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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제주 종달리 이야기: 공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窓 (이상철)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4. 9. 5.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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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종달리 이야기

- 공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窓

이상철
(한신대 외래교수)

 

Intro: 내게 있어 제주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곳은 제주다. 내 인생의 처음 10년을 이 섬에서 지내고 나는 10살이 되던 해에 서울로 이주했다. 그 10년으로부터도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제주는 내 의식 속 심연, 라깡적으로 말하면 상상계(the imaginary)와도 같은 곳이다. 온갖 상징적 질서가 지배하는 서울을 피해 부모님이 살고 계신 이 곳 제주에 오면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할 때 느꼈을 상실과 소외가 역으로 잠시나마 회복되는 것을 점점 강하게 느낀다. 하지만, 나는 제주에 대한 선명한 자기의식이 없다. 상상계속 희뿌연 신기루 같은 기억의 조각들뿐, 그 어느 것 하나 나는 제주에 대해 명확히 설명할 자신이 없다. 그러던 차에 이번 제주 방문에서 7년째 제주 종달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내 신학교 동기 이재송 목사가 쓴  『종달 人, 종달 In 제주동네여행』을 선물로 받았다. 그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내 상상속 무의식의 영역에 존재했던 제주에 대한 해무가 걷히기 시작했고, 이 글은 그것에 대한 수줍은 고해성사다. 


Book Review: 『종달 人, 종달 In 제주동네여행』 (글+사진 이재송. 주훈/ 너의 오월, 2014)[각주:1]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인문사회과학분야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가 지역학(Area Studies)이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내부적으로는 90년대 이후 다시 시행되고 있는 지자제 선거와 외부적으로는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저물며 몰아닥친 세계화 영향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큰 틀에서 여러가지 지역학의 연구주제들이 있어왔고, 그것은 결국 궁극적으로는 공간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해야 할텐데, 하지만 애석하게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공간이란 삶의 터전이 아니라 돈벌이를 위한 토대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다. 용산, 밀양, 강정은 말할 것도 없고, 뉴타운 정책, 4대강 사업 등을 통해 우리는 익히 이를 혹독하게 경험했거나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진정한 대안적 공간은 가능한가?’ 라는 고민과 갈등이 언제부터 우리의 화두가 되어왔지만 그 성과는 그리 높지 않았다. 아마도 이론적 논의에 걸맞는 실제적 성과가 미흡했던 탓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나와있는 종달리 사람들의 ‘종달리 살기’는 삶-공간에 대한 숙고를 도모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모멘텀을 제공한다. 

그렇다고 이 책이 진정한 유토피아가 실현되는 새로운 희망의 공간을 창출하자고 목에 핏대를 올리는 것은 아니다. 그냥 독자로 하여금 책을 읽는 동안 가만히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꿈을 꾸게 하고, 책을 덥고 나서는 종달리 사람들을 통해 조금씩 실현되는 ‘삶-공간’에 대한 기대와 응원과 희망의 마음을 갖게끔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최대 미덕이 아닐까 싶다. 


종달리를 아시나요? 

이 책의 저자 이재송은 제주 종달리를 갈릴리에 비유한다. 성전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예루살렘에서도 가장 먼 지역에 위치하였던 땅 갈릴리! 그 곳은 온갖 이주민들이 얽히고 설켜 복잡한 인적 지형을 이루고 있었던 공간이었고, 오랜 세월 동안 침략과 수탈로 인한 상흔을 깊게 간직하고 있었던 공간이다. 그 탄식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메시아에 대한 강력한 열망을 낳았고 그 에너지가 예수라는 한 사내에게 응축되다 빅뱅을 일으켰던 땅이 바로 갈릴리다. 

갈릴리가 이스라엘 맨 끝에 위치해 있었던 것처럼, 종달리 역시 제주 동편 끝에 위치한다. ‘종달(終達: 통달함을 마쳤다)’은 말 그대로 맨 끝에 있는 땅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때 제주목사가 부임하면 섬 전체를 순시하고 마지막으로 당도하는 지역이 종달리였다고 한다. 거리상으로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그보다는 심리적으로 인격적으로 제주중심에 살던 사람들이 종달리 사람들을 향해 느끼는 거리감에 대한 표현이 ‘종달’이라는 마을이름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지 않나 싶다.  

실제로 이재송 목사에 의하면 종달리는 관광객은 물론이고 제주 사람들에게 조차 흐릿한 지역이라 한다. 근처 성산 일출봉, 우도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종달리를 아세요?’ 라고 물으면 선뜻 자신있게 대답하는 제주사람들이 드물다는 것이다. 이렇듯 종달리는 그동안 철저히 묻혀 있었던, 책의 표현대로 라면 ‘제주의 속살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지역이다. 그런 종달리로 지금 이주민들이 하나 둘씩 들어와 정착하면서 새로운 마을 공동체가 형성되고 있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종달리 사람들의 분포는 다양하다. 넓게는 원주민과 이주민으로 분류할 수 있겠는데 둘은 공히 종달리가 천박한 자본의 논리에 희생당하지 않은 채, 자연과 환경이 잘 어우러진 지금 현재 본래 모습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염원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를 닮았다. 


종달리 사람, 사람들…

최첨단 테크놀로지로 무장되고 세계 10대 무역대국의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 사회가 왜 이토록 이제는 손을 댈 수도 없는 총체적 위기에 시달리는 것일까?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이유가 근본적으로 마을의 상실, 마을의 상실로 인한 함께 사는 공동체의 상실에 원인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점은 책의 첫 장부터 강조되고 있다. 제주 올레길 종달리 부근을 걷다 만난 남자와 여자는 나중에 그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을 하였고, 후에 종달리로 내려와 ‘동네’라는 카페를 열었다. 그들은 말한다. “동네라는 공간이 그 사람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요”(39). 동네가 더 이상 사람의 냄새가 나는 공간이 아니라 투기의 대상이 되어버린 일상에서 종달리에 정착한 이 신혼부부의 한마디는 그 동안 잊고 살았던 우리의 지난날을 환기시면서 이후 전개될 내용들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을 부추긴다.

제주도에 있는 카페하면 바다를 연상시킬텐데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에 카페를 짓고 “바다는 안보여”라는 제목을 부친 기이한 사람이 있다. 옛날 드라마에 나오는 읍내 다방의 업그레이드 버젼이랄까. 서울 생활의 고단함을 멀리하고 제주로 내려와 2014년 올 3월 1일 카페를 연 그이는 “(카페)’바다는 안보여’가 정말로 바다는 안 보이지만 충분히 쉴만한, 가치있는 공간이지요. 제주에 카페가 있다면 바다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고정관념이죠. 꼭 바다가 보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50) 그러면서 자발적 가난에 대한 나름의 소신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서울살이에서는 조직사회 속에서의 압박과 심리적 부담감이 컸습니다. 그렇지만 제주로 온 이후 수입은 줄었지만 스트레스도 함께 줄었거든요. 물론,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있지만 버릴 것은 버리고 현재를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56)

종달리, 아니 제주 동부에서도 유일한 서점이 종달리에 있다. 그 이름은 “소심한 책방”이다. 1인 출판사 ‘밑줄’의 대표인 서점 사장님 미라씨는 본래 섬진강에서 주막을 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녀가 제주여행중인 남편을 만나러 왔다가 종달리의 매력에 흠뻑 빠졌고 그 후 이곳에 살면서 종달리에 없는 것을 한 번 해보자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 서점 “소심한 책방”이다. 서점에 진열된 책들은 교보, 영풍의 베스트셀러 목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순전히 책방 주인이 추천하는 책들이다. 특별히 문단 등단에 실패한 사람들이 직접 차린, 대표적 문단권력이라 할 수 있는 ‘문학과지성사’를 패러디한, ‘문학과죄송사’의 책들이 이채롭다.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 종달리와 어울리는 종달리스러운 서점이다. 책방 주인장의 바램이 있다면, “제주 그리고 종달리에서 가장 오래된 가장 작은 서점이 되는 것”(72)이란다.  

마을 한가운데서 ‘도예시선’이라는 도자기 공방을 운영하는 이주민 미현씨는 대중과 동떨어진 예술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면서 머그컵도 굽고, 접시도 굽는다. 작업실 겸 카페인 공간에서 도자기 굽다 커피도 마시고, 사람들에게 도자기 굽는 강습도 하면서 그이는 그저 자기와 대화 할 친구 한두 명의 소중함에 대해 터득해 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종달리에 정착하고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94)는 신앙고백을 한다. 

아프리카에서 10년간 구호기관 활동가로 생활하다 2013년에 귀국한 하은이네는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선물이 좋은 자연환경과 공동체성이 강한 마을에서 살게 해주는 것이라 믿는다. 이런 확신 속에서 종달리를 택한 하은이네는 “집은 미래를 위한 투자의 수단이 아닌, 나와 내 가족이 삶을 사는 곳”(122)이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이해 안 되는 이 순진한 전직 아프리카 거주민은 제주도가 아프리카와 많이 닮았다고 결론짓는다. “제주도는 아프리카와 많이 닮아서 좋아요. 아프리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어요. 예를 들면 ‘느림의 미학’ 같은 거?”(130) 어쩌면 종달리는 미쳐 분주히 돌아가는 세상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본래 우주의 속도, 우주의 운행을 다시 느끼고 회복하게 만드는 블랙홀 같은 곳일지도 모르겠다.  

종달리의 또 다른 명물 ‘로로하우스’! 헤어스타일리스트 남편과 연극배우 아내가 두 아들, ‘서로’와 ‘나로’를 데리고 종달리로 들어와 두 아들의 돌림자를 따서 ‘로로하우스’를 오픈하였다. ‘로로네 집’은 의자가 하나 밖에 없어 예약제로 단 한 사람의 손님밖에 받을 수 없는 헤어숍과 역시 단 한 명, 한 가족만 받을 수 있는 빈티지 독채 민박을 고수하는 게스트하우스가 함께 있는 공간이다. 그 부부는 종달리에서 느끼는 삶의 보람을 다음과 같이 적는다: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고 기쁨을 주는 데서 오는 것 같아요. 많은 시간 동안 많은 사람을 상대해서 일한다면 돈이야 많이 벌겠지만, 그런 보람을 얻기 어렵고요. 결국, 행복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 하는 가치관의 문제겠지요.”(140) 효용과 효율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단 한 사람의 가치를 우선 소중히 여기겠다는 이 당찬 부부도 흥미롭지만, 이 범상치 않은 사람들을 넉넉히 품고 있는 종달리의 지력(地力) 또한 만만치 않다. 

이 책에는 이주민들의 종달리 정착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토착민들이 이주민을 바라보는 마음, 그리고 종달리의 미래에 대한 염려와 희망의 메시지 또한 마련되어 있다. 제주로 시집와 40년째 살고 있는 본인 스스로를 ‘제주사람이 된 육지사람’이라 소개하는 ‘순희밥상’을 운영하는 순희씨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주민들이 잘 정착할까?’ 안스럽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마음이 늘 짠하단다. 그 따뜻한 마음이 ‘순희밥상’의 식탁에 고스란히 전해져 종달리로 이주해온 사람들이나 여행객들로 하여금 집 밥의 그리움을 잠시나마 잊게한다. 오늘도 종달리에는 순희밥상의 밥짓는 냄새가 자욱하다.    

종달리에서 감귤농사를 하는 토박이 농삿꾼 재민씨는 제주 곳곳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파헤쳐져 본연의 모습이 파괴되는 것에 대해 안타까와한다: “개발이냐, 보존이냐 하는 문제로 세대 간 혹은 이해당사자 간의 갈등이 생겨납니다. 제주 전체가 앓고 있는 난개발에 따른 문제들이 종달리에서 만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예요”(109) 제주 원주민으로 지난 제주 역사에서 육지 것들에 의해 자행된 수탈과 만행의 역사를 알고 있는 재민씨로서는 이런 염려의 마음이 생기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재민씨가 마지막에 던진 투박하고 담백한 말 한마디에서 앞서 언급한 종달리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접한다: “종달리가 가진 우리라는 개념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112) 


다시, 공간을, 그리고 사람을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공간이라고 할 때 그것은 마치 물건을 담는 콘테이너처럼 무엇인가 채워져있는 혹은 무언인가를 채워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공간이란 콘테이너에서 화물을 하적하고 남는 텅 빈 공간도 아니고, ‘화물을 꽉 채우고 더 이상 들어갈 공간이 없다’라고 했을 때의 그 꽉 찬 공간도 아니다. 즉 공간이란 물건이 차면 사라지고, 물건을 비워버리면 남게 되는 그런 공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공간은 항상 사람과 사건과 함께 하는, 사람과 사건이 자아내는 관계에 의해 재구성되는 공간이어야 옳다. 그 관계가 무르익으면 사건이 되고, 그 사건이 쌓이면서 역사는 발전해왔다. 그리고 그 사건과 역사는 기억의 형태로 보전되고 유전된다. 다시 말해, 공간과 인간은 각각 주어진 실체가 아니라, 상호 관련성 속에 형성된다는 것이고, 이는 공간이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을 통해 재구성됨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과정과 공간적 형태는 긴밀히 연결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이런 이론적인 안내들을 접하면서 느꼈던 감흥보다 종달리 이야기를 한 장씩 넘기며 받은 감동이 더 크다. 이론적 현란함보다 실천하는 우직함에 더 마음이 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종달리 사람들로 인해, 그 사람들의 사연과 행위와 연대를 통해, 제주 동편 끝자락에 위치했던 물리적 공간이었던 종달리가 가장 제주다운 공간으로, 가장 창조적이고 유니크하고 자유로운 삶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상황을 종달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새로운 ‘공간과 인간의 현상학’이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이 사건의 중심에 교회가 있다.  


다시, 교회를 향해 헛된 희망을 품다

10년 만에 귀국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현재 한국사회에서 교회라는 말처럼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단어가 또 있을까?”였다. 그 원인과 이유에 대해서는 나보다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더 잘 아시리라 믿어 생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로서 신학자로서 교회에 대한 성찰과 대안적 모델을 놓고 고민하고 있던 내게 책을 통해, 그리고 직접 찾아가 본 종달교회는 이 시대에 교회가 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었다.

이 책의 마지막 Chapter는 ‘이주민과 원주민의 교차로 종달교회’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종달리로 처음 접어들어 마주하는 건물이 바로 종달리에 하나뿐인 교회인 ‘종달교회’다. 이 교회를 목회하는 이재송목사는 부임 7년 차의 어엿한 종달리 이주민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예전 교회와 지금 교회의 차이점을 굳이 말하자면 ‘개방성의 차이’인 듯싶습니다. 교회가 위치한 곳은 변하지 않았지만, 예전의 교회는 사람 키만큼 높은 담과 그 위로 나무들이 빽빽하게 심어져 있어서 도로변에서 교회가 잘 보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교회 담을 허물고 어디에서나 훤히 보이게 되었죠. 그래서 이제는 종달교회가 이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178)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리고, 자기들만의 성을 쌓고 세상과 단절된 기존의 한국교회와 달리, 종달교회는 막힌 담을 허물고 세상과 화해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하면서 저들만의 교회가 아닌 우리의 교회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이재송 목사는 이 지역에서 ‘가제트 목사’로 통한다. 옛날 어렸을 때 자주 불렀던 만화영화 ‘천하무적 짱가’의 주제가,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짜-짜-짜-짜-짜 짱가 엄청난 그 힘이 틀림없이 틀림없이 생겨난다~”처럼, 이재송 목사는 종달리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곳으로 달려간다. 새로 이주해온 사람들의 이주로 인한 고민들, 그리고 실질적인 어려움들을 함께 나누고 해결하는 일, 이주민들을 향한 토착민들의 경계의 마음을 풀어주고 환대케 하는 일등 교회를 통해 토착민과 이주민들이 하나가 되게 하는 이벤트를 구상하느라 여념이 없다.[각주:2]

이러한 그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었을까? 최근 종달교회에 신선한 바람이 불고 있다고 이재송 목사는 들떠있다: “그 바람은 여러 가지 꿈들을 품고 이주하신 분들이 저희 종달교회의 가족이 되신 겁니다. 시골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은 꼬마가 있고, 그 아이들의 부모님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백발이 성성한 노인분들만 지키는 시골교회와는 다른 분위기가 펼쳐지게 된 것이지요. 그야말로 남녀노소 모든 세대가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운 신앙공동체가 되어가는 중입니다.”(184) 


종달리 하늘을 향해 다가오는 잿빛구름

이렇게 상기된 채 종달리 이야기를 하는 이재송 목사 앞에서 나는 아무런 말을 못했다. 종달리에서 벌어지는 변화에 대한 환희 못지 않게 앞으로 불어 닥칠 미래에 대한 염려도 함께 보았기 때문이다: “제일 큰 건 역시 땅값이 오르고 있는 점이에요. 개발에 대한 부정적인 면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마을을 떠나려는 마음이 아니라면 자기생활 터전만 지키며 살고 있는 원주민들에게는 땅값이 오르는 것은 꼭 좋은 면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어차피 여기 땅을 팔고 다른 데 가서 살려고 해도 그쪽 땅 값도 많이 올랐을 테니 땅값이 오른다고 해도 돈을 벌 수 없는데, 괜히 마음만 들쑤셔 놓는 거죠.”(111-112) 오랫동안 제주에서 그 땅을 일구며 살았던 토박이 농삿꾼 재민씨의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간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원리, 곧 자본축적의 논리에 의해 재구성된다. 자본주의의 과거는 생산과 소비를 공간적으로 분리시키고, 자본의 축적과정에서 공간을 끝없이 분할하고 확장시켜왔던 역사였다. 문제는 이를 통해 축적된 부가 일부 계층, 일부 지역에 집중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내부 모순을 은폐하고자 현대의 자본은 도로, 항만, 주택 등 대단위 건설투자를 확대하고, 이 공간들에 대한 투자를 통해 자본은 땅 값 상승 또는 은행 대출을 통한 돈놀이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은 이윤의 창출을 이러한 금융자본의 논리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한국경제의 발전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패턴을 가장 단기간 동안 가장 농축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다. 

제주는 이러한 한국자본주의 운행과정에서 소외지역에 있었던 공간이었다. 하지만, “제주특별법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이 발효된 이후, 무비자 입국이 가능해 진 까닭에 년 천 만 명에 이르는 국 내외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고, 중국 투기 자본이 걷잡을 수 없이 제주로 유입되면서 임야, 대지, 건물 등을 무차별적으로 사들이고 있다. 마치 암세포가 온 몸에 퍼지듯 흉악한 자본의 법칙이 서서히 번져나가는 제주 땅에서 이 책에 기록된 종달리 사람들은 지금의 일상을 계속 누릴 수 있을까?  

 

에필로그: 쫄지마, 종달리!

순희씨는 본인의 말대로 5년 후인 70세까지 ‘순희밥상’을 잘 운영해야 할텐데. ‘로로하우스’내에 있는 1인 미용실에서 머리를 야하게 짜르고, 바다가 보이지 않는 카페 ‘바다는 안보여요’에 앉아 바다 바람을 쐬다 스르르 잠에 들면 얼마나 꿀맛일까. ‘소심한 책방’에서 방금 구입한 ‘문학과죄송사’에서 나온 책들을 낄낄거리며 읽고도 싶고, 마을 한복판에 자리 잡은 ‘도예시선’에서 ‘사랑과 영혼’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도자기도 굽고 싶다. 그렇게 마을에서 놀다가 주일이 되면 ‘종달교회’에서 예배도 드리고, 이십 여명이 넘는다는 주일학교에서 오래간만에 아이들을 상대로 설교도 해봤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부디 종달리가 이 더럽고 매정한 세상속에서 끝까지 살아남기를. 그리하여 이 깡패와도 같은 신자유주의에 지친 영혼들에게 마지막 남은 비상구와도 같은 공간이 되기를 응원한다. 전략이 필요한 순간이고 기도를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쫄지마, 종달리!


ⓒ 웹진 <제3시대>



  1. 알라딘 책안내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185467181 [본문으로]
  2. 종달리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마지막까지 해보고 싶다고 포부를 전하는 이재송 목사는 예수가 갈릴리 목수였듯이 종달리 목수로 통한다. 갈릴리 목수였던 예수를 따르는 이재송 목사의 삶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어깨너머로 배운 목수 기술로 헌 집을 리모델링 해드린다든지(하은이네), 집집마다 방치되어 있는 자투리 공간을 활용하여 작은 가게를 개업하도록 돕는다든지(순희밥상), 이주하여 사업을 시작하는 분들과 공간적인 변화를 기획하고 시공한다든지(수상한 소금밭의 다락방) 등의 여러 도움을 드렸습니다. 참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했구요 … 그래서 때로는 주변 분들이 본업은 목사, 부업은 목수라 말씀하셔도 이젠 그냥 ‘그런가보다’ 합니다.” (182-18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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