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신학정보] "텍스트, 시뮬라크르, 그리고 제의"_ 텍스트로서의 복음서 (이해청)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5. 9. 1. 00:05

본문


"텍스트, 시뮬라크르, 그리고 제의"_ 텍스트로서의 복음서




이해청
(성공회대 박사과정 / 탈식민성서해석학)

 


    양식비평 연구에서 미학적 의미에서의 ‘작가’라는 개념은 떠오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연구가 관심을 둔 곳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한 예로, 불트만은『공관복음전승사』에서 “삶의 자리가 개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한 공동체의 삶의 전형적인 상황 혹은 행동방식인 것처럼 문학 형태 및 형식은 사회학적 개념이지 미학적 개념이 아니다.”[각주:1]라고 썼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는 전승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법칙성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고 자신하도록 만들었다. “마태와 누가의 마가 처리에는 어떤 법칙성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Q는 마태와 누가에서의 재구성에 의존되지만, 그러나 여기서도 마태와 누가를 비교해 보면 가끔 Q에서부터 마태와 누가까지의 어록 자료의 발전이 어떤 법칙 하에 있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법칙성이 실제로 확인될 수 있다면, 이 법칙성은 마가와 Q에서 확정되기 전의 전승 자료에서 이미 작용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 자료의 형태로 확정되기 이전의 전승 단계에까지 소급해 갈 수 있다.”[각주:2] 그러나, 샌더스는 이러한 확신이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각주:3] 뿐만 아니라, 구테게만스는 형식주의와 구조주의 언어연구에 힘입어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는 양식비평의 방식이 과연 옳은 일인지 진지하게 되물었다.[각주:4] 또한 개별적인 전승 자료들의 문제를 넘어 문헌 구성의 문제를 물음으로써, 그는 양식비평이 가진 대부분의 전제를 반박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전승의 익명성, 공동체성, 전승의 발전 법칙 등과 같은 양식비평의 여러 전제들에 물음을 제기했던 것이다.[각주:5] 

     물론, 여기서 편집비평에 대한 언급은 빠트릴 수 없다. 막스젠에 따르면 복음서 저자들은 전승 자료들에 변화를 가하지 않고 단지 짜깁기만을 시도한 그러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순한 편집자 이상이었던 것이다.[각주:6] 때문에, 양식비평에서와 달리 복음서 저자들은 전승 자료들을 날것 그대로 보존해서 넘겨준 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관점에 맞게 전승들을 재구성한 하나의 신학적 작가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고로, 미학적 관점에 대한 고찰을 더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미학적 개념은 신학적 비평에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왜냐하면 미학적 개념은 자료들의 구성뿐만 아니라 자료들 자체에도 저자의 개성이 개입되었을 수 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가 단순한 수집가가 아니라 신학적 작가의 지위로 격상된 이상 구성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전승 자료들의 신뢰성 역시 담보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절단된 개별전승들조차도 각 복음서들의 줄거리에 맞게 주조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노릇이 된 것이다. 사실, 형식과 내용을 분리할 수 없다는 언어연구의 관점에서 보자면 절단된 개별전승들마저도 신뢰성에 있어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적은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미 불트만은 “편집이 단지 구전으로 전승된 것만을 대상으로 했다고는 볼 수 없다……또 우리의 마가복음서가 처음 문서화된 이후에도 가필되었으리라는 가정을 반대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차적인 자료들을 전승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각주:7]라는 벨하우젠의 말을 기꺼이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일차적 자료와 이차적 자료가 분리될 수 있고 그렇기에 복음서에서 역사적으로 순수한 일차적 자료를 안전하게 분리해낼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미학적 개념에서는 일차적 자료냐 이차적 자료냐 하는 구분은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미학적 개념에서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생생한 체험, 즉 일차적 자료가 후대의 공동체의 체험, 즉 이차적 자료를 지배하고 움직이며 나아가고 있다는 가설은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미학적 개념은 그 반대의 경우를 요구할 수도 있다. 종교적 경험의 측면에서 보자면 부활에 대한 미학적 경험과 같은 것을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아우얼 바하는 “성서의 화자는 전설의 진실성에 대한 그의 믿음이 그에게 요구하였던 바로 그것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가 만들어낸 것은 본래 리얼리즘을 지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실성을 향한 것이었다. 그것을 믿지 않는 자에게 재앙있거라!”[각주:8]라고 썼다. 마찬가지로, 그는 “마가복음을 쓴 필자는 그로 하여금 예를 들어 베드로의 성품을 객관적인 사실로써 그릴 수 있게 할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일어나고 있는 일의 복판에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명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만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위에든 사건에서는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즉 베드로가 어떻게 도망할 수 있었는가를 말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는다.”[각주:9]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결정타를 날렸다. “성스러운 글들의 전체 내용이 주석에 관련시켜지고 주석은 말하여진 것을 그 감각적 기초에서 떼어내는 일을 했다. 왜냐하면 독자나 청자는 실제 일어난 감각의 사건에서 눈을 돌려 그 의미를 생각하도록 요구받았기 때문이다.”[각주:10] 

     따라서 복음서 연구에서 전승의 신뢰성을 담보하는 기준으로 논의되고 있는 구전이론 역시 미학적 개념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찮은 일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바하가 지적한 것처럼 종교적인 미학적 경험은 주석을 요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날 것 그대로의 감각적인 체험은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석적 텍스트/이야기를 구성할 사명을 지닌 신학적 작가에게 대체 일차적 혹은 이차적 구분이나 구전과 같은 개념이 어떤 의미를 지녔겠는가? 과연 개별전승들의 신뢰성을 구전이론으로 방어해보고자 노력하는 최근의 보수적인 보컴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는 타당한가? 역사적인 예수와 가까웠을 수도 있는 특정한 개인들의 원초적인 목소리에 기대어 전승의 신뢰성을 설득하고자 애쓰는 보컴의 노력은 실로 눈물겹다.[각주:11] 하지만 그는 이것이 데리다가 지적한 현전의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신학적/철학적 노력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길지만 들어보도록 하자.[각주:12] 


 왜 음소는 기호들 중에서 가장 이념적인가? 소리와 이념성 사이의 아니 그보다는 목소리와 이념성 사이의 이 공모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내가 말할 때, 이 수행의 현상학적 본질에는 내가 말하는 그때 내가 나를 듣는다는 사실이 속한다. 나의 숨결에 의해 그리고 기표작용의 의도에 의해 혼이 불어넣어진 기표는 내게 절대적으로 가까이 있다. 살아있는 작용, 생명을 주는 작용, 기표의 신체에 혼을 불어넣어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표현으로 변형시키는 생기, 언어의 영혼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자기현전과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혼은 세계에 그리고 공간의 가시성에 내버려진 기표의 신체 속에서 죽음을 맞을 위험에 처하지 앟는다. 음소는 현상의 구사가능한 이념성으로 주어진다. 이렇게 영화작용이 자신에 의해 혼이 불어넣어진 것의 투명한 정신성 속에서 자기에게 현전함, 이렇게 삶이 자기 자신에게 내밀함, 이로 말미암아 말은 살아 있다고 늘 일러져 왔던바, 그러한 모든 것은 그러므로 말하는 주체가 현재에 자기를 듣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에서 데리다는 “기의의 형식적 본질은 현전이고, 소리로서의 로고스와 그것이 인접하는 특권은 현전의 특권이다.”[각주:13]라고 고쳐 썼다. 또한, 우리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자연적 문자언어는 목소리와 숨결에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것의 본성은 문자학적이지 않고 영기학적이다. 그것은 성직자의 것이고, 신앙고백의 내적인 성스러운 목소리와 아주 가깝고, 우리가 자신 안으로 되돌아가면서 듣는 그 목소리와 아주 가까운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내적 감정에 신의 목소리가 충만되고 진실하게 존재하는 현전이다.”[각주:14]라고 말이다. 신학의 구전에 대한 집착은 바로 이러한 연유때문일 것이다. 신의 목소리는 역사적 두께를 몰아내고 순수한 것을 되찾도록 최초로 믿은 자들의 음성 속에 심어놓은 것이기에 우리가 그 목소리의 목격자를 찾아낸다면 역사적 신뢰성을 충분히 담보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이미 문자로 정착된 복음서에서 때가 끼지 않은 순수한 전승을 찾는 것이 가능한가? 이와 관련해, “문자는 자신의 망각이고 외재화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면화하는 즉 정신의 역사를 여는 기억의 반대[각주:15]”라고 한 데리다의 지적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비록 데리다의 논의를 전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리쾨르 역시 “직접적인 목소리, 얼굴표정, 몸짓 대신에 이러한 매개물들을 이용하는 기록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굉장한 문화적 성취이다. 여기서 인간적 사실은 사라져 버린다. 대신 이제 물질적 표식들이 메시지를 전달한다.”[각주:16]고 지적한 바 있다. “담화의 운명이 이제 목소리에서 글자로 옮겨[각주:17]”진 것이다. 하지만 글이라는 것은 이것보다 좀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것은 바로 “글로 씌어진 담화에서는 저자의 의도와 텍스트의 의미가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다.[각주:18]”는 점이다. “절대적인 지금/여기는 시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위치들의 절대적 원천이었던 화자의 목소리, 얼굴 표정, 몸짓이 외적인 물질적 표지들로 대체되면서 폐기된다. 그리고 텍스트를 작가의 현존과 분리시키며 그것을 미래의 잠재적 독자층에게 열어 놓는 텍스트의 의미론적 자율성이 생겨난다.”[각주:19] 그렇다면, 텍스트란 목소리를 통한 자료들의 신뢰성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살펴 본 작가라는 미학적 개념까지도 파괴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적한 것처럼, 텍스트란 텍스트의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개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다른 의미는 영향사를 통해 중개될 것이다. 그렇기에 영향의 불안은 텍스트 내에 잠복해 있는 하나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전의 전승들과 해석들을 위협하고 덮쳐버리는 하나의 시뮬라크르로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텍스트로서의 복음서란 개별적인 전승 자료들만의 문제도 그렇다고 저자만의 문제도 아닌 독자가 개입되는 훨씬 더 복잡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 웹진 <제3시대>

  1. 루돌프 불트만, 『共觀福音書傳承事』, 허혁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1970, p.4 [본문으로]
  2. 루돌프 불트만, 같은 책, p.7 [본문으로]
  3. Sanders, The Tendencies of the Synoptic Tradi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9, pp.23~24 [본문으로]
  4. Guttgemanns, Candid Questions Concerning Gospel Form Criticism, trans by William Doty, The Pickwick Press, 1979, p.75 [본문으로]
  5. Guttgemanns, 같은 책, p.129 [본문으로]
  6. Willi Marxsen, Mark the Evangelist, trans by Roy Harrisville, Abingdon Press, 1969, p.21 [본문으로]
  7. 루돌프 불트만, 앞의 책, p.2 [본문으로]
  8. 에리히 아우얼 바하, 『미메시스』, 김우창, 민음사, 1987, p.25 [본문으로]
  9. 에리히 아우얼 바하, 같은 책, p.62 [본문으로]
  10. 에리히 아우얼 바하, 같은 책, p.62~63 [본문으로]
  11. 이에 대해서는 리처드 보컴, 『예수와 그 목격자들』, 박규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5, pp.39~79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12. 자끄 데리다, 『목소리와 현상』, 김상록 옮김, 인간사랑, 2006, pp,118~119 [본문으로]
  13. 자크 데리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4, p.42 [본문으로]
  14. 자크 데리다, 같은 책, p.39 [본문으로]
  15. 자크 데리다, 같은 책, p.53 [본문으로]
  16. 폴 리쾨르, 『해석이론』, 김윤성․ 조현범 옮김, 서광사, 1994, p.61 [본문으로]
  17. 폴 리쾨르, 같은 책, p.64 [본문으로]
  18. 폴 리쾨르, 같은 책, p.65 [본문으로]
  19. 폴 리쾨르, 같은 책, p.72 [본문으로]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