 학자들의 관심은 정확히 934(“그리고 그들은 그를 (회당) 바깥으로 내쫓았다”)까지 일어나고 있는 상황 즉,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사람과 그 부모들을 향한 바리새인들의 심문 및 추방 사건의 역사적 진실 규명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정작 눈 뜨게 된 남자가 바리새인들로부터 회당에서 쫓겨난 후에, 예수님과 만나서 나누는 대화나 그 대화 중에 바리새인들이 끼어들어 예수와 나누는 대화가 갖는 신학적 의미를 성찰하는 데는 소홀하게 된 것이지요. 오늘 살펴볼 본문에 첫 번째에 해당하는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고 계신 말씀의 요지는 크게 두 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당신은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는데, 그 심판은 다름 아닌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보지 못하게원문에 따르면, ‘눈이 멀어 버리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발끈한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이 눈이 먼 사람이라는 것이냐고 따지자, 예수는 당신네들이 스스로 눈이 멀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나마 다행히 죄인이 아니지만, 발끈하는 태도로 보아 스스로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당신네들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대체 이 이야기가 무슨 뜻일까요? 예수가 말하는 보게 하는 것과 못 보게 한다는 것이 심판의 행위의 일종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눈이 먼 사람을 치료해서 볼 수 있게 한다거나 반대로 눈이 잘 보이는 사람을 해코지하여 실명하게 하는 그런 차원의 얘기는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좀 유치해지잖아요?). 오히려 이 이야기는 매우 신학적인 차원의 심오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리는 심판으로서 보게 하는 것과 보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여러분들과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저는 예전부터 예수님의 이 발언에 담긴 신학적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찾는 데 고심해왔습니다. 어쩌면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앞에 소경의 치유 이야기가 먼저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봤습니다. 앞의 치유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가 하신 이 말씀의 진의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저도 그렇지만, 요한복음을 주석한 학자들 역시 이런 예수의 심오한 주장이 어떤 방식으로든 요한복음 본문 안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91-41절과 그 뒤에 바로 이어지고 있는 101절 이하의 이야기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모습을 띠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935-41절에서 중요하게 드러나고 있는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에 관한 예수의 발언과 101절 이하의 양의 우리의 비유선한 목자의 비유는 문맥상 전혀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불트만을 비롯한 많은 주석가들은 본래의 요한복음에서는 941절 뒤에 오는 본문이 현재의 101절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고, 복음서의 순서를 각기 나름대로 재구성해왔습니다.

불트만의 경우는 812절이 941절 뒤에 오고, 812절 뒤에 다시 1244-50절이 와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예수께서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 나를 배척하고 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은 따로 계신다. 내가 말한 바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친히 나에게 명령해 주셨다. 나는 그 명령이 영생을 준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해 주신 대로 말할 뿐이다”).

또한 813-20절은 원래는 812절 뒤에 와야 할 것이 아니라, 5장의 뒤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그런 식으로 해서 935-41절에서 언급되는 보게 하는 것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요한복음 자체 내에서 찾아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것은 보게 하는 것과 보지 못하게 한다는 진술을 또 다른 신학적 담론으로 되풀이한 것이지, 해석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실례(實例)는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2. 시선은 권력이다. 진리는 시선의 권력의 산물이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참조하여, 요한복음 9장의 상황을 잠시 정리해보겠습니다. 9장은 세 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예수와 제자들이 소경인 사람을 화두로 대화하다가, 예수가 그를 고쳐주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1-7). 두 번째 장면(7-34, 특히 13-34)은 바리새인들과 고침 받은 사람의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은 그가 눈을 뜨게 된 것을 삐딱한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사람을 윽박지르며 말합니다. “너를 눈뜨게 한 이는 메시아(그리스도=구원자)가 아니라 죄인이다”(24). 이런 문맥에 이어지는 세 번째 장면(35~41)에서는 예수와 그 고침 받은 사람이 대화를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는 ’(보게 함)보지 못함’(보지 못하게 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소경인 자는 누군가에 의해 항상 관찰되어 왔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볼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항상 타인의 시선 안에 들어 있었지만, 그는 한 번도 타인을 바라볼 수 없었던 존재인 것입니다.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보는 자들입니다. 타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때론 엿보고, 때론 훔쳐보면서 남들이 율법을 준수했는지 안 했는지를 판정해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그러한 시선의 특권을 가졌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시선은 권력이다라는 말이 절로 생각나는 대목이지요. 시선이 곧 권력이라는 명제는 달리 말하자면, 그 시선의 권력을 가져가는 이가 보는 자가 되고, 반대로 그 시선의 권력 하에 놓인 자가 보임을 당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도 그렇겠지만, 예수 당시의 맥락에서는 더욱 그러하건대, 보는 자는 곧 권력을 가진 자들이고, 보임을 당하는 자들은 권력의 지배 아래 놓인 사람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보는 자는 소경과 같이 보이는 자를, 그의 존재의 됨됨이 곧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규정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 보는 자는 그를 제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약 보이는 사람이 그것을 알아차린다면,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 제압당해 버립니다. 즉 보임을 당하는 자는 보는 자의 시선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이런 주종관계는 보는 자의 마음대로 규정되는 사실의 세계를 현실 가운데서 만들어냅니다. 언제나 그렇듯 지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특정한 세계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현실 그 자체가 되는 것이지요. 볼 수 있는 자의 시선에 진리가 만들어지고, 보임을 당하는 자는 그렇게 보고 있는 자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 그 진리를, 그 기만적인 세계관을 객관적인 현실로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리는 시선의 권력을 장악한 자의 상상의 산물이며, 그런 그의 전유물로 형성됩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지배하던 1세기 초반 유대 촌락 사회의 일상적인 죄인 생산 메커니즘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소경과 바리새인의 관계는, 바리새인들의 시선에 제압당해 자신의 존재가 규정되고 있는 당시 사회의 권력 질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경이 단지 한 불행한 개인만을 의미하는 게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의 시선에 의해 제압당하고 존재가 규정된 사람들 일반, 즉 바리새주의가 지배하는 사회 속의 대중을 집합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공동체의 경험에선 70년 전쟁 이후 더욱 보수화된 기조로 무장된 재건 유대교 회당체제의 이념적 지배틀인 랍비적 바리새주의 아래 포획된 전쟁 이후의 대중 일반을 의미합니다.그런데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눈을 뜨게 된 사람이 바리새인들에게 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는 더 이상 바리사이(바리새파)가 본 것을 자신의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당당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이제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규정당하고, 그 시선의 권력을 내면화하여 스스로를 바라보던 이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이 경험해온 시선의 권력의 지배관계를 완전히 전복해버린 것입니다.

소경과 바리사이로 대표되는, 보는 자와 보이던 자의 권력 관계를 전복하여 이제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던 자들을 볼 수 있게 해주고, 반대로 권력의 눈으로 세상과 타인을 보고 있던 혹은 감시하고 있던 자들을 눈멀게 해버리는 사건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939절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이러한 권력 관계를 전복시키는 활동이야말로 자신이 행하는 심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트만이 주장하는 것을 따를 경우 그 뒤에 오는 구절이 되는 1247절에서는 이렇게 보지 못하던 자를 보게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행하는 구원 활동의 요체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

 

3. 예수는 그녀를 죄인으로 보지 않았다.

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상의 많은 요한복음 사본 필사자들이 끈질기게 요한복음 본문에 편입시키고자 했던 어떤 이야기가 바로 이처럼 보던 자보지 못하던 자의 관계를 전복하는 것 즉 볼 수 있게 하는 것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예수님의 심판/구원 사역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해설해주는 예라고 보고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저명한 요한복음 주석가들이 버렸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하는 심판과 구원 사역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753절부터 811절까지의 본문을 통해서 말입니다.이 본문은 흔히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사본학적으로 이 본문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본문입니다. 대다수의 권위 있는 오래된 요한복음의 사본들에 이 본문이 없을뿐더러, 그 문체도 요한복음의 다른 본문과 현저히 다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국제적으로 공인된 헬라어 원문성경에도 이 본문은 7:53-8:11의 자리에 들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꽤나 오래전의 사본들에서 발견되는 점을 고려하여 이중 꺽쇠갈호로 묶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원문성경을 그대로 번역한 한글 성경들에서도 이 본문은 항상 이중꺽쇠 괄호로 표시되어 있고, 그 밑에 난외주에는 가장 오래된 사본들에는 7:53-8:11이 없음. 사본에 따라서는 7:36 다음에 이어지기도 하고, 21:25 다음에 이어지기도 함이라고 표기해놓고 있는 것입니다.

권위를 인정받는 요한복음 주석서들 중에는 아예 이 본문에 대한 주석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자들은 이 본문이 요한복음의 원문에는 없던 것이 분명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본문이 왜 그렇게도 끈질기게 여러 사본들에서 계속 발견되고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차피 요한복음 역시 다른 복음서들과 같이 예수에 관한 구술전승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책이라면, 오래된 요한복음 사본에 이 본문이 있고 없고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이 본문이 문서텍스트로 정리된 것이 늦어졌을 뿐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본문의 위치는 상당히 불안정합니다. 89절과 11절에서 보듯이, 여인을 간음죄로 잡아서 예수 앞에 끌고 왔던 이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고 말했는데, 12절에서는 갑자기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라고 하고 있는 것만 봐도, 이 본문이 여기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매우 어색합니다. 저는 91-41절 다음에는 812절이 오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1244-50절이 오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그 다음에 대다수의 신약학자들이 버린 753-811절의 본문을 놓게 되면, 91절부터 34절까지 묘사된 소경을 눈 뜨게 하는 이야기와 함께,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의 본질 즉, 당대의 지배적인 권력자들에 대한 심판의 사역이자 지배받는 민중들에 대한 구원의 사역으로서 보게 하는 것과 보지 못하게 하는 행위의 의미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기존의 신학자들은 거의 모두 이 간음죄로 고발당한 여인을 자명하게 간음죄를 지은 죄 많은 여인으로 간주합니다. 어떤 학자는 예수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함으로써 간음죄를 지은 죄 많은 여인도 용서해 주었으나 결코 그 여인의 죄를 가볍게 용서해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라고 주장합니다. 이른바 예수도 사람은 용서하되 죄는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또 어떤 이는 예수 본인도 그 여인의 죄만큼은 사실로 인정했기 때문에 마지막의 11b절에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고 엄중히 경고했으며, 단지 그 여인에 대한 심판을 연기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학자들이 이런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은 그들조차도 이 여인을 죄인으로 보고 있는바리새인들의 시선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조차도 그런 바리새인들과 동일한 죄의 시선으로 이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해석에 반대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이 여인을 결코 죄인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사본학적으로 볼 때, 이 본문이 들어간 사본들 가운데는 811b절이 발견되지 않는 사본들이 더 많이 있고, 이런 사본들이 오히려 이 11b절이 첨가된 사본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오래된 사본들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굳이 그런 사본학적 문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앞서 살펴본 935-41절의 말씀에 근거하건대, 예수님은 이 여인을 죄인으로 보고 있는 자들이야말로 죄인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바리새인들에 의해 죄인으로 보임을 당한 그 여인이 스스로를 다시 볼 수 있게 해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당할 줄로 압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본문 어디에서도 간음죄로 고발당한 여인의 이름이나 나이, 가족 관계와 성장 배경, 그녀의 구체적인 행적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여인이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다고 말하는 것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그녀를 잡아온 바리새파 사람들의 말일 뿐입니다. 그들의 고발만 가지고는 그녀가 정말로 간음을 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예수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이해되던 간음이 어떤 것인지에 관한 상세한 역사적/성서적 고찰이 선행되어야만 하는데도, 그러한 연구에는 무관심한 채 이 여성을 바리새인들의 주장에 따라 그대로 간음한 여성으로 간주하는, 이른바 시선의 공유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왔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자들은 자유를 가진 인격체가 아니라, 남종과 여종, 소와 나귀처럼 그 소유주인 남자의 소유물로 존재했습니다. 남자들은 일부다처제를 채용하여 합법적으로 아내 이외에도 여러 여자를 첩으로 거느렸고, 여자를 사서 성적 소유물로 삼을 수도 있었습니다(21:11-17).

남자가 처녀를 억지로 강간한 경우에도 그 강간한 처녀의 소유주인 아비에게 은 오십 세겔을 준 후 아내로 삼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22:28-29). 돈과 권력의 힘으로 다른 남자의 약혼녀나 아내 역시 자신들의 성적 파트너로 삼는 일이 빈번했습니다(22:30). 유대 율법은 단지 다른 남편의 소유물에 속하는 남의 약혼녀아내를 강제로 범함으로써 다른 남자의 소유물을 훼손하고 훔친 경우만을 간음으로 규정하고 타인의 아내를 간음하지 말라’(18:20)고 말하는 형벌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 사회에서 간음 금지조항은 도덕이나 윤리적 측면 보다는, 남성들의 소유권 보장과 공정한 성거래(?)를 위해 제정된 남성 위주의 상도덕적 규범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신명기법은 여자가 결혼 후, 처녀였음을 나타내는 징표가 보이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돌로 쳐죽이라(22:21)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결혼 후, 남편이 아내의 처녀성을 의심할 경우, 그 여인은 의심의 법에 의해 남편으로부터 쓴 물을 먹혀서 넓적다리가 붓게 되는 고문을 받았다고 합니다(5:11-31).

놀랍게도 남의 약혼녀나 유부녀를 범한 간음에 대한 형벌 규정 가운데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신명기법에 따르면 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약혼녀를 강간했을 때, 그것이 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성읍 안에서 일어난 경우에는 강간범만이 아니라 피해여성함께 돌로 쳐죽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22:23-24). 여자가 성() 안에 있으면서 소리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 남자가 남의 아내를 강간했을 경우, 이유 불문하고 남자뿐 아니라 피해를 당한 여성도 무조건 함께 교살하라(22:22)고 말합니다. 이미 더럽혀진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과연 이런 유대 사회에서 보통의 부녀자 혹은 처녀가 자발적으로 다른 남자와 간음을 한다는 것이 실제로 가능했을까요? 당시 유대 남성들은 여성이 폭력적으로 강제로 타인의 의지에 의해 간음, 더 정확히는 성적인 폭행을 당한다는 그런 개념조차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피해를 당한 여성에게 가해자 남성보다 더하면 더한 책임을 물으면 물었지, 그녀들의 상황을 이해해주고 보호해주는 그런 예는 전무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남성들은 자신들의 간음 행위를 여성의 유혹 탓으로 돌렸고 간음을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찾아가는 음탕하고 방종한 행위로 낙인찍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면서도, 버림받은 자기 아내가 이제 생존을 위해 다른 남자를 만나려고 할 경우 그 아내를 비난하고 간음한 여자로 몰아갔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등장하는 여성은 어땠을까요? 이 여성이 정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의 부도덕한 여성이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이 여성은 그저 남자의 소유물 이상의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던 한 남자의 약혼녀나 아내로서, 다른 남자에 의해 강간당하거나 성적 폭행을 당하고 있었던 그런 여성이었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자신을 그렇게 죄인으로 만든 당사자인 그 강간범은 현장에 함께 잡혀오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지금 그 여성을 잡아온 바리새인들 가운데 그 놈이 섞여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고, 여성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채, 바리새인들과 공모하여 그 여인을 미끼로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바로 그런 자리에서 예수님은 이 여성을 구원하는 동시에, 그 모든 남성들을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성을 죄인으로 보고 있는 너희들이야말로, 예수님 자신과 이 여성의 눈에는 죄인으로 보인다고 폭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장면은 민중이 아닌 이들, 오늘 본문에서 본다면 바리사이와 같은 이들이, 예수님 앞에 끌려온 여인이나 영상에 나온 여인과 같은 민중의 말, 그것이 중얼거림이건 비명소리이건 몸짓이건 간에, 그들의 그런 고통이 담겨 있는 말과 얼굴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귀머거리이자 소경임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이 에피소드는 민중신학이 민중에 대해 갖고 있는 문제의식, 더 정확히는 민중의 비언어적인 언표, 혹은 언표화되지 않는 목소리가 이 사회에서 ‘들리지 않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과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사실 어떠한 민중신학자도 “민중이 자신의 말을 할 수 없다”라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반대로 민중신학은 민중이 자신들의 고통에 대하여 말을 할 수 있다고 늘 주장해왔습니다. 이른바 그것이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민중의 자기초월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병무와 서남동 이래로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이 자신들의 고통을 끊임없이 토로하고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해온 것입니다.

동시에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의 그러한 말이 민중이 아닌 이들에게, 즉 이 사회의 다수자들, 소위 시민이라고 하는 그들에게 전혀 들리고’(hear) 있지 않다는 점에서, 민중의 고통이 민중의 한()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특히 서남동 목사에 따르면, 민중의 한()하늘에 호소하는 억울함의 소리, 무명(無名), 무고(無告)의 소리를 의미합니다. 물론 민중의 한은 민중이 벙어리라서 말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민중이 아닌 이들이 민중의 말, 그것이 중얼거림이건 비명소리이건 몸짓이건 간에, 그들의 그런 언어행위를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귀머거리이자 소경임을 시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신학자들이 민중의 언어가 갖는 독특성, 그 비언어적인 표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던 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드라마의 에피소드에 나오는 저 변호사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민중신학자가 ()의 사제역할을 한다는 것, 혹은 민중사건의 증언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언어적인이고 비합리적인 민중의 언어, 혹은 정치적으로 의식화된 운동이나 실천이 아니라, 사실상 이해 불가능한 퇴행에 가까운 집합행동 또는 일탈적인 자기학대 등으로 표현되고 있는 그런 실천 아닌 실천들 속에서 민중의 목소리, 민중의 고통을 읽어내고 그것을 증언할 수 있는 감수성을 발휘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민중신학자라면 왜 우리는 듣지 못하는가, 우리는 보지 못하는가, 무엇이 우리의 귀와 눈을 가리고 있는가를 폭로하는 비평가의 역할도 겸해야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증언과 폭로는 동일한 실천의 양면인 것입니다.

결국 민중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사실상 민중은 들릴 수 있는가라고 하는 우리 사회의 청음(聽音)능력 및 청음구조를 향한 비판적 질문의 반어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입니다. 최근에 민중신학에서는 그러한 민중의 고통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 언어화되지 못하고 있는 고통의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또한 그들의 얼굴을 정직하게 볼 수 있는 우리의 신앙적 감수성을 가리켜 사회적 영성’(social spirituality)이라 개념화하고 있습니다. 좀 더 민중신학적인 어법으로 말하자면, 사회적 영성이란 민중을 죄인으로 보고 있는 혹은 그렇게 보는 현실을 만들고 있는 이들의 그 눈을 멀게 하고, 즉 그들의 권력을 해체하고, 반대로 자신들을 죄인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 보지 못하는 자들이 스스로를 새롭게 볼 수 있게 하는 것, 즉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바로 설 수 있게 노력하는 신앙의 태도와 감수성을 말합니다.

이 설교의 본문과 연관시켜 본다면, 사회적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펼쳐나간 예수운동의 본질이자, 요한공동체가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계승해나간 예수따름의 본령을 잘 담아내고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영성을 체화함으로써 지금 이 땅에서 예수운동을 계승하기를 예수님은 혹은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전히 바라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가 우리 주변의 고통당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 얼굴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면서 그들에게 책임 있게 응답할 수 있는, 사회적 영성을 추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이 글은 천안살림교회 2014년 7월 20일 예배 설교문을 보완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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