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전쟁과 평화6] 우리의 적은 인간이 아닙니다: 폭력과 비인간화 (배근주)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4. 12. 2. 16:16

본문


우리의 적은 인간이 아닙니다

폭력과 비인간화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최근 미국 미주리 주의 퍼거슨 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보며, 저명한 흑인 학자 코넬 웨스트 (Cornell West)가 한 말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라크에서 하고 있는 일은 미국 내에서 흑인을 대하는 것과 똑같다. (Cornel West, Democracy Matters, 2005)” 코넬 웨스트는 이라크 전쟁 중 미군이 행한 민간인 학살과 전쟁 포로의 인권유린이 미국 내에서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는 흑인 청년들에 대한 조직적인 경찰 폭력, 사회적 편견 등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웨스트의 주장은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16세기 부터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흑인 노예 제도는,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는 당시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천부 인권론 등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서구에서, 노예 매매제도가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아이러니 입니다.  

            미국의 노예제도는 흑인을 철저히 비인간화 하며 지속되었습니다. 흑인 남성들은 지적 능력이 떨어지고, 폭력적이며, 성욕과 같은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산다는 이념화 과정이 그것입니다. 비록 흑인 노예제도가 1865년 남북 전쟁과 함께 종료된 것처럼 보이지만, 해방된 흑인들은 그 후로 부터 100년 동안 짐 크로우 법 (Jim Crow Laws) 밑에서 인권을 유린 당하며 살았습니다. 짐 크로우 법은 공공 장소에서의 인종 분리 정책을 합법화한 법으로써, 이 법 아래에서 흑인들은 법정 증언도 할 수 없었고, 공정한 재판도 받을 수 없었으며, 백인들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어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노예 제도나 짐 크로우 법을 주류 기독교가 오랜 동안 지지했다는 사실은 역사상 최대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짐 크로우 법 시대에 흑인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나무에 매달아 죽인 사람들은 백인 기독교인들 이였습니다. 흑인 해방 신학자 제임스 콘은 린치 당하고 죽은 흑인이 매달린 나무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조직화된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이들의 상징으로 보고 있습니다 (James Cone, The Cross and the Lynching Tree, 2011). 백인들의 기독교에 의해 철저한 인권 유린과 지속적인 국가 폭력을 경험하는 흑인들이 예수 안에서 자유함과 해방을 누리기 위해서는,  흑인 여성 신학자인 숀 코플랜드(Shawn Copeland)가 이야기하듯,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 그리고 정신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Shawn Copeland, Enfleshing Freedom, 2009). 그래서 흑인 해방 신학과 흑인 여성 신학은 백인 주류 신학이 이야기하는 전지 전능한 하느님이 아닌, 약자와 함께 고통 받는 하느님, 체제의 부조리와 약자를 비인간화 하는 사회구조에 끊임없이 대항하는 하느님, 공동체와 약자를 힐링하는 하느님을 이야기 합니다.

          미국 남부 미주리주 퍼거슨 시에서 백인 경찰이 비무장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에게 여섯발의 총을 쏘아서 숨지게 한 사건은, 미국 사회에 뿌리 깊은 인종 차별 주의가 어떻게 공권력에 의해서 폭력적으로 현현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이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지역에서 벌리고 있는 크고 작은 전쟁과 군사 작전, 그리고 퍼거슨 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종 차별, 폭력적인 공권력에 대항하는 폭력 시위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앞서서 이야기한 것 처럼, 인종 차별은 유색 인종을 비인간화 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오랜 동안 흑인들은 짐승 또는 ‘악(evil)’과 동일시 되면서 정복되어야할 백인들의 ‘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미국의 역사는 실제로 유색인종에 대한 끊임없는 ‘타자화’와 ‘비인간화’의 연속입니다. 미국의 원주민 학자이며 사회 운동가인 안드레아 스미스 (Andrea Smith)의 책 ‘정복 Conquest’은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어떻게 정착 초기부터 미대륙의 원주민들을 타자화 하고, 철저히 비인간화 시키면서 그들의 땅과 문화를 파괴해 갔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재와 같은 미국의 부와 권력은 수많은 원주민들의 죽음과 흑인 노예들의 죽음 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소리 없는 죽음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대륙의 원주민들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당시 유럽의 여성 혐오주의에 바탕을 둔 가부장제와 달리 여성의 정치적 의사 결정권을 인정한다는 이유로, 옷 차림이 다르다는 이유로, 타자화 되고 비인간화 되었습니다. 비인간화된 원주민들을 살육하는 것은 동물을 사냥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또한 공동 소유의 원칙을 실천하는 원주민들에게서 땅을 빼앗아 사유 재산화 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동식물과 약품에 관한 다양한 지식도 사유화 하는데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성폭력과 함께 여성들을 대상으로한 피임약과 같은 약물 실험도 원주민들이 감당해야 할 사회 폭력이였습니다. (Andrea Smith, Conquest, 2005)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중에도 적으로 간주된 한국인들과 베트남인들은 타자화와 비인간화 과정을 경험했습니다. 한국 전쟁 중 자행된 민간인 학살 사건 (노근리 사건, 거창 학살 사건, 포항 피난민 학살 사건 등)과 베트남 전쟁 초기 부터 일어난 민간인 학살 (마이 라이 마을 학살 사건, 네이팜탄 사용 등)은 미국이 주장하는 대로 단순히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 한 데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이미 북한군들과 베트콩의 게릴라 전술은 문명화된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미개인들이 사용하는 군사 전략과 전술로 규정되었습니다. 이러한 미개인들과 똑같은 외모와 언어를 가진 남한 사람들, 월남 사람들은 적군과 비슷한 이들이거나, 또는 자기 방어 조차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간주되었습니다. 타자화된 동양인들의 생존은 미군의 자비심에 달려 있었습니다. 한편 개개인으로써의 미국 군인들은 끊임없이 왜 자신들이 들어 본 적도 없는 이국 땅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지를 물어야 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적군을 얼마 만큼 성공적으로 타자화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적군이 나와 다른 (또는 주류 사회와 다른) 성별, 인종, 언어, 종교, 문화 등을 가지고 있다면 타자화와 비인간화는 쉬워집니다. 만약 군인들이 적군을 그들과 같은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 보기 시작하면, 적군을 공격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게 됩니다. 성공적인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군인들로 하여금 적군을 증오하도록 만들고, 타자를 끊임없이 구별해 내며, 적군을 비인간화하는 정신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정신 훈련은 군인들이 육체와 정신을 분리해서 육체를 끊이 없이 정신에 복종시키는 작업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정신’이 ‘적’이라고 판단된 것을 보면 즉각적으로 ‘몸’이 반응하여 그것을 제거하는 ‘반사 신경’을 기르는 것입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나 심각한 도덕성 장애(Moral Injury)로 일상 생활이 힘든 참전 군인들 대부분은, 군사 작전 중 전쟁과는 상관없는 민간인들의 학살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거나, 적군에 대한 감정이입을 경험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처럼 감정이 있고, 고통을 느끼며, 지켜야할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민간인들과 군인들이 미국의 군사작전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들이 그 군사작전의 일부분이란 사실이 감당하기 힘든 양심의 가책 또는 정신적 혼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은 인종과 성별을 초월하여 다른 인간을 죽이는 것에 양심적 가책을 느끼기 때문에, 소시오 패스나 사이코 패스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군인들은 전쟁 중이였다 하더라도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미국도 그러하지만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폭력성을 보면, 한국이 전쟁터 같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어린 학생들이 폭력까지 사용하는 왕따 문제, 여성들에게 행해지는 각양 각색의 성범죄들, 외국인들 대상으로한 차별과 폭력, 장애인이나 노인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폭력, 감정 노동자들을 상대로한 무분별한 언어 폭력과 군대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 골수 우익들과 보수주의자들의 무분별한 이념 전쟁까지…… 이 모든 종류의 폭력은 희생자를 나와 동일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타자화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타자화와 비인간화가 만연된 사회에서 물리적 전쟁이 일어나면, 비 전시 상황에서 타자화의 대상이 되었던 약자들이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한국 전쟁 발발 시기에 보도 연맹원 학살이나, 서북 청년당이 ‘빨갱이들’과 그 가족들을 무자비하게 살상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철저한 타자화와 비인간화가 이루어졌었기 때문입니다. 

           타자화와 비인간화는 반 기독교적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근간에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거룩한 존재이며,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인간을 존귀하게 여기신 그 삶, 특히 사회가 죄인이라 낙인 찍힌 사람들과 연대한 삶을 지금의 교회들이 그리고 내가 살아 가고 있는지 묵상하는 대림절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쟁에 대한 저항은 타자화와 비인간화에 대한 저항과 일맥상통 합니다. 


ⓒ 웹진 <제3시대>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