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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4.16 특별법 제정, 생존권투쟁과 인정투쟁 사이에서 (조민아)

시평

by 제3시대 2014. 9. 5.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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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6 특별법 제정, 생존권투쟁과 인정투쟁 사이에서


조민아

(세인트캐서린 대학 조교수)

 

긴 싸움을 헤쳐 나가야 하리라던 불길한 예측은 이미 사실이 되었다. 더 이상 망가질 것도 없다고 생각했을 만큼 참사를 지켜보던 고통이 처참했지만, 싸움이 길어지며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인간성들을 목도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로 끔찍하게 괴롭다. 딸이 죽은 이유를 밝혀 달라며 46일 단식을 한 아빠의 신상을 털고 차라리 죽으라고 막말을 한다. 단식장에 몰려와 닭다리를 뜯고 짜장면을 먹고 폭식 캠페인을 벌이며 자식 잃은 부모의 슬픔과, 함께 울줄 아는 이들의 진정성을 조롱한다. 단식을 하고 있는 사제들과 수도자들 앞에 짝퉁 천주교신자까지 등장해 “특별법 제정 반대”를 위해 묵주기도를 한다(하는 척 한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나온 것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옳다고 믿고 있으며 그 확신 대로 행동하고 있다. 게다가 점점 자신감을 얻어 대담해지고 있다. 돌발 행동이라고 넘겨 버리기엔 그 숫자가 많고 질기다. 그렇다고 이들의 행동을 바라보며 그저 한숨만 쉬고 있을 수도 없다. 상식도 없고 일관성도 없어 보이는 이 엽기적인 행동들이 “세월호 정국”의 국면이 재조정되는 데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퍼포먼스는 4월 16일 이전으로 세상을 되돌리려는 자들의 계산된 구호—“일상으로 돌아가자”, “민생을 돌보자”—와 맞물려 세월호 특별법 제정운동을 ‘생존권투쟁’이 아니라 ‘인정투쟁’으로 몰아가는 데 일조하고 있다. 


특별법 제정은 생존권투쟁이다

우선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수사권, 기소권이 보장되는 4.16 특별법 제정을 위한 투쟁은 인정투쟁이 아니라 생존권투쟁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 권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전제하더라도 인정투쟁과 생존권투쟁은 다르다. 악셀 호네트(Axel Honneth)가 그의 책 <인정투쟁>에서 말하고 있는 “인정”은 인간이 긍정적인 자기 의식을 얻게 되는 심리적 조건이자,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다. 인간은 타인이 인정해 줄 때 긍정적인 자기 이미지를 형성하고 자기 실현을 이루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정 투쟁의 목표는 사회적 투쟁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또한 인정투쟁의 쟁점은 개인이나 집단을 무시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며, 무시를 고착화하는 상태를 개선해 나가는 것이다. 즉, 인정투쟁은 자긍심이 훼손되었을 때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생존권투쟁은 살 권리를 위한 투쟁이다. 절벽 끝에서 벌이는 사투이다. 목숨을 위협 받았을 때 바로 그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자식이 백주 대낮에 수장당한 이유를 밝히기 위해 광화문에서, 청운동에서 곡기를 끊고 노숙을 청하는 부모들의 투쟁은 생존권투쟁이다. 그리도 허망하게 피붙이 살붙이를 떠나 보내고 남은 평생을 살아야 하는 부모들의 생존을 위한 절박한 싸움이다. 이 싸움은, “내 자식들이 왜 그렇게 무참하게 죽어가야 했는가?”라는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외면하는 집권 세력들에게 인정을 받거나 명예 회복을 요구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권력을 획득하겠다는 옥쇄투쟁은 더더욱 아니다. 명백하게 부당한 공권력에 대한 저항이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살기 위한 고투이다. 

이 부모들을 살려야 한다. 반드시 수사권 기소권이 보장되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진상을 규명해야 하는 이유다. 광화문과 청운동 현장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그 현장은 제정이 실현될 때까지 생존권투쟁의 장으로 공고하게 남아야 한다. 그러나 특별법 제정의 본질이 생존권투쟁이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알려내는 것과 따로 또 같이 우리에게는 원하지 않았던 싸움의 장이 열렸다. 인정투쟁의 장이다. 피할 수 없기에 좀더 섬세한 관찰이 필요할 듯하다. 


인정투쟁의 장, 일상

유가족들의 요구를 인정투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세월호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잃어 버린 목숨에 대한 “보상”과 “명예 수호”에 있다고 이해한다. 가족들이 원하지도 않는 각종 특혜 (보상)와 의사자 지정 (명예수호)이 줄기차게 언급되고, 또 그것들을 둘러싼 흑색선전이 대중에게 쉽게 파고드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듯하다. 이들의 시각은 의식적 혹은 잠재의식적으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정부의 규제와 간섭을 가능한 완화하고 개인의 권리를 극대화하는 사회가 정의롭고 합리적인 사회라 생각하기에, 보상과 복권이 제시되는 것을 확인한다면 그 이외의 것은 불필요하다. 따라서, 304명의 목숨이 바다에 묻혔다는 사실 자체는 그들에게 거대한 위협이었을지 모르나,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유가족들이—그들이 판단하기에—일종의 “세력”으로 형성되는 것을 지켜 보는 것은 거북하다. 

이들은 세월호 문제를 생존의 문제로 바라보는 이들과 시각 자체를 달리하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다를 수 밖에 없다. 백일을 채 넘기기도 전에 드러나기 시작한, “피로감”이라고 표현되는 대중의 침묵과 짜증에는 모종의 불편함과 불안함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도 사건 초기에는 연민과 공감이 혼재된 감정상태를 겪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후 국면에서, 생존의 프레임으로 세월호 문제를 보는 이들의 행동이 유가족들과의 “연대”로 나아갔다면, 인정의 프레임으로 보는 이들의 입장은 유가족들을 위한 “배려”로 신속하게 정리되었다. 그들은 “참아주었던”것이지, 실제 가족들의 입장이 되어 공감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유가족들이 “집단”이 되어 자신의 일상을 위협하며 민생을 흔들고 있다고 생각하자, 배려는 불필요한 덕목이 되어버렸다. 대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정부여당이 주장하고 요구하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행사할 공권력을 갖고 있지 않은 이 흩어진 개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도덕적 우위를 선점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옳아야 하고, 다른 이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 적극적 인정투쟁의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인정투쟁에 나서는 이들은 유가족들이 단지 “함께” 움직인다는 이유, 사회질서 유지의 근간이 되어야 할 법체계에 대해 현행과 “다른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는 이유, 집권세력이 “만나주고” 있다는 이유로 유가족들을 “강자”혹은 “권력집단”으로 설정한다. 유가족들과는 달리 개별적으로 존재하며 “관심”도 별로 받지 못하고, 동조해 줄 “배후세력”도 없으며, 크고 작은 피해를 받은 기억은 있지만 “대항”하지 못했던 자신들은 “약자”요, “소수자”다. 단지 설정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는 듯 하다. 유가족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는 권력구조의 역학이나 언론의 영향력 따위는 이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이들의 이러한 착각으로 인해 발생하고 있는 가치 체계의 혼란과 폭력적이고 위해한 언어, 개념들의 양산이다. 

광화문에 나와 기이한 행각을 벌이는 형태의 인정투쟁은 극단적으로 표출된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최전방 부대는 유가족들이 벌이고 있는 생존투쟁의 절박함과 숭고함을 비틀고 조롱하는 동시에 자신들 또한 여론의 뭇매를 맞으며 나름의 역할을 장렬하게 수행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들의 행각보다 더 심각한 것은 사실 겉보기에 소극적인 태도로, “중립적” 가치를 내세우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진행되고 있는 “온건한” 형태의 후방 인정투쟁이다. 이들은 말초신경이나 자극하고 의도적으로 분노를 일으켜 주목을 끄는 일차원적 방법을 지양하며 매우 세련되고 전략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설득해 나가고 있다. 

최근 스스로를 “겁쟁이”라 명명하며 “작은 용기 캠페인”을 시작한 연세대학교 김정호 교수의 인정투쟁이 이 후방 부대의 성장과 변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장기화하고 있는 세월호 정국의 책임을 전적으로 유가족들에게 돌리며, 현상황을 “싸움꾼들의 독재가 판치는 세상”이라 명명한다. 반대로 자신과 같이 “힘없고” 단식을 하기도 주저스러운 이들은 “겁쟁이”이지만 “대한민국이 정상화될 날을” 원하는 “정상인”들이다. 이런 다수의 “겁쟁이”들이 연대하여 “싸움꾼” 유가족들에게 맞서자는 주장이다 (“저는 겁쟁이입니다,” 조선닷컴 토론 마당 2014년 8월 31일 참조).

김정호 교수의 예에서 보여지듯, 이들 후방 부대는 “민주주의,” “정의,” “발언의 자유,” “소수자 권익,” “작고 연약한 이들의 연대,” “일상의 가치” 등, 과거 피억압 민중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사용되던 개념과 표현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 염수정 추기경과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가세한다. 이 분들은 “중립”을 선호하신다지만 실은 집권세력의 눈치를 보며 줄타기를 즐기신다. 주로 하시는 일은 종교적인 가르침을 탈색시켜 보수 언론과 정부 여당이 사용하기 좋은 요릿감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유가족들과 “공감한다”하고 “같이 아프다” 하는데 뭘 공감하고 뭘 같이 아파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렇게 후방의 인정투쟁은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의 활약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해 왔던 단어들이 간직하고 있던 역사성과 본의를 사상 시키며 세월호 정국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생존권투쟁과 인정 투쟁, 양쪽 모두 포기할 수 없다

생존권투쟁과 인정투쟁의 구분이 모호해지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의 파급력과 무게는 우리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인정투쟁의 양상이 이전과 많이 다르리라는 것을 예감하게 한다. 아니, 그보다는 이전부터 진행되어 왔던 다양한 가치 체계의 전도가 세월호 참사를 기해 전면에 드러나 서로 서로 정당성을 주장하고 인정을 요구하며 압박해 올 것이라 하는 것이 옳겠다. 누구나 알 수 있고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정의, 민주의 개념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인정투쟁은 스스로 공부하고 이웃을 설득해야 하는 긴 호흡이 필요한 싸움이다. 단지 투쟁해야 할 뿐 아니라 투쟁해야 하는 이유와 도덕적 근거를 스스로 이해하고 이웃에게 설명해야 한다. 권력의 부당함이나 경제적 불평등을 갈등의 원인이라 간주하고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뿐 아니라, 당장 내 옆에 있는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이 마음을 열고 그 갈등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분노를 자신을 움직이는 에너지로 사용하되, 그 표출은 자제해야 한다. 분노는 투쟁을 촉발하는 원인이지, 투쟁의 도덕적 기초를 제공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인정투쟁의 장에서조차 우리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고지에 서 있다. 혼자 잘 사는 것을 부추기는 전방위적인 가치체계에 맞서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 남는 가치체계의 매력을 설득해 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돈과 권력이 사람 위에 군림하는 세상보다 사람이 돈과 권력을 제재하는 세상이 이롭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막연한 싸움이다. 

인정투쟁의 장은 일상의 전 영역이다. 이 싸움은 정치인들이나 전문가들, 혹은 조직에게 맡길 수 없는 각자의 싸움이다. 집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또 본당에서, 내가 몸 담고 있는 공동체가 어떤 가치를 선택하고 있는가가 내 책임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싸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희망, 변화의 가능성은 한 두 사람의 정치적 지도자나 영웅이 제시하고 그 나머지인 우리들은 그저 수혜자가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지분이 모여야만 조금씩, 그것도 아주 더디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얼마나 일상적으로 소통하느냐, 어떻게 인간 회복을 실현하는 작은 공간들을 많이 만들어 내느냐가 관건이다.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로부터 우리가 잃어 버린 무엇을 되찾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나누고 고민한 것들을 우리 자신의 삶으로 체화해야 한다. 이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결국 우리들 개개인이 우리가 가진 얼마만큼을 자신의 삶으로, 또 이웃의 삶으로 되돌릴 수 있느냐일 것이다.

저들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부분적으로 옳다. 일상 또한 이미 싸움의 장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싸움 또한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일상은 생존권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광화문과 청운동의 현장과 분리 될 수 없다. 현장과 일상을 부단히 오가는 긴 싸움을 우리는 당분간 계속해야 한다. 아니, 그 싸움을 살아내야 한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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