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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힘] 판테온에서 (오종희)

시선의 힘

by 제3시대 2015. 10. 19.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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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테온에서




오종희

(본 연구소 회원, 한백교회 교인)




광화문 대극장


     거대 도시인 서울하고도 그 중심인 광화문 일대를 산책자가 되어 걷다 보면 이곳이 일종의 무대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우아한 상점이나 최신의 유행 같은 소비 자본주의 얼리어댑터들의 성지는 강 건너 남쪽으로 천도한지 이미 오래된 이야기 이지만 강 건너의 그런 화려함과 스타일리쉬함 만으로는 격동의 연극적 무대를 채우기 밋밋하다는 점에서는 역시나 세습 군주가 살던 왕궁과 민주제 대통령이 사는 청기와 집과 야단법석 아고라가 공존하는 광화문이 대한민국의 파토스를 상연하는 무대라 하기에 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한 쪽에서는 중국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관광버스가 차도에 늘어서 키 높은 성벽을 만들고 한쪽에서는 궁궐 수문장 교대식이 그 곳이 과연 무대임을 확인 시켜주고 한 쪽에서는 어지러운 글귀와 남루한 천막, 노란리본이 바람에 파르르 떠는 가슴시린 광경이 시간차도 없이 단지 몇 백 미터 안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곳, 아니 동시에 상영되는 곳이 광화문 무대인 것이다. 

    그런데 무대상의 올려 진 광경이 난장판이라면 난장판이고 부조리하다면 부조리하고 퓨전적이라면 퓨전적인데 비해 막상 그 무대라는 모양새가 갖는 건축적인 구조는 권위적 이라는 얄궂은 구멍이 존재한다. 

    광화문 성벽을 중심으로 무대는 T자 모양으로 정리되고 그리곤 누구나 알다시피 장군님 뒤에 대왕님, 대왕님 뒤에 광화문 그 뒤에 경복궁 그 뒤에 청와대가 위치한다. 거꾸로 거스르면 청와대에서 아래로 아래로 굽어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무대의 효과는 매우 드라마틱해서 광화문 광장에서 바라보면 청와대와 인왕산 후면으로는 마치 세상의 끝일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연극 무대 위 파사드 장치처럼 더 이상의 배후는 없고 그 곳부터 앞으로 앞으로의 발현만이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준다. 광화문 거리는 일종의 대극장인 셈이다.  

    입체 무대나 마당극 류의 열린 무대가 아니라 영화관의 스크린처럼 관객은 한 방향을 바라보며 더 이상의 배후는 없다. 관객은 입 다물고 조명이 꺼지면 한 시간이건 두 시간이건 필름이 돌려지는 방향을 거스를 수 없다. 얌전히 착석하여 감상하는 무대 그것이 광화문 무대이다. 장군님부터 대통령까지의 국가 급 영웅만이 활거 할 수 있는 곳, 일관된 서사로서의 희곡만이 올리도록 디자인 된 곳이 광화문 무대이다. 막간의 쉬는 시간에 분수 터에서 옷 적시며 즐거워할지언정 뭔가를 외치거나 뭔가를 주장하기에 혹은 개미 관객의 존재감을 드러내기에는 위압감으로 인해 쫄게 만드는 곳, 아니면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부적합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군사 독재시절 5.16 광장으로 불리기도 했던 여의도 광장은 열 맞춘 탱크를 앞세운 군대의 퍼레이드나 ‘국풍 81’ 같은 관변 축제가 어울릴만한 대규모 아스팔트 광장이었다면 광화문 광장은 셀카 봉을 들고 나와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여름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간헐적으로 바닥에서 솟아나는 분수를 즐기기에 적합한 곳 그도 아니면 천만의 인구가 바글거리는 도시의 중심에 와 있다는 근거 없는 만족감을 주기에 적합한 소규모 시멘트 광장이다. 

    여의도 광장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얼핏 시대도 변하고 그 광장의 사용 주체도 정부에서 시민으로 옮겨지고 광장을 채우곤 했던 덩어리진 프로파간다는 없어진 듯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프로파간다는 없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동원하지 않아도 기꺼이 광장을 제 발로 채우는 시민이, 관광객이 그 역할을 맡는다. 그들이 자발적인 모습으로 광장을 즐기는 한, 사진을 찍고 밝은 웃음을 흘리는 한, 교양시민의 줄쳐진 질서를 지키는 한 모두는 광화문 광장의 화려한 내용물이 된다. 당연히 동원된 어색함이나 칙칙함에 비 할 수 없다. 그들은 밤하늘 별들처럼 개별적으로 빛나고 반짝거린다. 그리하여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들은 잘나가는 국가의 일관된 서사를 위한 프로파간디스트들이 된다.

     그래서 광화문 광장 한 켠 일관된 서사를 방해하는 저항의 노란 리본이 누구에게는 그 어느 곳보다도 부조리해서 더 가슴 아픈 광경으로 보이게 하고 누구에게는 이제는 그만 봐야 할 지리멸렬한 광경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이런 부적합은 광화문에 국한된 일은 당연히 아니다. 대한민국 대도시 어디에도 자본 사회가 제공 하는 서사를 방해하는 존재나 퍼포먼스를 환영하거나 어울릴만한 곳은 없다. 도시란 곳이 그런 곳이 아닐까. 자본과 권력이 눈덩이처럼 뭉쳐져서 덩치 큰 빌딩으로 존재하는 곳, 빌딩과 빌딩 사이 가장 높은 펜트하우스 어디쯤에 자본과 권력이 모셔진 지성소가 차려져있을 것만 같은 곳. 그래서 군부 독재시절의 폭력이나 확성기를 동원한 촌스러운 계몽 없이도 도시가 보여주는 건축적 이미지만으로도 교양시민은 저절로 훈육되어진다. 그래서 십인십색 백인백색 개성 강한 외모의 행인들이 거리를 채운다 해도 그들의 발랄한 에너지는 기존 법규의 그물망에 거하는, 권력에 의해 어떤 형태로든 변환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깔끔한 배터리의 형태가 아닐까. 백만 스물 하나! 백만 스물 둘!





판테온


     광화문 동십자각 옆 한 유명한 사진관 앞을 지나다 보면 쇼윈도우에 걸어 놓은 아주 재미난 사진이 눈에 띈다. 수십 명의 유명인들 머리가 검은 바탕위에 성스럽게 박혀있어 마치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경배라도 올려야 될 것만 같은 사진이다. 요즘 말로 웃픈 사진이다. (자세히 보면 얼굴들 간의 서열도 분명하다.) 

    그들이 사진에 그렇게 걸려있는 이유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그 들은 그 사진관에서 사진을 박은 유명인들 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 사실이 이 사진관의 영광이었기 때문일 테고 확대해서 표현하자면 그들은(연예인을 제외하고) 단순 유명인이 아닌 어떤 식으로든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했던 혹은 하고 있는 갑중의 슈퍼 갑으로서 유리 만신전에 모셔야 할 권력의 현현들이기 때문이다.

    보는 이의 성향에 따라 혹은 이해하기에 따라 수 십 명을 한 신전에 몰아넣은 것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거부감 정도는, 뭉텅이로 그들의 얼굴을 몰아놓곤 뭘 느끼라는 건지 명령하듯, 군림하듯 하는 사진 이미지의 가차 없음이 주는 미식 꺼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로써 광화문 대극장에서 상연되는 또 하나의 국가 급 서사를 목도하는 순간이다.





    때마침 십대 소녀 몇 명이 걸어오다 만신들을 발견한다. 아마도 신들의 용안을 알아보는가 보다. 자기들 끼리 부산하게 움직이며 기웃거린다.





    그러고는 만신전을 배경으로 번갈아 사진을 찍는다.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던 내 카메라를 발견하자 해맑게 웃어주기 까지 한다. 한 번만 더 찍겠다고 내 쪽에서 집게손가락을 펴 보이자 이내 V자 까지 만들어 준다. 그 모습을 보자 미식 거렸던 내 속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괜한 트집이었을까. 괜한 분노였을까. 

    그렇다. 아이들에게는 저 권력의 현현들이 단지 나들이 추억을 배가 시켜줄 사진 배경 이상도 이하도 아닐 런지 모른다. 전직 대통령 얼굴을 알아 본 거고, 연예인을 알아본 거고 , 나머지 얼굴은 누군지 잘 모르는 거고 더욱이 단 한 번도 그들을 신이라 생각해본 적 없는 거고 단지 즐거운 외출을 위한 환경일 뿐인 거고 그러면 되는 거지 보기 좋게 만신들을 이용한 거지...

     하지만 꺄르륵 거리며 어디론가 걸어간 아이들 뒤로 다시 웃픈 사진을 보자 권력이 의도하는 건 정확히 이정도의 반응, 이정도의 소극적 경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지 넘어 외에 더 이상 관심 갖지 말고 더 이상 가까이 가려하지 말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선 밖의 자리를 지킬 것, 기꺼이 알아보고 즐거이 사진 찍을 정도의 소극적 경배를 하되 불온하게 상층부 지향성을 갖지 말 것, 그리하여 영원한 브라만의 팍스 코리아나를 공고히 할 것!


용도변경


     저 해맑은 아이들이, 광화문에서 아니 도심 어디에서건 은밀히 작동하는 통제기술 앞에서 불온을 생각하는 새로운 산책자가 되길 꿈꾸어 본다. 통제자가 기획하는 예상되어진 동일한 반응을 백만 스물 한번 반복하는 에너자이저가 아닌, 생각이 멈춘 도심 공간 곳곳에 맞서 충분히 놀 수 있는 주체로, 이름 정해지지 않은 놀이를 하는 주체로, 생각하는 주체로 걷게 할 수는 없을까. 내가 했던 백만 스물 한번 왕복 운동에 대를 이은 아이들이 백만 스물 두 번째 왕복 운동을 반복하며 계속해서 매끈한 서사가 이어지는 이 공포의 무대에 회심의 태클 걸기란 어떤 것일까. 혹시 무대라는 공간을 용도 변경하는 것이 태클 걸기의 작은 모습이 아닐까. 광화문 광장 노란 리본과 천막이 매끈한 영웅 무대의 일관성에 이의를 제기 하듯이 도시 공간이 의도하는 용도에 불온을 담아내는 것, 통제 기술이 의도한 결과 이외의 것을 그 공간에 발생시키는 것, 그래서 일시적이나마 전혀 생경한, 도시의 헤테로 토피아를 출현하게 만드는 것, 만신전 앞에서 실컷 웃어주거나 가볍게 개 무시 해 주는 것, 도시 공간 자체를 수만 개의 촛불로 채워 질 가능태로 보는 것, 그래서 맘속에 항상 촛불 하나 오롯이 켜두는 것 말이다.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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