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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사랑, 독한 열정 - 우리의 고통은 이렇게 자본화되어 있다 (김진호)

시평

by 제3시대 2009. 4. 20.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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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독한 열정
우리의 고통은 이렇게 자본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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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그렇게 욕을 보이고 나니, 암논은 갑자기 다말이 몹시도 미워졌다.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기왕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하였다.
암논이 그에게, 당장 일어나 나가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사무엘기하」 13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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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지스와프 백진스키 作 <무제>

그녀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얼굴, 몸매, 목소리, 걸음걸이, 그녀에 얽힌 모든 것이 하나하나 사랑스러웠다. 저 멀리 사람들 틈에서도 금방 그녀임을 알아 볼 수 있었고, 눈을 감고 있어도 그녀의 자태가 선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그녀를 볼 수 있기 때문이고, 밤에 잠을 자는 것은 상상 속에서 그녀를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 스케줄은 그가 꿰고 있는 그녀의 동선(動線)을 따라 짜였고, 그녀 때문에 국정을 배우는 일에도 더욱 열정을 다할 수 있었으며, 신체를 연마하는 데도 더욱 부지런히 준비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있었기에 그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더욱 최선을 다할 의지가 북돋아졌고, 그녀가 있었기에 최고를 위한 경쟁에서 수단방법 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모든 행동과 생각과 계획은 모두 그녀와 연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해서는 안 되었다. 그녀가 이복누이동생이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와 왕권을 두고 경쟁하는 이와 같은 혈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그 집은 정말 재수 없는 집안이었다. 유다 왕국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는 새똥만한 나라(요르단 동북부 바산 지역에 있는 소국인 그술)에 불과한데, 그것도 왕족 출신이라고 얼마나 있는 척하는지 아니꼽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왕족이라는 점이 대신들에게 먹혀들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겐 부담스러웠고 부러웠다. 게다가 그자는 용모가 준수했고 기골이 장대했다. 말은 또 어찌나 수려한지, 감언이설에 넘어가 장자인 자기보다 그 동생을 지지하기로 한 이들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었다.

그가 왕이 되고 싶은 것은, 적어도 그 즈음에는, 이복누이인 다말 때문인데, 그가 왕이 되려는 한 그녀는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녀의 친 오라비인 압살롬은 대권을 포기할 자가 아니고, 자기 또한 그럴 수 없었다.

마침내 병이 들고 말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정이었기에, 욕정은 더욱 불타올랐고, 그런 마음을 다스릴 만큼 그는 야심만만한 성품도 단호함도 갖추지 못했다.

궁이란 이런 낌새가 비밀로 지켜질 만한 곳이 아니다. 더구나 대권을 두고 싸우는 두 왕자의 일거수일투족은 궁의 모든 사람들의 표적이었다.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지만, 각자는 그 정보 하나하나를 두고 치밀한 계산을 하며, 전략을 편다. 암논, 이 영리하지 못한 왕의 장자는 자기의 약점을 노리면서 펼쳐지는 온갖 술책들을 간파할 이해력도 없었고, 사랑의 열정은 그나마 있는 부족한 판단력마저 마비시켜 놓고 말았다.

그때 왕의 노련한 책사인 요나답이 접근해 왔다. 어릴 적부터 친구였고 너무나 영리한 자여서 가깝게 지내고 싶었지만, 그는 자기가 아닌 왕의 사람이다. 근데 어느 날 그가 와서 권한다. 자리에 아예 누워 앓는 시늉을 하라고, 왕이 문병 오면 다말의 시중을 청하라고 말이다. 그녀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는 단박에 그렇게 행동을 한다.

아버지 다윗은 암논의 청을 들어준다. 궁내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왕이 저 조심성 없는 장자의 간청을 들어주었다가 자칫 형제간에 골육상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을 모르지 않을 법한데, 어찌된 일인지 왕은 요나답이 예상한 대로 행동했다. 왕의 측근의 한 사람이기에 왕이 허락할 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위에서 추측한대로, 왕의 허락이 조심성 없는 것이라면, 요나답은 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왕이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뜻밖에도 왕은 허락했다.

그렇다면 잠시 왕의 입장에서 사태를 점검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요나답이 암논의 사정을 알고 다가와 자문을 해주었다면, 다윗이 그것을 모를 가능성은 별로 없다. 말했듯이 요나답은 왕의 측근이고,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이 가장 유리한 것임을 잘 아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윗은 그 허락이 초래할 사태까지도 계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장자인 암논은 영리하지 못한 아들이다. 나라를 맡기기엔 부족했다. 한편 다말의 친오라비인 압살롬은 너무 영리했다. 게다가 그의 어미는 그술국의 공주다. 그술국과의 친선관계가 유다 왕국에게 유리했기에 다윗은 그녀와 정략결혼을 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왕권을 그술국 공주의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왕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대신들이다. 대신들은 벌써 줄서기를 시작했다. 이 두 왕자가 왕권을 승계할 유력한 후보들이니 그들을 지지하는 파가 나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하여 왕과 책사인 요나답은 일련의 음모를 기획하였던 것은 아닐까. 두 왕자를 제거하려는 .........

아무튼 간병차 방문한 이복누이를 암몬은 충동적으로 강간해 버린다. 상사병으로 몸져 누워있던 터였다. 오직 다말 생각에 판단력이 극도로 흐려져 있던 차였다. 하여 그는 순간의 욕정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걱정이 밀려온다. 가뜩이나 압살롬에게 호감을 갖는 이들이 하나씩 늘어가고 있는데, 가뜩이나 자질이 부족하다는 말이 돌고 도는데, 누이동생을 강간했다는 소문이 나면 그야말로 치명적인 사태가 예상되었다. 게다가 아버지 왕의 매서운 눈초리가 그를 몸서리치게 했다.

순간 그는 이 모든 것이 다말 때문이라는 생각에 빠져든다.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피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쩌자고 오라비의 경쟁자인 자신에게 왔단 말인가. 혹 압살롬, 그자의 간계는 아닌가. 몸을 팔아서라도 자기 오라비를 왕으로 만들려고......, 이런 창녀 같으니라고.
암논은 그녀를 사납게 밀치고 내쫓아 버린다. 남자와 성관계를 맺은 한 여인이 버림받으면 그것은 그녀의 수치이고 가문의 수치다. 해서 그녀는 뭇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아야 한다. 그게 사대부가나 왕실 여성의 법도다. 암논이 그걸 모를 리 없지만, 그 순간 그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아니 배신은 자기가 한 게 아니라 저 창녀 같은 여자가 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충동적으로 그렇게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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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 Dine 作 <The Six Foot Heart Machine>(1991)

모든 것을 다 걸만큼 열렬했던 그의 사랑은 한 순간에 재로 변했다. 최고가 되고자 하는 열망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던 사랑의 열정은 한 순간에 최고가 되고자 하는 열망의 가장 심각한 장애물로 각인되었다. 그는 그녀를 원망했고 저주했다. 그의 사랑, 그 ‘독한 열정’은 녹아버린 더러운 눈의 잔해에 다름 아니었다.

드라마 같은 얘기다. 대개의 현실은 그렇게 극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독한 열정만큼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열정적 사랑들이 불꽃을 일으켰다. 사랑의 열정과 열병은 누구나 거쳐 가는 통과의례처럼 다가왔다 지나간다. 삶의 커다란 동력이 되고, 가장 소중한 것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강한 충동을 일으킨다. 그런데 불꽃을 일으키며 사랑을 불태우고 있는 그 순간조차도 그 격정적 감정들은 다른 욕망들과 겹쳐지며 표출되곤 한다. 그리고 종종 열정적 사랑은 독기를 내뿜으며 증오를 일으키고 극심한 상처를 발생시킨다. 하여 사랑은, 그 앞뒤 안 가리는 열정은 가끔 독한 열정으로 변모한다.

한데 모든 열정적 사랑이 독기를 일으키며 상처를 야기하는 이별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열정적 사랑이 결혼으로, 이별을 억제하는 그 제도 안으로 안착한다. 일단 이 제도 속에 포섭되면 이별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굉장한 비용을 지불해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사랑의 완성이라는 미학적 담론으로 포장된 그 제도를 둘러싼 현실이 또한 사랑의 독성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임을 간과할 수 없다. 이에 관해서는 수많은 얘기들을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 제도로의 진입의례라고 할 수 있는 결혼예식에 관하여, 그 독성의 가능성에 대하여 얘기해보기로 하자.

열정적 사랑에 빠진 이는 결혼을 그 제도 속의 일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그것을 포장하는 판타지를 통해 열망한다. 그런 점에서 결혼을 향한 열병은 현실을 유보시키는 ‘초월적인 정념’이다. 한데 누구든 그 제도 속으로 진입하는 과정에 다가서면, 그 초월적 정념은 지극히 세속화된 현실과 접속하게 된다. 물론 그러한 초월과 세속의 접속은 사랑의 열정이 진행되는 도처에서 체험된다. 사랑의 열정 자체도 그러한 계산법과 결코 분리되어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결혼예식은 그 중의 단지 하나의 체험일 뿐이다. 

최근 결혼의 상업화 현상을 연구한 한 논문에 따르면, 2003년에 결혼예식 전후 과정(상견례에서 집들이까지)을 포함하여 평균 1억 3천5백만 원 정도가 지출되었다고 추산한다. 이 중 신혼집을 구매하는 비용이 가장 높으며, 가구 가전 등 살림기구의 구매 비용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또한 예식 자체를 위한 비용도 적지 않다.

이러한 지출구조는, 1998년을 예외로 하면, 1990년대 이후 줄곧 가파른 증가추세를 띠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결혼 컨설팅 업체들의 활발한 마케팅의 소산이며, 드라마 영화 가요 뮤직비디오 등에서 이른바 ‘사랑 마케팅’이 고도로 첨예화된 탓이다. 좀더 넓게 보면,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가 소비사회로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였고, 그로 인해 ‘일상의 상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된 하나의 양상으로 결혼을 둘러싼 소비시장이 극대화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사랑은 일상의 상업화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부문임은 의심의 여지없다.

결혼이라는 판타지를 활용한 마케팅은 소비욕망을 불러온다. 이 욕망은 치밀한 ‘사랑의 계산법’과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일종의 ‘위신의 전략’이기도 하다. 소비사회는 위신이라는 자본을 위한 비용을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 위신의 계산법은 사랑의 열정을 녹아버린 더러운 눈처럼 만들기도 한다. 아니 사랑의 열정 자체가 상업화되는 사랑의 계산법과 뒤엉키면서 이미 독성을 띠고 있기도 하다. 알게 모르게 그 열정 속에 상처 주고 상처 받는 파괴적 독기가 함유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혼비용의 과다지출은 결혼 당사자의 수입으로는 불가능한 액수다. 하여 그 비용은 많은 경우 부모로부터 나오는데, 그것은 부모세대 가계부채의 주요 요인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이로 인한 노년의 비루함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이것이 가족주의를 온존시키는 하나의 요인임을 지적고자 한다. 그런데 소비사회의 주체화된 개인들은 전통적 가족을 수용할 수 없는데, 아직 소비사회에 적합한 대안적 가족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가족주의는 여전히 전통과 접속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결혼의 과다지출은 가족 내의 갈등을 야기하는 고통의 주된 요인이 되곤 한다.

여기에서 언급한 것은 결혼비용의 과대화가 초래할 수 있는 많은 것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 말했듯이 이것은 사랑의 상업화, 직접적으로 ‘사랑 마케팅’이 활성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사랑 마케팅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그 욕망은 사랑의 열정 속에 스며들어 있다. 하여 사랑의 열정은, 그 속에 담긴 사랑의 욕망은 누구나, 대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시장화된 가치에 의해 잠식되어 있다. 요컨대 사랑의 욕망이 초래할 수 있는 비극의 배후에는 시장의 원칙이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암논의 욕정과 배신의 배후에는 왕권쟁탈이라는 전근대정치로서의 권력의 원리가 작동했다면, 현대인에게는 시장의 정치로서의 권력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부활을 기리면서 나는 이 시대의 고통에 관해 얘기하고자 했다. 특히 고통을 일상적 차원에서 살피고자, 그 중 두드러진 하나인 열정적 사랑과 결혼에 관해 얘기했다. 그 아름답게 포장된 정념과 제도가 담고 있는 독한 성질에 대해, 사랑하던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심지어 죽게 할 수도 있는 그 독함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속에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성찰하고자 했다. 부활을 기리는 우리의 고통은 이렇게 자본화되어 있다고 말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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