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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영원한 일요일’, 우리 예배는 가능한가 (김진호)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5. 1. 29.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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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일요일’, 우리 예배는 가능한가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책의 숭배자


나는 한 때 책에 대한 열렬한 숭배자였다. 책 읽기는 즐겁기도 했거니와 세상에 관한 온갖 비밀을 담고 있는 ‘지혜의 창’이기도 했다. 일상의 스케줄 잡기에서 항상 제일 첫 번째 관심은 ‘무엇을 읽을 것인가’에 있었다. 틈만 나면 도서관과 서점을 뒤졌고, 국내외 전문지들을 훑으며 출판동향을 파악하려 애썼다.

둘째는 책 읽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는 일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지만, 이런 저런 일에 많이 분주했던 시절이라 독서 시간은 늘 부족했다. 해서 밥 먹을 때도 책을 보았고, 화장실에서도 책을 놓지 못했다.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일하던 시절, 시골 산속에서 건물도 없이 가건물에서 업무를 보던 때다. 화장실도 없어서 바깥에 재래식 변소를 만들어 임시로 사용하던 때 나는 매일 변소에서 한 시간 이상을 죽치고 앉아 책을 읽었다. 훗날 연구소 건물이 지어진 뒤 동료들은 그 사라진 화장실을 ‘김진호기념관 터’라고 농했다. 그 몇 년 전 신학대학원 다닐 때 나는 늘 지하철을 이용했다. 환승시스템이 없던 시절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가려면 왕복 16정류장을 걸어 다녀야 했지만, 아무 때고 밝게 조명이 맞추어져 있고 흔들림도 덜한 1시간의 여정은 독서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의 책읽기 강박증은 목욕이나 샤워할 때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했다. 내 서가에는 물속에 빠진 탓에 쭈글쭈글한 몰골을 한 책들이 있다. 목욕하다 물속에 빠뜨린 것이다. 흠뻑 젖은 책을 선풍기에 말리고 다림질까지 했지만 그 흔적을 다 지울 수는 없었다. 잠자는 시간도 아까웠다. 그 결과 ‘올빼미’의 삶이 시작되었다.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3년 반 동안, 동네 산책을 한 것이 단 두 번에 지나지 않았다.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로딩되는 동안 손발을 씻고 밥을 차리고, 밥 먹으면서 모디터를 바라보며 일했고, 심지어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 그 3년 반 동안 누워 잠 잔 날이 거의 없다. 그렇게 잠 안 자고 한 것이 주로 독서였다.

독서광은 늘 자기 한계보다 넘치는 책을 갖고 싶어 한다. 책의 숭배자는 책의 수집광이기도 하다. 나의 책꽂이에는 먼지만 수북이 뒤집어 쓴 책들이 수없이 많다. 이미 있는지 모르고 또 다시 구입한 것도 여러 권이다. 

이런 내게 책은 세상이다. 혹여 그 책이 내가 사는 세상을 다룬 것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나는 책 속에서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상의 비밀을 읽어내려 했고 그렇게 얻은 지식이 곧 세상이라고 믿었다. 즉 책은 내가 살고 있는 세상 그 자체이고, 또 그 이상이다. 그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질서가 담겨 있을 뿐 아니라, 그 세상의 부조리함이 교정된 유토피아적 세계를 향한 예언이 들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데 책의 숭배자가 되기 이전에도 나는 ‘책’의 숭배자였다. 여기서 작은 따음표를 붙여 말한 ‘책’은 성서다. 그때는 ‘성경’이라고 불렀다. 즉 ‘정전’(正典, 정통경전)으로서의 유일무이의 책이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정전이라는 말에는 ‘유일한 책’이라는 의미도 있고 ‘완전한 책’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는 점이다. 근본주의적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 ‘책’의 유일성과 완전성을 ‘축자영감론’과 ‘성서무오론’으로 주장한다. 그런데 이 주장의 이면에는 ‘해석불가’라는 억견(dogma)이 뗄 수 없이 들러붙어 있다. 억견을 뜻하는 그리스어인 ‘독싸’(δοχα)는 근거를 전제하지 않고 강하게 제기하는 의견 같은 것을 뜻한다. 즉 성경은 이미 의미가 완벽하게 구축된 책이므로 누구도 임의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알다시피, 현실에서 이 말은 성서 해석권을 독점하는 존재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장치로 사용되었다. 

아무튼 성경의 숭배자였던 나에게서 이 책은 세상의 비밀을 담고 있으며 나아가 세상의 부조리함이 청산되는 새로운 세상에 관한 예언이 담긴 유일무이의 완전한 책이었다. 하여 고유명사로서의 ‘책’이든 집합명사로서의 ‘책들’이든, 그것들의 숭배자였던 때의 나에게는 동일한 인식이 두 시기를 꿰뚫고 있다. 책의 세계가 진정한 세계이며, 책 밖의 세계는 불완전하고 심지어 불온한 것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해서 세상을 알기 위해 반드시 책을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1950년대, 두 명의 책의 숭배자 


그런데 나보다 더 열렬한 책의 숭배자였던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1950년대 한국 개신교의 절대적 존재로 부상했던 한경직 목사이고 다른 사람은 1956년 30세로 요절하기까지 슬픔과 참혹함과 아름다움이 뒤얽힌 한국적 아방가르드 문학을 이끈 시인 박인환이다. 요즘 내가 한참 1950년대 한국사회를 공부하고 있는 중에 만난 두 사람이었다. 

한경직 목사는 1945년 10월 남하한 직후부터 월남자 개신교 집단의 대표적 인물로 부상했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독보적인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1950년대에 그는 남한의 개신교 사회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1953년, 한국교회사에서 뼈아픈 사건이 발생했다. 한경직의 프린스톤 신학대학 동창이자 그와 함께 한국 개신교의 중요한 지도자였고, 신학자이자 교육자로서 높은 존경을 받고 있던 김재준을 한국장로교회가 파문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 사건은 김재준 개인의 축출 사건을 넘어 그를 둘러싼 찬반 양 세력이 분열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대한예수교장로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 탄생의 슬픈 내력은 이랬다. 이때 김재준을 축출한 집단의 최고 지도자가 바로 한경직이었다. 

이 분열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월남자 기독교 세력을 축으로 하는 장로교의 주류집단이 신학생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던 김재준의 신학을 용납할 수 없었던 데 있었다. 특히 그의 성서관이 문제시되었다. 그것은, 간략히 말하면, 성서를 해석의 책으로 볼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 한경직 목사는 김재준 목사 파문 사건이 발생한 지 20여일만인 1953년 5월 17일 영락교회 청년회의 헌신예배 때 성서무오론과 축자영감설을 지지하는 듯한 설교를 하였다. 요컨대 그는 현대신학의 흐름과는 달리 성경이라는 단 한 권의 ‘책’의 숭배자임을 명백히 하였다. 결국 그것은 해석될 수 없는 완전한 것이라고...... 

당시 그의 설교들을 보면 그가 보는 세계는 매우 단순, 명료하다. 세계는 선과 악으로 명확하게 구획되어 있었고, 선한 편의 사람들이 악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 사역자로서 그의 설교의 주요 목적이었다. 이때 저 명백한 악의 편에는 공산주의자들, 이단종파들, 나아가 자유주의 신학 진영, 그리고 미국과 서양의 소비문화 등이 있었다.

1955년 5월 22일 영락교회 주일예배의 설교 제목은 ‘너희도 온전하라’였고, 성서 본문은 〈마태복음〉 5,48이었다. 이 구절은 이렇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여기서 그는 교인들에게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높은 도덕성과 경건함을 요청하고 있다. 하느님이 하느님답게 완전한 것처럼, 사람은 사람답게 완전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한 신자일 수 있다는 얘기다. 

한편 시인 박인환은 195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의 아방가르드적 모더니즘 작가였다. 그를 포함한 일단의 모더니즘 작가들은 대동아전쟁, 해방, 내전, 한국전쟁, 그리고 그 ‘전후’에 이르는, 하나하나의 무게도 감당할 수 없지만 그것이 짧은 시간 동안 첩첩이 쌓인 격동의 시간을 고스란히 겪으면서 청년이 된 이들이었다. 그들은 시대의 이야기꾼들이었다. 일단의 선배들이 그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과거 시간의 아름다움에 탐닉한 것과는 달리, 그이들은 자신들의 그 혹독한 시간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그것을, 그 체험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런데 글쟁이로서 그들이 직면한 딜레마는 자신이 겪고 있는 그 절박한 현실을 표현할 언어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배웠던 언어인 일본어는 해방 이후 퇴출당한 언어였고, 한글은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철저하게 붕괴되었다. 한글로 세계를 읽어낸 책도 없거니와, 그런 전대미문의 고통을 담아내고 개념화할만한 어휘도 없었다. 바로 이때 그들에게 시대의 이야기꾼이 될 수 있도록 어휘와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바로 책이었다. 특히 영어로 된 책들이었으며, 그것을 번역한 일본어 책들이었다.  

그때는 한국전쟁 직후, 그러니까 서양의 구호품들과 함께 그이들의 문화와 학문이 함께 휘몰아치듯 유입되던 시기였다. 박인환을 포함한 작가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과 그 너머의 질서를 묘사할 글과 그 사상의 결핍에 직면해서 서양의 책들에 빠져든다. 그들에게는 그 속에 세계가, 세계의 표면 뒤의 비밀들이 들어 있었고 그 비밀이 내포한 세계의 위기를 넘어서는 비전들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보았다.


강원도 인제의 박인환문학관에 재현된 마리서사. 그 앞에 박인환이 그려진 입간판이 서 있다.


박인환은 그런 비판적 모더니즘 작가들 가운데 책에 대한 가장 열렬한 숭배자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45년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그 해말 19세가 된 박인환이 성인으로서 했던 첫 번째 공적인 활동이 종로 낙원동에 ‘마리서사’(茉莉書舍)라는 20평 남짓한 서점을 구입한 것이다. 

이 서점에는 일본어와 영어로 된 세계문학전집이나 세계적 문인들의 시집과 소설, 화집 등이 꽂혀 있었다. 하여 이곳은 그가 세계를 읽는 지식의 창고가 되었고, 나아가 당대의 문인들을 비롯한 다양한 지식인들을 만나 한국사회의 현실과 비전을 이야기하는 담론의 장이 되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들이 공히 갖고 있던 어려움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담아낼 언어의 결핍이었는데, 이 서점에 비치된 서양 사상들을 담은 책들은 그이들에게 그런 결핍을 채워주는 생수가 되었다. 

그러나 3년 만에 마리서사는 경영난으로 폐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정보 습득의 기회가 되었다. 신문사 기자로 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어에도 능통했던 그는 새로운 일터에서 당대의 최신 사상에 관한 정보들을 접하였고, 이런 외래사상들에 의존하면서, 책 밖의 세계를 책을 통해 이해하고 이야기하는 책의 전령관이 되어갔다. 

하여 그의 시는 외래어들과 외국어들, 서양 사상의 관념적인 어휘들이 때로는 그것을 음역한 말로, 또 때로는 일본식 번역어들로 남발되어 있었다. 동시대의 또 다른 책벌레였지만 외래사상과 한국 현실 간의 긴장의 간극을 놓지 않으려 했던 동료 김수행은 이러한 박인환과 박인환 류의 시를 향해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일종의 ‘코스츔’에 지나지 않으며, 현실을 읽는 자기 사상의 성숙함을 담고 있지 못한 관념적인 유희에 지나지 않다고 혹평한다.


1955년의 일요일, 두 사람의 다른 시선


한데 한경직 목사가 ‘너희도 온전하라’라는 제목의 주일예배 설교를 했던 1955년, 그 해에 박인환이 발표한 시 〈영원한 일요일〉은 낯선 서구의 관념적 어휘들 대신 그의 시들에서 별로 볼 수 없었던 현장의 풍경이 언어로 고스란히 묘사되어 있는 것 같다. 현장을 묘사하기 위해 낯선 관념적 서양언어들을 화선지와 물감으로 삼아 그려내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그 현장에 관한 직설적 묘사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아마도 책의 관념적 어휘들 속에 함축된 서양의 일요일에 대한 풍경을 회상하기보다는 현장의 날선 관찰에 압도된, 그것을 직설하는 예언자의 시 같기도 하다. 

아래는 그의 〈영원한 일요일〉 전문이다. 


날개 없는 여신이 죽어버린 아침 / 나는 폭풍에 싸여 / 주검의 일요일을 올라간다. //

파란 의상을 감은 목사와 / 죽어가는 놈의 / 숨 가쁜 울음을 따라 / 비탈에서 절름거리며 오는 / 나의 형제들. //

절망과 자유로운 / 모든 것을 ......... //

싸늘한 교외의 사구(砂丘)[각주:1]에서 / 모진 소낙비에 으끄러지며 / 자라지 못하는 유용식물(有用植物). //

낡은 회귀의 공포와 함께 / 예절처럼 떠나 버리는 태양. //

수인(囚人)이여 / 지금은 희미한 철형(凸形)의 시간[각주:2] / 오늘은 일요일 / 너희들은 다행하게도 / 다음 날에의 / 비밀을 갖지 못했다. //

절름거리면 교회에 모인 사람과 / 수족이 완전함에도 불구하고 / 복음도 기도도 없이 / 떠나가는 사람과 //

상풍(傷風)[각주:3]된 사람들이여 / 영원한 일요일이여


이 시는 전쟁이 끝난 이후의 어느 일요일(어느 특정 일요일이라기보다는 전후, 그 무렵의 일요일들)의 삭막한 풍경을 그리고 있다. 시는 “날개 없는 여신이 죽어버린 아침”으로 시작한다. 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처럼 ‘날개 없는 여신’은 구원할 능력을 상실한 역사, 진보, 계몽, 이상, 복음 등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전후 어느 일요일의 아침은 그런 아침이었고, 그 일요일 아침에 그는 폭풍에 싸여 “일요일을 올라간다.” 여기에는 아마도 일요일 교회의 예배당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화자의 풍경이 연상된다. 한국문학 비평가인 고미숙이 한국 근대화의 형성기에 근대화의 세 성소가 목욕탕, 병원, 그리고 교회였다는 말처럼, 박인환에게도 교회는 구원의 성소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 계단을 오르는 그에게 일요일의 교회는 구원의 장소가 아니라 ‘주검의 일요일’이다. 산자들의 일요일, 살림의 일요일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일요일, 살림에 실패한 일요일이다.  

전쟁으로 몸과 정신에 깊은 상처를 입은 무수한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고 있지만, 한경직 목사가 ‘목자 없는 양’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열거한 바 “38선으로 찢기고 6.25사변으로 쓰러진 한국의 대중들, 듣는 대로 10만 명의 고아, 30만의 찢긴 과부, 수없이 많은 눈 팔 다리가 없어진 상이군인들과 동포들, 가족은 분산되고 형제, 처자는 이산되고 올바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는 이 무리들”이, 전쟁의 태풍에 의해 ‘상풍 걸린’ 사람들이 구원의 장소 교회로 몰려오지만, 시인의 눈에 그들의 일요일은 주검의 일요일이다. 몸과 정신이 기억과 고통의 질병에 갇혀 버린 수인들은 일요일 교회에서 “다음 날에의 비밀을 갖지 못했다.” 여신이 죽어버린 아침에, 교회는 어떤 미래도 약속하지 못하는 주검의 일요일이다. 하여 아픈 이들뿐 아니라 아프지 않은 이들도 그 일요일에 “복음도 기도도 없이” 교회를 나와야 했다. ‘영원한 일요일’이라고, 한경직 같은 이가 소리 높여 주장하는 그 날에 말이다.

같은 해 독서광인 두 사람, 한경직 목사와 박인환 시인의 눈에 비추인 교회는 이렇게 달랐다. 한 사람은 교회가 구원의 장소라는 확신에 차서 교회 밖의 사람들, 목자 잃은 양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신념에 차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전쟁의 외상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교회를 직시하고 있다.

한데 성경의 숭배자인 사람은, 앞에서 본 것처럼, 책(성경)이 말하는 진리, 유일하고 완벽한 그것에 대한 자의식에 넘쳐 있다. 하여 그 진리에 배치된다고 그가 판단한 다른 성서 해석들을 배제한다. 그에게 배제된 성서 해석의 하나는 이른바 자유주의적 성서해석이다. 이것은 서양 근대주의의 시각에서 보는 성서다. 이 해석을 대표하는 김재준은 성서에서 유일하고 완전한 책의 과신에 저항했다. 

한편 그가 배제한 또 다른 성서 해석은 이른바 이단들이다. 이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은 당시 불일 듯 일고 있는 은사집회 현상이었다. 차분히 성서를 낭송하는 사경회가 아니라 “손뼉을 친다든지 책상을 친다든지 발을 구른다든지” 하는 감정이 분출하는 집회들이다.(1955. 06. 19 설교. 제목 ‘신앙의 正路) 그런데 이런 집회의 하이라이트는 질병치유다. 이에 대해 같은 설교에서 그는 말한다. “믿음으로 병 고치기 위해서 건강의 법칙과 모든 의약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건강의 법칙도 하나님이 내신 것이고 의약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일부러 기도로만 병을 고치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억지입니다.” 하여 그는 말한다. “안수하고 안수받는 이도 성경대로” 해야 올바르다고. 


1955년의 한강백사장에서 열린 천부교 박태선의 집회. 이런 은사주의 집회는 당시 전국곳곳에서 열렸다.


무엇이 그가 말한 성경대로일까. 한경직에 따르면 성경을 해석하는 근본 원칙은 성경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필경, 천부교의 박태선 같은, 자신이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던 것을 염두에 둔 말 같지만, 그렇다고 은사집회 전체가 이 말로 부적절함이 입증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감정이 분출하는 집회를 통해 질병의 치유가 일어나는 것은 성경에 맞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물론 그는 병원을 짓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많은 외국의 지원을 받아낸 것이 사실이다. 해서 병원이 지어지고 약을 투약할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의 은사라고 해석하는 것이 그에겐 마땅한 일이다. 문제는 박인환의 시처럼, 일요일에 무수한 사람들이 교회를 향하지만 치료받을 수 있는 은사의 기회를 누리는 이는 절대소수에 지나지 않다. 그들에게 교회 예배는 주검의 일요일에 지나지 않다.

그때 무수한 은사집회가 전국 도처에서 일어났고, 구마사들이 열광적 집회를 통해 적지 않은 이들을 치유했다. 그 집회에는 전쟁으로 보건의료체계가 거의 무력화된 상황에서, 그나마 새롭게 건설된 의료시설을 이용할 기회를 못 누린 이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대개 일자무식이었고, 정보에서도 철저히 소외된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구마사들이 다가가 치유의 손길을 펼쳤는데, 그들 중 다수가 기독교계 구마사들이었다. 

하지만 주류교회는 1950년대 중반경, 이런 이들을 정죄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표적인 구마사인 천부교의 박태선과 용문산 기도원의 나운몽이 개신교 교단 총회로부터 이단으로 지목되기 시작한 해가 바로 한경직이 이런 설교를 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이 되었으며, 박인환이 〈영원한 일요일〉을 쓴 1955년이었다. 

어쩌면 한경직은 그가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묘사한 대중의 고통을 바라볼 때, 그의 눈에는 유일하고 완전한 책인 성경이 먼저 보였는지 모른다. 한데 그가 본 성경은 다른 해석들, 그 가능성들을 배제한 성경이다. 오직 자신의 생각이 투영된 성경만이 유일한 진리인 책이다. 해서 그는 고통의 해결책도 자신이 제시한 것 외에는 수용할 수 없었다. 결국 그가 생각한 해결책은 모든 이들이 교회로 몰려오는 것이다.

그런데 박인환은 그렇게 몰려드는 교회의 일요일을 ‘주검의 일요일’이라고 말한다. 그 날에는 복음도 없고 기도도 없다. 영원한 일요일을 주장하는 이들의 ‘영혼 없는 찬양’만 있을 뿐이다.


2014년의 12월의 일요일, 우리의 예배는 가능한가


안산, 안성, 강정, 성소수자들, 쪽방주민들, ......,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소, 많은 사람들이 신음 소리를 발하는 2014년의 한국. 교회는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며 일요일마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찬송이 끊이질 않는다. 하늘에 영광, 땅에는 평화를 선포하는 주님 오심의 메시지가 세상을 구원할 것처럼 말이다. 한데 박인환의 〈영원한 일요일〉은 여전히 그날 교회를 향해 올라가는 길에 작은 돌이 되어 우리의 발길을 불편하게 한다. 


ⓒ 웹진 <제3시대>




  1. 사막에서 거센 모래바람으로 만들어진 작은 구릉을 말하는 것으로, 두 번째 연의 문맥에서 전쟁으로 모래언덕 같은 강토가 모조리 으스러져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불모의 땅이 되어버린 현실을 시사하고 있는 것 같다. [본문으로]
  2. 볼록한 모양을 가리키는 일본어로, 평탄치 않은 고통의 시간을 뜻한다. [본문으로]
  3. 바람이 원인이 되어 생기는 질환을 가리키는 한의학 용어로, 전쟁으로 인해 상처입은 사람을 지칭하는 것 같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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