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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마당] 풍족한 가난 (김진호)

목회마당

by 제3시대 2015. 11. 2.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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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족한 가난

 

김진호
(본 연구소 연구실장)


그 날에는, 비록 한 농부가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밖에 기르지 못해도 

그것들이 내는 젖이 넉넉하여 버터를 만들어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서」 7,21~22a

 

    온 국토가 르신의 말발굽에 난도질당했다. 이제 남은 것은 예루살렘뿐이다.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이 마치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하는 수풀처럼 흔들렸”다.(〈이사야서〉 7,2) 장인(스가랴 왕)의 나라 이스라엘은 연이은 쿠데타로 갈가리 찢겨진 채 다마스커스의 국왕 르신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나라로 전락해 버렸다. 르신이 주도하는, 아시리아의 침공에 대항하는 동맹에 베가는 적극 참여했다. 한데 사위의 나라이자 봉신국이던 유다국이 이 동맹에 참여할 것을 거부하자 베가를 비롯한 동맹국들이 사방에서 유다국을 향해 진군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 베가의 군대에 유다국 왕자 마아세야와, 궁내대신 아스리감, 그리고 총리대신 엘가나가 죽임당했고, 수만 명의 백성이 끌려갔다.(〈역대기하〉 28,7~8) 동맹에 참여한 나라들은 여기저기서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학살했으며, 여자들을 강간하고, 노예로 끌고 갔다. 게다가 궁 안에서는 동맹 참여파에 의한 궁중 쿠데타 시도까지 있었다. 밖에서는 사방에서 적들이 쳐들어오는데, 안에서는 국론이 갈라질 대로 갈라졌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해서 유다 국왕 아하스는 극단의 선택을 한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왕자를 제물로 바쳐 불에 태운 것이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저 모든 침략자들이 정복을 눈앞에 두고 철군하였다.  

    “야훼께서 돌보아 주셨다. 야훼께서 돌보아주셨다. 왕자님의 죽음을 보고 야훼께서 돌보아 주셨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사력을 다해 성을 방어하던 병사들도 소리친다. 만조백관이 한 목소리로 외친다. 왕도 눈물을 닦으며 그렇게 확신했다. 그들에게 이 구원은 너무나 감동적이고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데 반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하는 것을 극력 반대했던 예언자 이사야는 죽은 아들이 아니라 새로 태어난 아들에게서 구원의 징조를 이야기한다. “젊은 여자(알마, עלמה)가 아이를 잉태할 것이다. 그 아이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이사야서〉 7,14)  

    이사야의 구원 해석이 왕과 만조백관, 그리고 백성과 다른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이는 이 아이가 장성할 때까지 ‘우유와 꿀’을 먹고 자랄 것이라고 말했다.(7,15) 묘한 뉘앙스의 말이다. 왕궁 아이의 음식은 절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광야 족속들의 음식이다. 그렇다고 우리말의 나무껍데기 씹어 먹는 것과 같은 처절한 민중의 음식도 아니다. 가난한 광야 백성들이 먹는 평범한 식사다. 요컨대 그 식사는 ‘풍족한 가난’을 상징하고 있다.  

    이어지는 18~25절의 말도 재앙을 얘기하고 있다. 적군이 쳐들어와 온 국토가 유린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붙잡혀 간다는 것이다. 한데 그 재앙 한 가운데에, 21~22절의 말, 모두가 몰락한 상황에서 맞는 ‘소박한 구원’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한 농부가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밖에 기르지 못해도 사람들은 넉넉하게 버터와 꿀을 먹으며 살아갈 것이라고 말이다.

    풍족한 가난, 그것은 일종의 이미 주어진, 하지만 ‘아직은 유보된 구원’과 같은 것이다. 적의 군대가 물러갔어도 아직은 고통스러운 시간이 계속될 것이다. 구원은 유보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구원은 도래했다. 풍족한 가난으로 말이다.  

    일종의 ‘전후’ 체험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삶을 말하는 것이겠다. 그것은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이며, ‘새로운 전쟁’, 마음의 전쟁 체험이기도 하다. 해서 전쟁이 끝나기를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애절하게 기도했듯이 여전히 간구하며 견뎌내야 하는 시간, 그것이 바로 ‘전후’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전후’, 유보된 구원의 시간에 대해 묘한 구원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풍족한 가난이라고 말이다.

    나는 여기서 지난 2011년을 떠올린다. 수차례의 전후 체험이 있었지만, 우리가 쉽게 간과했던, 하지만 그때 우리를 당혹하게 했고, 성찰적으로 되새기지 않으면 더 큰 재앙으로 우리를 덮쳐올 것이 예상되는 사건이 그 해에 태풍처럼 거세게 지나갔습니다. 거의 4백만 마리에 달하는 소와 돼지를 몰살시킨 전대미문의 사건, 그 참혹함의 시간이다. 죽을만한 질병이 아닌 병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병을 ‘죽음의 낙인’으로 간주했다. 이유가 있는 낙인이 아니다. 인체에 전염되는 인수공통전염병도 아니고, 치사율도 5~10%에 지나지 않으며, 병증도 경미한 질병일 뿐이다.  

    그럼에도 인류는 그것을 ‘죽음의 낙인’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청정국 지위를 박탈당한다는 이유 하나로 각국은 구제역이 발생하면 학살을 시작한다. 그리고 2011년 한국처럼 국가가 방역에 실패하면 그 학살은 재앙으로 돌변한다. 그렇게 한국에선 수백만 마리의 가축을 생매장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유대인이라는 ‘죽음의 낙인’이 찍혔던 시인 파울 첼란(Paul Celan)은 “말 한 디에 죽음 하나”라는 참혹한 시어를 썼다. 열정을 다해 세계를 숙고하며 인생을 논했던, 가치와 이념과 진리에 대해 깊은 통찰을 얻고자 사력을 다해 살아왔던 이들이 독일 장교가 호명하는 숫자 하나에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수용소의 현실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구제역 살상의 현장에서는 그런 것도 없다. 일단 발병한 동물이 있으면 인근 지역의 모든 소와 돼지 등을 가리지 않고 생매장하는 학살의 참혹함만이 있을 뿐이다.  

    유다국에 쳐들어온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하루 만에 유대병사 12만 명을 학살하고, 20만 명의 백성을 끌고 갔다는 재앙 묘사(「역대기하」 28,7~8)가 떠오른다. 얼마 후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이스라엘 국의 유민이 대거 남하하여 인구가 급증하였을 때도 유대국의 총 인구가 12만 명 정도에 불과했으니 위의 수치는 터무니없는 과장임에 분명하지만, 이 구절은 전쟁의 참혹한 피해가 유다국 전 주민에게 죽을 만큼 혹독한 고통을 선사하였다는 얘기에 다름 아닐 표현으로 읽으면 될 것이다. 즉 말 하나에 죽음 하나, 아니 말 하나에 수십만의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본문을 그냥 무덤덤하게 ‘그땐 그랬지’라고 말해버리는 ‘영혼 없는 말’처럼 읽을 수도 있다. 그것은 마치 구제역 사태로 소와 돼지를 학살하기로 결정했다고 냉랭하게 말하는 정치당국자들의 말과 비슷하다. 또 그런 뉴스를 보면서 무덤덤했던 우리도 별반 예외가 아닐지도 모른다.  

    도대체 아무것도 아닌 질병을 이렇게 학살의 낙인으로 둔갑시킨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직접적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 근원적인 대답은 가능하다. 축산 시스템이 대규모로 기업화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제역 학살의 근원적 배후라는 것이다. 가축을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떼어놓고 대량사육하는 시스템이 작동되면서 가축과 사람 간의 공동체적 유대가 사라진 것이다. 대량사육의 시스템이 규정한 글로벌스텐다드는 이렇게 생명체간의 관계 파괴의 원리로 작동한다. 그러고 나서 황폐해진 소규모 축산업이 몰락하고 나면 그 지역에 방대한 축산단지가 개척되고, 그 지역의 농민을 강제이주시키며, 또한 인근 지역에서 거대한 사료농지가 조성되는 방식의 기업화된 축산시스템이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소 2천 마리에 인부 1명이 일하면 되는, 그런 곳이다. 사육하는 가축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며,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목숨을 걸고 맹수와 싸우던 그런 목동이 아니라, 2천 마리를 기업화된 시스템에 의해 기계적으로 사육하는 기업가가 있는 곳이다. 소를 팔아서 학비를 대었다는 부모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사람들이 아니라, 거대기업이 사육한 고기를 먹으며 성장한 사람들의 사회, 사육현장과 삶의 현장이 분리된 기업축산시스템이 바로 구제역 학살을 무덤덤하게 실행하는 세계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런 기업축산시스템 덕분에 ‘육식’은 가장 저렴한 섭생의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육식은 우리의 식사 매뉴 가운데 가장 많이 개발된 음식종류를 가지고 있다. 해서 우리의 일상에는 이러한 기업화된 축산시스템에 맞추어진 육식문화가 스며 있다. 소농이 몇 마리 가축을 키우며 살아가던 사회의 음식문화가 아닌, 기업적 축산업에 맞춘 음식문화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해서 축산시스템의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대부분의 채식주의는 중산층적 웰빙 취향의 고상함을 벗어날 수 없다.  

    한데 아직 이런 기업농이 덜 발달한 한국에서 엄청난 구제역 살상이 있었고, 축산업의 3/5이 몰락했다. 그리고 가장 친근했던 음식인 육식 시스템이 심각하게 교란되었다. 하지만 그 재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사야 예언자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도 아직 끝나지 않은 재앙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아직 유보된 재앙의 복원을 빠르게 앞당기고 싶어 한다. 저렴한 고기를 먹고 그 맛을 향유하고 싶어 한다. 한데 기업화되지 않은 중소규모 축산업자들의 상당수는 회복할 수 없는 재산상의 손실을 입었고 커다란 심리적 상처를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들에 의한 빠른 회복은 요원한 일이다. 결국 기업화된 축산업의 도입만이 가능한 대안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재앙의 원천이 될 것이다.  

    소축산업자들의 몰락, 그리고 기업화된 축산업의 등장, 나아가 기업화된 전지구적 축산업 체계에의 완전한 종속. 이러한 사육과 섭생의 지구자본주의적 시스템에 종속되면, 운동부족과 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면역력이 약화된 동물들에게 부작용이 강한 약제를 마구잡이로 쓰게 되며, 그럼에도 변형된 새로운 질병에 감염되어 무수한 살생이 반복되는, 2011년 같은 사태가 거듭 재현될 것이다. 그런 가축이 우리의 육식문화에 자리잡는 것도 문제지만, 더욱 우려되는 것은 소나 돼지의 질병이 인체에도 중대한 위해를 가하는 사태가 이미 도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 상생하라고 위임한 소명을 간과한 결과는 동물들에게 재앙을 가져다주었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재앙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재앙 이후를 ‘우유와 꿀’을 먹는 삶으로 표현하였다. 말했듯이 그것은 ‘풍족한 가난’의 은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값비싼 고기를 기꺼이 먹고 조금 천천히, 조금 절약하며 먹는 섭생의 태도, 그것이 바로 재앙 이후를 현명하게 맞는 ‘풍족한 가난’을 향유하는 지혜일 것이다. ‘일상의 임마누엘’은 아마도 여기에서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일상을 넘어, 그러한 지혜를 우리사회가 공유하고 전지구 시민이 공유하여, 동물과 식물과 돌과 나무와 새, ......, 모든 하느님의 피조물과 공존하고 서로에게 축복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지구적 임마누엘’의 실현을 향해 가야 할 것이다.    


그 날에는, 비록 한 농부가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밖에 기르지 못해도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11,6~9)

 

ⓒ 웹진 <제3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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