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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그리스도교와 와인, 그리고 나 (박여라)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5. 9. 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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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와 와인, 그리고 나

 



박여라



들어가며


    와인 공부를 시작한 뒤 서가에서 여러해 만에 성서를 꺼내들었다. 와인에 관련된 단어들을 주석책에서 찾아보기도 하고, 그 단어들이 나오는 성서본문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예전엔 생각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의미로 본문이 가깝게 다가왔다. 와인이 성서를 읽는 새로운 렌즈가 되어준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도 되어주겠구나 하며 와인공부가 더 재미있어졌다.

    그러고 나서 보니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경건하거나 근본주의거나 또 다른 어떤 이유로든 술을 죄악으로 여기는 개신교 신앙인들 중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와인 한 잔에는 너그럽다. 구세주 예수도 제자들과 포도주를 나눠마셨으니까. 그런가 하면, 성서 본문에 예수가 마셨다는 그 포도주는 우리가 아는 와인이 아니라 알콜이 없는 포도즙이라고 애써 주장하는 문헌이 적지 않다. 신학논문도 꽤 있다. 그래도 그 와인이 무알콜 포도즙이면 신앙이 무너질 것만 같은 그들의 주장하는 이유에 귀기울이는 것은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나의 신앙과 삶을 새로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성서와 와인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살며 알게 된 사실은 그곳이 성서에 나오는 지역과 기후가 아주 비슷하다는 점이다. 한 해는 건기와 우기 두 계절로 나뉘어 일년 강수량의 대부분은 10월에서 4월 정도에 몰려있고, 나머지 기간에는 비가 아주 드물게나 온다. 샌프란시스코 지역은 낮에 해가 뜨겁지만 공기는 건조하다. 그래서 한여름에도 그늘에만 있으면 전혀 덥지 않다. 비가 오지 않아도 저녁이면 안개가 몰려와 공기와 땅을 적신다. 남부 내륙 캘리포니아같은 사막이 아니다. 그에 비해 이스라엘은 여름이 좀 습하다고 들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밀, 보리,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 올리브 나무와 꿀(대추야자)이 있어 부족함이 없는 땅이라고 적었다.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 모두가 오늘까지도 그 지역 특산농산품이다. 비슷한 기후라 캘리포니아에서도 포도, 올리브, 무화과, 겨자 등 성서에 나오는 나무와 과실을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고 음식재료로도 흔하다. 자주 접하다보니 성서가 씌여진 지역의 자연과 문화가 한국에서보다는 가까이 느껴진다.

    성서 언어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에서 ‘포도주'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가 여럿이라서 기준에 따라 통계가 좀 다르지만, 포도주는 성서에 대략 220회 정도 나온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물과 빵, 그리고 올리브유나 무화과 등 다른 음식에 비해서도 훨씬 빈번하다. 그리고, 올리브유와 포도주는 음식 이상의 용도와 의미가 있었다. 와인의 역사는 수메르, 이집트, 페니키아 등 고대 근동부터 기록이 남아있다. 포도주가 자주 언급되는 성서 역시 지리, 자연환경, 인류학적으로 이 맥락 속에 있다. 비유와 이미지, 율법 등에 포도밭, 포도원 일꾼, 포도나무, 포도열매가 자주 등장하는 것에 비해 아쉽게도 교회에서 포도주가 주인공으로 이야기하는 대목은 대략 세 가지 정도 뿐이다. 갈릴리 가나에서 벌어진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첫번째 표적 (요한복음), 그리고 제자들과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나눈 ‘최후의 만찬'에서 앞으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마다 당신을 기억하라 하신 장면,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금식논쟁 중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으라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와인의 역사를 공부하며 성서와 겹치는 지점들은 더 다양하고 깊게 파고 들고 싶다.


그리스도교와 와인


    성서가 기록으로 남은 역사지리적인 현장이 포도주와 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포도주는 그리스도교와 함께 전세계로 퍼졌고, 포도주 연관기술도 그리스도교와 함께 발전했다. 4세기 말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에서 공식종교가 되었고, 로마시민의 삶 속에 깊이 들어가있던 와인은 제국의 세력을 따라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로 퍼졌다. 로마제국이 쇠퇴한 뒤에도 와인을 위한 포도재배지지역에선 포도재배와 와인제조가 계속했다. 역병과 온갖 혼란 속에서 일어난 수도원운동은 중세를 지내며 근대에 이르기까지 결과적으로 포도재배와 와인생산에 관련된 모든 과정에서 획기적인 공헌을 하게 되었다. 

    유럽국가들이 근대 이후 식민지를 만들며 전세계로 마구 뻗쳐나갈 때에는 오늘날 와인 신세계로 불리우는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로 포도나무와 와인기술을 가져가 무역을 했다. 미사를 위한 와인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와인은 삶의 일부였다. 캘리포니아만 해도 와인은 그렇게 전해졌다. 스페인이 가톨릭을 전하기 위해 18세기 말 식민지 샌디에고(지금은 캘리포니아 최남단)에 미션을 세웠다. 거기서부터 북쪽으로 약 1천km에 걸쳐 50km마다 총 21개의 미션을 세웠다. (50km라는 거리는 짐을 진 당나귀가 하루 이동할 수 있는 거리라고 한다.) 이 길을 지금도 ‘왕의 길(El Camino Real)’이라고 부른다. 로스엔젤레스, 산타 바바라, 산 루이스 오비스포, 카멜, 샌프란시스코 등 미션이 세워진 곳이 오늘날 도시가 되었고, 유명 와인산지의 중심지다. 가장 북쪽에 있는 캘리포니아 미션은 나파 옆 소노마에 있다.


포도나무를 키우다


    몇 년 전에 와인을 만드는 포도품종 묘목을 우연히 얻어 마당에 심었다. 올해 처음으로 잎이 돋는 과정부터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달리고, 포도가 익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책에서 배운대로 가지치기도 하고, 아침저녁으로 변화를 지켜보며 거미줄도 걷어내고 습기에도 바람이 잘 통하라고 잎도 좀 정리하고, 또 열매가 익어갈 때에는 햇볕을 잘 받을 수 있게 했다. 풀지 못한 수수께끼처럼, 혹은 내게 내려진 선문답이나 화두처럼 포도나무에 관한 말씀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고 있다. 포도나무를 키우는 농부 하나님과 참 포도나무인 예수, 그리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라는 말씀. 그 뜻을 알 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런데, 새싹을 내고 가지가 뻗어나가고 열매가 맺는, 살아있는 포도나무가 말씀에 생명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올해 포도는 여섯 송이 달렸다. 소량이라도 와인을 만들어 볼까 생각이 없진 않았는데, 그 꿈이 물건너 가고 있다. 죽 쒀서 새 주고 있다. 포도알이 하나씩 익는 대로 새들이 다 먹어치우고 있다. 마당에 하릴없는 고양이도 한 마리 상주하건만, 새가 포도를 쪼아먹을 때 쫓기는 커녕 그저 새가 뭐하나 지켜본다. 이번 주에는 포도를 따야겠다.


* 필자소개_ 박여라

    분야를 막론하고 필요한 스타일과 목적에 따라 한글 텍스트를 영문으로 바꾸는 진기를 연마하고 있으며, 그 기술로 먹고 산다. 서로 다른 것들의 소통과 그 방식으로서 언어에 관심이 많다. 미디어 일다(ildaro.com)에 ‘여라의 와이너리’ 칼럼을 쓰고 있다. 미국 버클리 GTU 일반석사 (종교철학 전공) /영국 WSET 디플로마 과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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