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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5] 일상을 지키기 위한 반전 운동 (배근주)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4. 10. 7.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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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지키기 위한 반전 운동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전쟁이 살아 남은 자들에게 가져다 주는 가장 큰 비극 중의 하나는 아마도 ‘일상 생활의 파괴’일 것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낮 동안 일을 하고, 저녁에 휴식을 취하는 일상. 이웃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직장 동료들과 함께 일을 하는 일상은 소소하고, 때론 무의미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일상이 파괴되는 경험을 한 사람들은 인간의 삶이란 결국 소소한 일상의 연속이란 것을 고백하곤 합니다.
         지난 2011년 미국의 PBS (Public Broadcasting System) 방송국에서는 ‘여성, 전쟁, 그리고 평화 (Women, War and Peace)’라는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만들었습니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보스니아, 아프가니스탄, 라이베리아, 콜럼비아 등지에서 전쟁을 경험한 여성들은 하나같이 전쟁으로 인해 깨어진 일상이 가져다 준 고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한 때 서로의 아이들을 돌보아 주고, 마을의 대소사를 나누던 주민들은 보스니아 내전으로 적군과 아군, 강간 군인들과 피해자들로 나뉘어져 버렸습니다. 한 번 나누어진 마을 주민들은 전쟁 후에도 일상으로 돌아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탈레반과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무력 항쟁을 하는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성들이 극히 제한된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집 안팎에서 끊임 없이 감시를 받고, 길거리에서 매를 맞고 폭력에 노출됩니다. 한 마디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폭력이 일상이 되어버린 삶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합니다.
          일상의 파괴가 전쟁이 인간에게 가져다 준 비극임에도 불구하고, 전쟁 담론은 인간의 일상생활(everyday life) 자체를 쉽게 무시합니다. 전쟁 담론에서 주로 다루는 문제는 국제 관계, 핵무기 사용, 군축 협상, 테러 조직 파괴, 국제 협약 등등, 소위 말하는 거대 담론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거대 담론들이 활발히 토론되는 국제 정치 무대에서, 여성이나 일반인들은 소외되어 왔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의 정치담론을 지배해 온 “정치적 사실주의 (political realism)”는 강대국들 간의 힘의 균형 문제에 집중하면서, 은연 중에 군사적 힘이나 전쟁, 핵폭격 등의 ‘힘든 (?)’ 결정을 하기엔 감정적이라 여겨지는 여성들을 배재해 왔습니다.
           20세기 후반들어 국제 관계를 다루는 여성학자들은 ‘정치적 사실주의’가 경제, 종교, 이민, 환경 문제 등을 동반하는 복잡다단한 국제 사회 관계를 다루기엔 역부족이라고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정치적 사실주의는 주권 국가를 국제 관계의 기본 단위로 보기 때문에, 국가와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실제 인간 관계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21세기에 들어 많은 여성학자들과 국제 NGO 관계자들은 평화와 안보의 주체를 국가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아야 하며, 국가의 주권과 영토를 지키는 것이 평화와 안보의 핵심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과 사회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평화와 안보 정책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인간 안보 (human security)’ 개념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인간 안보를 위해서는 일상 생활에서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안전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깨끗한 물과 영양가 있는 음식, 양질의 교육, 마을 공동체, 종교의 자유, 의미있는 인간 관계, 정의로운 경제 구조 등을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있도록 마련해야 합니다.
            인간 안보가 추구하는 사회 경제 구조는 다양한 기독교 해방신학이 추구해 온 ‘하느님의 나라’와 비슷합니다. 미국의 남미 여성 신학자 아다 마리아 이사시 디아즈(Ada Maria Isasi-Diaz)는 남미 여성 해방 신학의 핵심은 소소한 일상생활 자체가 폭력의 구조에 저항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세계화된 자본주의와 군사주의가 인간과 자연 공동체를 파괴하고, 인간을 관계 속에 사는 존재가 아닌 원자화(atomization)된 존재로 살도록 강요하는 현실 속에서, 여성들이 일상 생활에서 얻은 생존의 경험은 공동체를 살리는 커다란 힘이 됩니다. 생존의 경험 속에서 얻어진 지혜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이 하느님의 가족 (la familia de Dios) 구성원이며, 이 가족 공동체는 가장 약한 구성원을 위해 폭력의 구조에 저항해야 합니다.
          도로테 죌레는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은 일상에 살아 숨쉬는 하느님의 신비함을 경험하는데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 영성은 일상을 가벼운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공간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은 인간 공동체와 자연 공동체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와 함께하는 일상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들의 고통을 돌아 보게 하고, 그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삶입니다. 결국 폭력에서 자유로운 삶이란 공동체 속에서 다른 살아있는 이들과 함께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일상은 점점 더 전쟁과 폭력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국가 안보가 인간 안보에 우선한다는 생각. 군사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강한 군사력만이 안보와 평화를 가져온다는 생각. 군대를 가야 남자가 된다는 생각. 살인, 테러, 방화, 폭격이 실제 상황처럼 펼쳐지는 영화와 컴퓨터 게임. 군대에서 강조하는 전우애와 국가에 대한 충성, 위계 질서가 중요한 사회 가치가 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공동체를 회복하고,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반전운동, 평화운동은 일상을 지키기 위한 운동입니다. 나의 일상이 폭력과 전쟁을 정당화 시키는 문화에 젖어들지 않도록 하는 삶, 타인을 소외시키는 일상이 아닌, 함께 사는 공동체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교통하는 삶, 그리고 인간 안보를 위한 사회 정의 실현에 참여하는 삶 말입니다. 반전 운동은 일상에서 시작해서 결국 그 일상을 지키는 운동으로 귀결됩니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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