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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바울신학가이드9] 바울과 종말론 I - 바울과 신비주의 I (한수현)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4. 8. 6.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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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가이드9]

 바울과 종말론

바울과 신비주의 I

한수현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 박사 과정)

 

보통 찬양집회나 기도회에서 흔히들 하는 기도를 들어보면 “주님 우리는 새롭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말을 듣게 된다. 현실의 삶에서 여전히 세상의 원칙에 휘둘리는 사람들의 기도는 마치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자체가 변화될 수 있다는 믿음위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왜 교회는 이리도 더디게 변할까? 오히려 더 나빠지는것 처럼 보일까? 왜 우리는 의롭게 되지 못할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구원의 인침을 얻었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왜 아무런 변화도 느낄수 없을까? 필자는 중학교 시절 여름 수련회를 다녀오면 마치 몇일의 기도와 말씀을 통해 나 자신이 변화되었다는 믿음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것을 느끼면서 믿음을 통해 나의 존재안의 신비로운 변화에 대해 의심한적이 있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전도사님마다 목사님마다 제각각이었다. 그 변화가 천천히 일어남으로 잘 모를수 있다는 말부터 그때 받은 성령이 제대로 된 성령이 아니었다는 말까지. 필자는 이 웹진에서 이 질문을 해결하려 하진 않는다. 다만 바울의 신학을 논하면서 바울이라면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까를 생각해보자.

20세기에 위대한 위인으로 우뚝 솓아있는 의사이자, 음악가이자, 신학자이자,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 스스로를 바친 알버트 슈바이쩌는 이러한 신비적 신앙이 바울을 오해해서 생긴것이라 말한 학자이다. 그는 Being-in-Christ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적 신비주의가 바울 신학의 핵심이며 그 핵심은 오로지 종말론에 대한 이해로부터 접근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통 바울신학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면 쉽게 대답하지 못하곤 한다. 비교적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방법은 바울신학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집이 토대로 하고 있는 기초가 무엇인지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제까지 그 기초에 대해 이야기 할때, 학자들이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라비닉 유대주의의 언약적 율법주의 사이에서 오랜동안 논쟁해 왔고, 각기 다른 구원론이나 기독론을 생산하였다고 하였다. 또 다른 학자들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라고도 했다. 또는 로마제국의 정치라고도 하였다. 위의 모든 것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겠지만 필자가 지금부터 소개하려 하는 것은 바울신학의 확실한 기초, 또는 동인은 바로 종말론 (Eschatology)라는 시각이다.

종말론이라는 말을 들은 독자는 “뭐 종말론이 어쩼다고?”라고 하고 쉽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시각 변화는 종래의 바울 신학의 근간을 흔들정도로 크다. 일단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에 큰 관심이 없다. “예수님이 곧 오십니다!”라고 종종 말하고,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금방이라도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 같다.”라고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세대에 예수의 재림을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만약에 정말로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면 일단 다음 세대에 대한 투자가 아무런 의미가 없고 현실에서 열심히 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데 세상을 떠들섞하게 하고 있는 말세론자들 이외에는 그러지 않는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메시아에 대한 소망은 점점 현실적 삶에 대한 고민으로 바뀌어갔다. 그것을 타협이라할 수도 있고 변절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결과로 교회와 신약신학에서 현실적 종말론은 오랫동안 심각하게 다루어 지지 않았다. 칭의라든가 구원이라든가 교회라는 주제들은 쉬지 않고 줄기차게 다루어 지지만 종말론은 요한 계시록 연구 정도나 전도 부흥회의 하루 프로그램을 장식할 뿐인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각주:1] 그러나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바로 내일 올지도 모를, 또는 자꾸만 연기되어가는 재림을 기다리는 긴장가운데서 하루 하루를 살았다고 생각해보자. 그러한 생각이 그들의 삶과 신학에 끼친 영향을 우리가 간과할 수 있을까? 재림에 대한 믿음 하나은 때로는 교회의 교리를 송두리채 바뀌고, 온순한 사람들조차 생명을 아끼지 않는 순교자로 변모시키는데, 종말론에 대한 숙고 없이 우리가 신약성서를 또는 바울서신을 재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종말론에서 부터, 종말론에 의해, 종말론을 통해 바울 서신을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하나의 체계적인 해답을 거의 최초로 제시한 신약학자가 바로 알버트 슈바이쳐이다.

슈바이처를 신약학자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지만 신약신학도들에게 슈바이처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지워질 수 없는 자취를 남긴 위대한 통찰이었다. 당시의 예수를 인류 역사의 혁명가나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연구해야할 인물로 보았던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서 예수를 종말의 시대의 예언자이며 메시아 왕국을 더 빨리 오게 하기 위해 자신을 역사의 수레바퀴에 던진 인물이었다고 슈바이처는 주장하였다. 그의 연구의 영향력은 그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묘사보다는 당시 자유주의적 예수연구에 대한 준엄한 일침에 이었는데, 그 이후로 예수를 일반적 위인으로 그리거나 위대한 사회주의자로 서술하는 경향에 마침표를 찍었을 뿐 아니라, 역사적 예수를 그리는 이들은 예수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이나 자신이 원하는 얼굴을 그릴뿐이라는 위대한 통찰을 보여주었다. 이에 반해, 그의 바울에 대한 연구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슈바이처는 아프리카 선교사역중에 안식년을 받아 독일로 돌아와 ‘바울과 신비주의’를 저술하였는데 보통은 바울을 종말론적 지평에서 서술한 첫번째 저작으로 소개될뿐이었다. 그의 ‘바울과 신비주의’라는 저작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그의 연구에 비해 평가절하된 경향이 있다. 첫째로 유대교적 종말론에 중점을 두는 그의 연구가 당시의 헬레니즘을 중심으로 바울을 연구하던 경향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개신교 바울신학이 바울의 칭의론에 대한 연구에 매몰된 나머지 칭의론을 바울신학의 핵심으로 보지 않는 슈바이쳐의 저작을 다룰 수 없었기 때문이라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이번 글에서는 슈바이쳐의 저작을 중심으로 종말론을 통해 바울의 저작을 새롭게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슈바이처의 통찰이 상당히 설득력 있음을 살펴볼 것이다.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 과 종말론(Eschatology)

보통 요한계시록 또는 요한묵시록으로 대표되는 세계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위주의 다큐멘타리들의 단골 소재이다. 사탄이나 세계종말에 대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성서는 주요 자료로 쓰여지고 보수적인 교회나 신학에서는 실제 종말의 시기에 대한 추측이 주요 논쟁의 쟁점이 되기도 한다. 슈바이쳐와 바울의 종말론을 다루기 이전에 먼저 간단히 성서학에서 말하여지는 종말론이나 묵시문학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 보자.

종말론(Eschatology)은 끝을 뜻하는 헬라어 에스카톤(Eschaton)과 지혜나 지식을 뜻하는 (logos)로 부터 나온  로지(logy)의 합성어로써 역사의 종말에 대하 논하는 학문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마치 크리스토로지(Christ+logy)가 ‘기독론’또는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해 논하는 학문인 것과 같다. 바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누군가가 “당신의 역사의 끝이 어떻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까?”라고 묻는다면 당신의 생각이 어떻든 어느정도 논리적으로 생각을 설명하려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종말론이된다. 이 ‘종말론’이라는 것이 성서와 연결되는 이유는 성서에서 인류역사의 마지막에 대한 말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으며 굳이 성서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상당히 넓은 학문이다. 그 논의중에 성서와 연결시킬때 종말론과 성서간의 연결점이 생겨난다.

성서를 펴고 세계 종말에 대한 말들을 찾아보면 바로 눈의 띄는 것이 있는데, 그 구절들은 다니엘서와 요한 계시록에 분명하게 나타나고 복음서들에 몇몇 구절들 바울서신들에서도 몇몇 구절들이 보인다. 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고백과 기록이고 바울서신은 바울이 썼던 편지들이고 세계의 마지막에 대한 구절은 극히 일부이며 그 묘사도 단편적인 서술에 그치므로 복음서는 복음서로 부르고 바울서신은 그야말로 편지라고 부르지만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는 세계종말에 대한 나름 역사적이고 전체적인 서술이 보이는바, 이 둘을 묵시문학(Apocalyptics Literature)이라고 부르고 이를 하나의 문학적 장르로 구분한다. 시의 형식을 가진 글을 시라고 부르고, 소설의 형식을 가진 글을 우리가 소설로 부르듯이 인간의 글을 근대에 들어와서 여러 형식으로 분류하고 그 형식에 따라 이름짓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존 콜린스 (John J. Collins)로 대표되는 묵시문학 연구집단은 묵시문학이라는 하나의 형식적 장르를 만들고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묵시문학이라 불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당시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적었던 사람이나 사람들은 세계종말에 대해 말하고 기록한 어떤 전통과 형식에 따라 둘을 저술했다는 것이다. 곧, 유대주의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안에 종말에 대해 서술하고 발전시켰던 전통(마치 예언 전통이나 지혜 전통과 같이)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묵시문학 장르를 하나의 구성된 문학적 흐름으로 보는 사람들은 묵시문학을 읽는 형식화된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마치 우리가 시를 읽을때 소설을 읽는 것처럼 읽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묵시문학이라는 장르를 확립하고 찾아보면 성서 이외에 외경과 위경에 묵시문학이라고 볼 수 있는 글들이 있는데 보통의 분류는 다음과 같다. -1 (Ethiopic Apocalypse of) Enoch, 2 (Slavonic Apocalypse of) Enoch, Sibylline Oracles, 
Treatise of Shem, Apocryphon of Ezekiel, Apocalypse of Zephaniah, The Fourth Book of Ezra, Greek Apocalypse of Ezra, Vision of Ezra, Questions of Ezra, 
Revelation of Ezra, 
Apocalypse of Sedrach
, 2 (Syriac Apocalypse of) Baruch, 3 (Greek Apocalypse of) Baruch, Apocalypse of Abraham, Apocalypse of Adam, Apocalypse of Elijah, Apocalypse of Daniel.-[각주:2] 그리하여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과 함께 앞에 언급된 글들을 모두 묶어서 묵시문학이라 한다. 묵시 또는 묵시록(apocalypse)으로 번역할 수 있는 Apocalypse는 성서학에서는 보통 묵시문학과 같은 용법으로 쓰인다. 그리고 묵시사상(Apocalypticism)은 세계 종말에 대한 관점으로 시작하는 세계관이나 생각들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묵시문학의 근원이나 형식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언급하기로 하고, 묵시문학이 성서학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해 간단히 생각해 보자.

구약성서 또는 히브리 성서가 기록된 시대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겪은 길고 긴 식민지 시대였다. 이전까지 유대국가들의 기둥역할을 하였던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제사장 전통과 그 대척점의 예언전통, 그리고 왕정시대의 역사를 기록했던 신명기사가등의 역사서술 전통과 왕국의 엘리트를 중심으로 발달했던 지혜전통의 시대가 국가의 몰락과 함께 끝이나고 있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지혜전통의 민초들의 삶의 지혜로, 예언전통등과 함께 작게나마 명맥을 유지했다.) 끝나지 않는 식민시대와 오지 않는 다윗왕국의 부흥에 지쳐갈 무렵, 새로운 종교 전통이 유대사상안에서 태어났다.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이 심판과 함께 불현듯 세계밖에서 온다는 새로운 형식의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이른바 묵시전통이라 불리게 된 유대정신사에 새로운 계기가 된 이것은 종말론이라 불리우는 역사의 끝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이전가지의 유대 전통속에서 생산되어온 신학들은 이를 통하여 새롭게 조명되게 되었다. 중요한 몇가지만 살펴보자.

이전까지의 유대전통은 인간 사회와 현실적 상황에 대하여 민감했을뿐 아니라 정력적으로 참여하였다. 예언전통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정의에 대해 준엄한 비판의 메세지를 생산하였다. 지혜전통은 나름대로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법칙과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을 제공했다. 이에 반해 묵시전통은 현실세계를 곧 하나님의 심판속에 사라질 곳으로 여긴다. 현실 정치와 그 위정자들은 심판의 대상이긴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대상인듯 보인다. 사회의 정의보다는 과연 누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라 말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속화된 기독교적 묵시운동이라고 볼 수 있는 다미선교회 사건을 생각해 보면 묵시전통이 가지는 부작용을 좀 더 쉽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묵시전통이야말로 기독교에 폭팔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어준 위대한 종교적 운동이자 현대사회와 기독교에서 반드시 기억되고 새롭게 논해져야할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와 묵시전통과 종말론을 통한 현대 기독교 갱신의 문제를 천천히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일단 지금은 알버트 슈바이처와 함께.


바울의 신비주의와 종말론

신비주의(Mysticism)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보통 ‘초월적 실재와 하나되는 즉각적인 체험’이라고 나와있다. (브리테니커 참조) 흔히 바울의 신비주의라고 하면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언급한 삼층천의 체험등을 언급될뿐 신비주의는 바울에게는 조금은 생경한 주제이다. 슈바이쳐가 바울의 신비주의를 언급할때, 초월적 실재인 신과 하나되는 체험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점에서 슈바이쳐는 명확한데, 그는 바울의 신비주의는 Being-In-Christ라고 말한다. 다른 표현으로 Christ-Mysticism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바울의 서신을 읽다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자들의 관계가 자주 앤(en-헬라어)/in(영어)의 표현으로 자주 등장한다. In Christ, 예수 안에서 라는 바울이 즐겨 표현하는 말은 구원에 대한 논증에서 부터 믿는자의 실제 생활에 대한 윤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보통은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믿는자가 참여한다는 상당히 형이상학적인 해석을 붙이는 경우가 많지만 슈바이쳐는 바울이 직접 말하는 바와 같이 예수안에 연합된다는 표현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실제적 경험”을 느낀다는 것이다.[각주:3] 그러기에 슈바이처가 보는 바울에게는 헬라적인 신비주의의 자리는 없다. 보통 헬레니즘에서 부활은 재생(rebirth)으로 해석된다. 헬라세계의 신화에서 부활은 흔히 죽고난 후에 새로운 생명체로 다시 태어난다. 보통 기독교에서 중생이라고 표현되며 요한복음의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속에 나타난 ‘불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을 뜻한다. 비록 요한복음에서는 헬라적 표현으로 중생의 개념이 나오지만 슈바이쳐는 바울에게는 믿는자의 중생은 없다고 말한다.[각주:4] 적어도 바울에게는 성령을 받으면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생거짓말이라는 말이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자신의 선행을 위한 무능력을 토로하듯이 인간의 신성화(deification)는 바울에게는 낯선 개념이며,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은 “세례의 순간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각주:5]

이러한 바울의 신비주의를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 슈바이쳐는 그의 신학 저서에서 예수와 바울을 헬라적 종교관과 세계관으로 해석하던 당시 독일 신약신학계를 통렬히 비판한다. 예수와 바울은 온전히 유대적 세계관에서, 특별히 종말론적 세계관에서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보편적인 종교개념과 역사관으로 예수를 우주적 정의와 사랑을 외친 혁명가나 현자로 그리고 바울을 그런 예수의 가르침을 고등종교의 형태와 사상으로 발전시킨 사람으로 보던 당시의 연구가 가지는 한계가 슈바이쳐에게는 너무도 분명하게 보였다. 헬레니즘적 심볼리즘에 치우친 기독교 신비주의는 개신교에 두가지 성례전, 세례와 성만찬을 형식적 종교제의로 변모시켰다. 원래 바울에게는 이 두개의 성례전은 예수와 함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는 유일한 통료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심볼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성례전은 마술과도 같은 효과를 보장한다. 세례를 받는 것으로 죄의 사함을 얻고 성찬에 참여함으로 예수의 몸과 피와 연합한다. 이는 신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에 참여함으로 인간은 신의 영역을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신앙의 목적은 불멸의 삶이다.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불멸의 삶이 신앙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각주:6] 필연적으로 윤리적 관점은 뒷전이된다.

바울의 신학은 어떻게 불멸의 삶을 얻을 것이냐?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의 관심은 새롭게 변화되는 세계내에서 살아가는 믿는자의 운명이다.[각주:7] 세례는 이제 자신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들어간다는 시작을 의미할뿐, 그것 자체가 가지는 마술적 효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공동체에게 세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들어간다는 세례식을 시작으로 믿는자는 완전히 다른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되는데, 바울은 서신을 통해 과연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가르쳐 주고 싶었다. 첫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지금까지 세계를 지배해 왔던 세력의 시대가 끝이났다. 곧 종말의 시대가 막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묵시문학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사탄의 세력인데 그들에게는 무저갱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에게 이제 심판이 임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예수의 죽음은 그와 연합하여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죄를 해결해주었다. 셋째, 이제 믿는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선택받은 자로써 마지막 메시아가 통치하는 제국의 수혜자가 된다.[각주:8] 이러한 변화 이후에 곧 새하늘과 새땅이 시작되고 선택받은 자들은 메시아 왕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바울의 서신을 살펴보면 바울은 예수가 금방이라도 재림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살전 1:10, 2:19, 3:13, 4:23) 비록 학자들이 후대의 바울서신에 지연된 종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고 하지만 바울이 그리 멀지 않은 때의 재림을 의심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각주:9] 그러므로, 슈바이처는 바울이 말했던 여러 주제들은 모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종말의 시대, 곧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시대적 배경을 통하여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교리, 이신칭의 (Justification by Faith)조차도 종말론적 지평에서 읽어야 된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바울의 종말론적 신비주의와 구원론

보통 “구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대답할까? 아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의 확신이나 하나님앞에서 부끄럽지만 의인으로 바로선 자기 확신정도의 대답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위 시한부종말론자들에게 구원이 무엇인지 물으면 어떤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그들에게 구원은 아마도 이 세계가 끝장이나고 맞이하는 영광의 시대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바울의 구원론이 현재에서 오해되는 결정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슈바이처는 생각했다. 종말론적인 지평에서 구원이란 메시아 왕국의 시작을 뜻한다. 이는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 사이에 일어나는 일종의 거래가 아니다.[각주:10]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는 죽음과 고통의 시대만이 아니라 앙겔로스(angel)의 시대이다. 여기서 앙겔로스는 흔히 영어로 angel로 번역되어 우리에게 ‘천사’로 다시금 이해되지만 원래 헬라어 ‘앙겔로스’의 의미는 메신저, 또는 심부름꾼을 뜻한다. 유대의 묵시문학에서 하나님의 심판이전의 시대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에녹서에 따르면 창세기 4장 전반에 나타난 천사들의 반란은 금세 진압되었지만 그들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악마 (Demon)들이 세상의 골칫덩이로 남게 되는데 그들의 왕인 사탄(Satan-디아볼로스)은 인간의 사악함을 고발하는 자로써 하나님에게 심판날까지 세상에서 거주하는 것을 허락받게 된다. 사탄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는 시기가 바로 메시아가 나타나는 시기이며 바로 구원의 시대인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 가지는 첫번째 의미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새로이 시작된 시대를 의미한다. 그러나 묵시문학의 기록을 보면 메시아 왕국의 시작 이전에 환난의 시대가 시작된다. 그 환난의 시대에서 믿는자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고난을 감내함으로 그들의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는데, 바로 그 믿는자가 받아야할 고난을 대표하여 죽은자가 바로 예수이다.[각주:11] 바울의 이러한 해석에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두개의 전승, 속죄적 죽음에 대한 제사전승(고전 15:2)과 메시아니즘(롬 1:4, 빌 2:8-11),을 종말론적 지평아래에서 종합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즉, 곧 도래할 메시아 왕국을 위해 예수는 죽음으로 환난의 시대의 고난을 대신 지고 부활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연것이다. 결국, 바울에게 구원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선택받은 자들이 하루 하루 이루어 가는 것이다. 역사의 종말의 시기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바울에게 중요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고, 보통 대충 넘어가는 바울의 윤리적 권고나 믿는자에 대한 충고들이 바울서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긴장을 바울을 신학에서 제거해 버릴때 나타나는 부작용이 바로 믿음만을 부르짖는 신앙이고 윤리를 강조함을 율법적으로 비판하는 복음이다. 현대 기독교의 도덕적 타락을 근본적으로 논의 하려면 바울신학에서 종말론을 제하여 버린 신학에서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신칭의?는 율법페기론은? 루터가 말했듯이 오직 믿음으로!라는 바울의 목소리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다음 원고에서 슈바이쳐가 종말론적 지평을 가지고 이제껏 개신교회들이 금과옥조로 섬겨왔던 구원론에 대한 시각을 교정해 나가는 것을 지켜보기로 하자.  

Charlesworth, James H. The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Vol. 1: Apocalyptic Literature and Testaments. 1 edition. Garden City, N.Y: Doubleday & Company, 1983.

Schweitzer, Albert.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Baltimore, Md: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8.


ⓒ 웹진 <제3시대>



  1. 소위, ‘위기의 신학’으로 불리는 몰트만의 신학이나 불트만의 제자인 케제만등이 종말론적 신학과 신약신학을 말하였고, 두번의 세계대전이나 밀레니엄의 때에 종말론이 자주 언급되긴 하였지만 신약을 이루는 중요 주제로써 꾸준히 다루어지거나 조명된 것은 최근에 이르러서이다. [본문으로]
  2. Charlesworth, The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Vol. 1, 4. [본문으로]
  3. Schweitzer,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16. [본문으로]
  4. Ibid., 15. [본문으로]
  5. Ibid., 17. [본문으로]
  6. Ibid., 23. [본문으로]
  7. Ibid. [본문으로]
  8. Ibid., 25. [본문으로]
  9.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서 로마서는 율법에 관한 논쟁이 주를 이루지만 여전히 종말론적 믿음이 보여진다. (갈라디아서 1:4, 4:10; 고린도전서 7:29;31, 10:11, 6:3, 3:13-15, 11:26, 26:22 고린도후서 1:14, 5:10, 11:2; 로마서 8:19;11;12, 16:20; 빌립보서 1:6, 1:10, 2:10, 3:20-22, 4:1-5) [본문으로]
  10. Schweitzer,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54. [본문으로]
  11. Ibid., 6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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