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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기: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뱀의 몸짓 (오종희)

영화 읽기

by 제3시대 2015. 1. 29.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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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몸짓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오종희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보는 내내 그 흔한 인생 이야기를 조용히, 영화적으로 풀어내는 감각에 부러움을 금치 못했던 영화. 관객이 이 영화 주인공의 살아가는 모습과 닮았느냐 안 닮았느냐 와는 

상관없이 또는 주인공이 살아가는 인생 여정에 동의 하느냐 마느냐 와는 상관없이 

영화 속 인물이 어느새 인생의 한 꼭지를 넘겨가는 모습에서 

수 만개의 또 다른 삶의 문턱에도 투영시켜 볼 수 있는 영화.

그래서 특별나게 화려한 인생일지도 모르는 한 유명 여배우의 삶을

내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에도 무리 없이 유비 시켜 볼 수 있고 시간의 잔혹함 까지도 생각해보게 하는 꽤 괜찮은 영화이다.



주인공 '마리아 앤더스' ( 줄리엣 비노쉬 )는 '빌렘' 감독 대신 상을 받으러 스위스 실스마리아로 가는 기차 안에서 빌렘 감독의 부고를 듣는다.

그녀는 20년전 빌렘 감독의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란 작품 속 '시그리드'라는 젊고 아름다운 악녀 역할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배우이다.

그 후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실력 있는 젊은 다른 감독에 의해 시도 되는 

'말로야 스네이크'의 리메이크 작품에서

이번에는 젊은 '시그리드'의 동성애적 상대역으로, 시그리드에 의해 이용당하고 

버림받아 결국 자살하고 마는 나이 많은 직장 상사 '헬레나'역을 제의 받게 되고

작고한 빌렘 감독 부인의 배려로 감독의 스위스 자택에서 그녀의 비서 '발렌틴' ( 크리스틴 스튜어트 )과 대본 연습을 하게 된다. 

마지못해 제의 받은 ‘헬레나’ 역 앞에서 주인공 마리아가 보여주는 혼란과 갈등이 

이 영화의 창문 역할을 한다.

여태껏 그녀가 그녀 자신과 동일시하던 젊고 패기 발랄한 ‘시그리드’를 버리고 그녀와 상관  없다고 느꼈던, 항상 건너편 타자일 것만 같았던 나이 많고 버림받은 ‘헬레나’ 역을,

늘 시그리드로 살았고 늘 시그리드 여야만하는, 시그리드란 기표아래 살고자한 마리아는

헬레나란 압박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헬레나 적인 삶은 그녀에게 어떤 것인가.

아니, 좀 더 루즈하게 범위를 넓히자면 헬레나란 캐릭터에 한정할 것 없이 

삶의 진행에서 너는 언제나 시그리드이길 원하는가?

그것을 고집한다는 건 무엇인가? 또는 인생의 흐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지는가? 기꺼이? 천천히? 불현듯? 마지못해?...

영화가 던지는 그런 단답 불가능한 질문들을 풀어가는 단초는 대사 몇 마디가 아닌, 역시나 

영화다운 방법으로 풀어간다.



마리아의 비서 발렌틴은 마리아가 자신과 동일시하는 시그리드의 나이 또래이다.

마라아와 발렌틴이 '말로야 스네이크' 속 시그리드와 헬레나 역을 연습하는 장면은

사실상 가상과 실재가 불분명한, 그래서 현실의 두 여인의 관계와 갈등을 수면위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마리아에 비해 확실히 발렌틴은 대본을 해석하는 발랄함이 있고

헬레나란 역을 대하는 선입감도 없이 자유롭다. 그래서 매번 둘은 부딪히고 

역할 자체에 거부감을 안고 있는 마리아는 어느새 고리타분한 느낌을 풍긴다.

더욱이 발렌틴의 연애 생활과 젊음을 시기하는 듯한 그녀의 행동은 

동성애적 긴장감 속에 둘의 권력관계가 역전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즉 '말로야 스네이크' 속 두 여인의 관계와 어느새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다.

연기 연습인지 현실 속 대화인지 모호한 얼마간의 시간 동안 

마리아의 연기는 연기라기보다 그녀 자신이다. 그녀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대척점과 같았던 어느 인생의 위치에 그녀 자신이 이미 스며들어있다.

둘의 관계는 확실히 마리아가 열세다. 그 이유는 발렌틴이 젊고 마리아가 젊음을 흠모 한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건 ‘시그리드’라는 이미 상징 기표화한 모습을 고집하고 동일시 세계에 갇혀 있는 마리아의 멈춰버린 운동력 때문일 거다.

이 불균형 관계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은 비서 발렌틴과 마리아가 산행을 하는 도중

발렌틴이 아무 말 없이 그냥 아웃되듯 사라지는 장면에서이다.

발렌틴과 발렌틴을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던 간에, 발렌틴을 떠나보낼 준비가 

됐던 안됐던 간에 그냥 사라져 버린다. 순식간에. 

이때 마리아는 수동성의 극치다.

하지만 마리아 자신은 그것을 알고 있을까.



또 한 번 영화가 보여주는 단초는 새로운 시그리드역을 맡은 조앤(클로이 모레츠)과의 관계에 의해서다. 그녀 역시 20년전 마리아가 그 역을 맡을 당시의 당찬 젊음을

소유하고 있다. 실제로 헐리우드 트러블 메이커인 린지 로한을 연상시키는 조앤은

유부남과의 스캔들을 일으키며 애정 행각에서 뿐만 아니라 연기에서도 신세대다운

거침없는 매력을 발산한다.

그리고 우여 곡절 끝에 연극이 상영되기 직전 무대 뒤에서 

마리아는 조앤에게 극중 시그리드가 헬레나를 버리고 떠나는 장면에서 

마지막인 헬레나를 위해 잠시 침묵의 시간을 준 후에 무대 밖으로 퇴장할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 조앤은 차갑게 거절한다. 이미 끝난 헬레나에게 그럴 필요가 있냐고...

바로 그 거절의 장면, 이 영화 <크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 존재하는 클라이맥스 같지 않은 클라이맥스가 아닐까. 마리아는 헬레나 역을 위한 시간적 말미를 조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조앤의 거절에 예상 밖으로 순순히 수긍한다. 그리곤 준비된 무대 세트에 

걸어 들어가며 뭔가 좀 더 여유로운 모습으로 무대가 열리길 준비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정말로 순식간에 일어나는 이 꺾임의 클라이맥스는 사실 이 순간이 있기 전 내내 세련되게 유도한, 마리아와 비서 발렌틴과의 얽힌 에피소드와 새로운 시그리드역의 조앤과의 만남에서 깔아 놓았던 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한 순간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번 역시 마리아는 조앤과의 관계에서 열세였고 시그리드 역을 내어준 패배의 지점,

혹은 부탁을 거절당한 수동성이다.

그러나 비서 발렌틴과의 마지막 이별에서 보여주던, 사라진 발렌틴의 이름을 부르며 

헤매는 뒷모습을 보이던 준비 안 된 마리아의 모습은 아니다.

무대 위 자신이 있어야할 곳에서 자신이 연기해야 할 순간을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은 

안정되고 응축된 에너지가 느껴진다.

이런 걸 성숙이라고 말해야 하나? 아님 학습 효과라 해야 하나?

하지만 에누리 없이 말한다면 늙은 마리아는 두 번이나 젊음에게 보기 좋게 까인 거다.

얼레벌레한 상태서 까였건 학습된 상태서 재빠르게 수긍했건 

까인 건 까인 거다. 두 에피소드 중 무엇 하나 늙은 마리아가 우세인 적은 없었던 거다.

그러나 이 영화를 늙어가는 여배우의 성장담으로만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시간은 흐르고야 마는 것 그러니 이제 그만 시그리드를 놓아 주렴” 이런 타이름이 영화에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 것 뿐이라면 영화도 인생도 너무 메마른 스토리에 한정된 게 아닐까.



그래서 영화 상영 중간 중간 보여 주었던 스위스의 자연과 

결정적으로 ‘말로야 스네이크’라는 구름이 마지막 단초가 되어 메마름을 적신다.

‘말로야 스네이크’는 스위스의 실스마리아 지역 말로야란 계곡서 보여 지는 구름 현상을 말한다. 구름이 계곡을 아우르며 감싸듯 흐르는 모습이 뱀과 닮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시 영화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 하자면 그 구름이 발생하는 곳은 ‘빌렘’이란 감독이 죽음을 맞이한 곳이기도 하다. 사실은 심장마비가 아니라 오랜 지병 끝에 

자살을 택한 장소이다. 빌렘은 말로야 스네이크를 보며 자살한 것일까?

또한 그 곳은 비서 발렌틴이 소리 없이 마리아와 이별을 감행한 곳이 기도하다.

사라진 발렌틴을 허둥지둥 찾는 마리아의 모습 다음 씬으로 스멀스멀 뱀 같은 구름이

그제야 몰려온다. 그 순간 마리아는 뱀을 본 것인가? 

영화상으로는 빌렘 감독도 마리아도 말로야 스네이크를 봤는지 못 봤는지 알 수가 없다.


바로 그것,  언제 산 너머서 밀려올지 알 수 없는 뱀의 움직임과도 같은 아름다운 구름, 어느 순간 감싸지고 밀려오고, 구름 생성의 기승전결을 확언할 수 없는 

손에 잡히지 않는 구름이 오히려 운명 순응의 잔혹함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뱀 같이 은밀한 구름의 움직임은 우리 삶의 엄폐물 속에 무엇이 숨겨져 불현듯 발현하며

우리를 열뜨게 할지, 아님 아무도 표현 못 할 삶의 끝에 이르게 할지

알 수 없는 또 다른 신비 공간을 제시한다.

그래서 영화 속 인물들이 구름을 봤는지 확언할 수 없는 것처럼

말로야 스네이크는 인생의 확언과 주인공 마리아가 겪었던 시간 앞에 어쩔 수 없던 잔인한 수동성을 지우는 은밀한 단초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시그리드’에서 ‘헬레나’로 주인공의 페르조나를 바꾸는 확연한 모습과 대조적으로 

‘말로야 스네이크’의 은밀한 아름다움은 영화 속에 함께 섞여져 확실한 것이 불확실한 것을, 불확실한 것이 확실한 것을 더 깊이 있게 만드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무대 위 마리아의 모습은 완숙하게 아름답다. ‘헬레나’를 받아 들였기 때문일까?

아님 ‘시그리드’ 뿐만 아니라 이제는 ‘헬레나’까지도 그녀 마음속에 

품을 수 있는 시기가 되어서 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까?

무엇으로 시간을 표현하든 그 것은 비가역적이고 잔인하다.

어떤 위로도 어떤 깨달음도 이 잔혹함을 누르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을 나오는 내내 마리아의 마지막 당당함 보다는 

영화 속에서 잠시 보여준 산악 영화 <말로야의 구름 현상>이라는 

옛 흑백 영상이 내 머리서 맴 돌았다.

아마도 내 머리가 시간의 잔혹함에 대응한 자가 치료를 했었나 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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