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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전쟁 난민들에 대한 짧은 생각 (배근주)

시평

by 제3시대 2015. 11. 2.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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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난민들에 대한 짧은 생각


 

배근주
(Denison University 종교 윤리 교수, 성공회 사제)


 

          유엔 난민 기구(UNHCR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s for Refugee])의 통계에 의하면, 2014년 한 해 동안 전세계적으로 오천 오백만명의 난민들이 발생했다. 이들 중 대부분이 오랜 내전과 기근으로 고통받고 있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출신들이다. 대한민국 인구수와 맞먹는 오천 오백만이란 숫자는 국제 난민들의 규모와 다양성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실제로 유엔 난민 기구는 2015년 현재 약 7천만명의 사람들이 무력 충돌과 환경 재앙으로 난민이 될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각주:1] 
          내전으로 인하여 대규모의 시리아 난민들과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 콩고, 소말리아 출신의 난민들이 목숨을 걸고 유럽으로 탈출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지금, 우리는 난민들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국제 난민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일까? 교회는 난민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난민 인권 문제, 특히 전쟁 난민은 국경, 국적, 국가 간 이익 문제 뿐만 아니라, 종교와 인종 문제, 성차별 문제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회 구조적 문제와 맞물려 있다. 특히 “인종”이란 관점에서, 난민 문제를 살펴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1990년대에 옛 유고 연방이 내전에 휩싸였을 때, 국제 정치 무대에서 리더쉽을 보여주려한 클린턴 행정부는 십육만구천여 명의 옛 유고 연방 출신의 난민들을 받아들였고, 이들 중 대부분이 내전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였던 보스니아 무슬림들이였다. 현재의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난민을 대하는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태도와 비교해 볼 때, 유럽에 거주하던 보스니아 난민들은 상대적으로 신속하게 서방 국가에 이주하였다.
          미국에 정착한 가장 큰 난민 그룹은 옛 소련 연방 출신들로, 이들 중 상당수가 유대인들이다. 현재 미국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약 칠십만명인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들 중 30%가 옛 소련 연방이 붕괴되기 전에 미국에 정착한 난민들이고, 나머지 70%는 그 후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 난민들의 수는 이스라엘에 정착한 유대인들의 수 보다 많다.
         보트 피플 (boat people)로 알려진 베트남 난민들은 국제 사회에서 난민들의 대표 얼굴이 유색인종으로 바뀐 사건이다. 1975년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이 북베트남에 함락되고, 미군이 철수하면서 남베트남 정부나 미군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던 약 14만 명 정도의 베트남 사람들이 미국이나 유럽 국가로 떠났다. 그러나 1978년 호치민 정부의 과거 청산 정책이 가속화 되면서, 화교 출신 등을 비롯한 소수 민족들, 남베트남 정부에 가담했던 사람들 등등이 핍박을 피해 베트남을 떠나기 시작했고, 주변 공산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 사람들도 난민 행렬에 가담했다. 1975년과 1995년 사이 약 이백만명의 사람들이 베트남을 떠난 것으로 보고 되고 있으며, 이들 중 약 팔십만명이 해로를 통해 베트남을 탈출하여 안전하게 다른 나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집계조차 되지 않는 수의 사람들이 항해 도중 태풍을 만나거나, 조악한 배가 파도에 뒤집히거나, 해적떼에게 약탈을 당하여 목숨을 잃었다.
          틱낫한 스님과 함께 보트 피플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촉구한 찬공 스님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의 즉각적 종료를 원했다. 전쟁은 모든 베트남 사람들에게 치유할 수 없을 것 같은 깊은 상처를 남겼고, 이 상처는 보트 피플로까지 이어졌다… 인도네시아, 홍콩,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같은 베트남 주변국들은 보트 피플의 상륙을 허락하지 않아서, 난민들이 탄 배는 공해상에 머물러야 했다. 공해는 위험한 공간이다. 해적떼들과 높은 파도 때문에, 지치고, 양식도 부족하고, 병약한 난민들은 목숨을 걸고 베트남을 떠났지만, 살 수 있는 희망이 너무 적었다….호주는 유색인종의 이민을 허락하지 않아서, 미국은 비자를 내주지 않아서, 유럽은 지리적으로 너무 멀어서, 주변국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모두 난민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베트남 주변국들은 유럽과 미국 국가들이 나서서 난민 문제 해결을 약속하고, 유엔이 제한된 지역에 난민촌을 만들어 주고 나서야, 보트 피플의 일시적 상륙을 허락했다. 호주는 이민법을 바꾸어 유색인종의 이민을 허락하면서, 베트남 난민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열었고, 미국과 캐나다, 북유럽 국가들도 좀 더 적극적으로 베트남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무력 분쟁 지역을 탈출하여 국외로 간 모든 사람들이 난민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 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들이 엄격한 심사를 거쳐 난민 지위를 부여하고, 이주 자격을 허락한다. 이 심사 기간 동안 난민들은 난민 캠프나, 임시 수용소와 억류소 (detention center)에 머물러야 하며, 이 기간이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이 될 수도 있다. 영국과 같은 나라는 심사 기간 동안 난민들의 경제 활동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난민들은 영국에 이주하는 것이 쉽지 않다. 호주는 지금도 해로를 통해 도착한 난민들을 심사 기간 동안 구금 센터에 머물게 하는데, 여기에 머무는 기간 동안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난민들이 난민 심사에 떨어지거나, 심사 기간이 길어져, 더 안전한 곳, 경제 활동이 가능한 곳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난다.
         지난 여름 터키 해안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세살 짜리 시리아 난민 아이, 알랜 쿠르디 (Alan Kurdi)의 사진 한 장은 시리아 난민의 인권 문제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유럽 국가들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유럽 난민을 이야기하며, 시리아 난민에 대한 자국민들의 감정이입을 호소했다. 자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난민 쿼터를 늘리고, 난민 인권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 동안, 미국은 올해 일만명의 시리아 난민들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더 나아가 미국은 2017년까지 삼만명의 난민들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는데, 몇 명의 시리아 난민들이 여기에 속할지는 미지수이다.
      그동안 한국 언론들 뿐만 아니라 서방 언론들은 시리아 난민 발생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책임을 져야할 러시아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정부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이라크 전쟁 발발 후, 미국의 대이라크 정책이 실패를 거듭하면서, 중동 지역에 정세불안을 가져왔고, 군사화된 이 지역을 더 군사화시켰다. IS와 같은 극이슬람 주의와 군사화가 결합한 반군조직 (para-military)은 이라크 전쟁을 통해 세력을 키우고, 러시아 무기를 수입하여 세를 불려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와 미국은 현재 IS에 대해 대대적인 공습을 가하고 있는데, 이 공습으로 인해, 난민들이 더 발생하고 있다.
          기독교의 사랑이란 관점에서 보면,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난민들을 받아 들이고, 난민 문제 해결에 앞장 서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 모습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랑, 또는 국제 정세에 대한 철저한 분석 없이 이루어지는 사랑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또한 난민들, 특히 시리아 난민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내 이웃으로 보기 위해서는 기독교 안에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
          우선 광범위하게 무비판적으로 사용되는 ‘난민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유엔과 유럽 정부들, 그리고 언론들은 ‘난민 문제’에 대한 ‘짐 (burden)’을 전 세계가 함께 져야 한다는 취지의 발표를 종종 한다. 이러한 관점은 ‘난민’을 만들어 낸 전쟁, 미국과 러시아의 군수업자들, 독재 정부 등이 문제의 근원이란 사실을 잊게 만든다. 즉, 난민들이 문제가 아니라, 난민들이 발생하도록 만든 국제 정치 구조와 전쟁이 세계 시민들이 짊어져야 할 ‘짐’인 것이다.
          또한 난민들의 이주 비용에 유럽과 북미국가들이 막대한 사회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최근 워싱턴 포스트지의 보도에 의하면, 난민들의 장기 이주와 이민이 오히려 이주 국가의 경제에 도움을 주거나, 최소한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고 한다. 난민들의 이주가 마치 자국민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것도, 이 보도에 의하면 오해에 불과하다고 한다. 언어와 문화 장벽 때문에 난민들이 당장 전문직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상당수가 소위 3D 업종으로 불리는 분야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로 인해 오히려 이 업종의 임금이 올라가고, 지역 경제가 살아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난민들을 받아들인 덴마크의 여러 지역들은, 지역 노동자들의 임금이 난민 노동자들의 유입으로 상승하는 효과를 얻었다. 난민들을 억류하거나 심사를 엄격하게 하는 국가가 난민 관리 비용으로 더 많은 돈을 사용하여, 국가 예산에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각주:2]

          조금만 더 깊이 살펴 보면, 난민들이 부유한 국가들의 사회 보장제도에 무임승차한다는 생각은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생사를 넘나들며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고 여러 국경 지대를 통과하며, 비인간적인 대우를 참아온 난민들이, 이주 국가에서 사회 보장 제도나 바라는 사람들로 머물거란 생각은, 이들의 생존능력을 무시하는 편견이다. 더구나 난민들도 서구 국가들이 낙원이 아니란 사실도 잘 알고 있고, 본국의 분쟁이 끝나면 또한 많은 수가 고향으로 돌아간다. 세계화된 인종 차별 주의와 이슬람 혐오주의가 맞물려,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의 난민들이 환영받지 못 하는 시대에, 국제 사회의 도덕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각 국 정부들이 꺼내드는 카드가, ‘자국민을 위한 일자리 보호, 사회 안정 유지, 국가 예산 문제’ 등이다. 더구나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정치인들이 난민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들의 실책을 감추거나, 자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또는 난민 문제를 감춰서, 자신들의 전쟁 개입을 은폐하려고도 한다. 이러한 이유들이 난민 발생 문제에 더 관심을 가지고, 세계 정치를 분석해야 할 책임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하느님 나라는 국경이 없지만, 인간이 만든 나라들은 국경이 있고, 이 국경을 지키는 군대와, 국경을 다스리는 정부가 존재한다. 우리는 인터넷의 발달과 해외 여행의 자유화로 마치 우리와 타인을 구별짓는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러나 인터넷과 무역품들이 여러 나라의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들 때, 각 국 정부는 오히려 국경 수비를 강화하고 통제하면서,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사람들’과 ‘국경을 넘을 수 없는 사람들’로 세계 시민들을 구분하였다. 시리아 난민들과 같은 대다수의 난민들이 종교와 인종, 출신국 때문에 ‘국경을 넘을 수 없는 사람들’로 분류되고 있다. 난민 문제가 세계화되고, 전쟁이 세계화된 시대에 우리는 ‘국경’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국가 안보의 중심이 국경이 되고, 국경을 지키기 위한 전쟁, 마치 국경이 없으면 국민의 안전도 보호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인간이 중심이 되는 안보 (human security)로 생각을 전환하고 실천해야 할 때다. 마치 하느님의 나라가 국경으로 이루어지고 지배되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만들어져 지속되는 것처럼 말이다.
          국제 난민 인권 문제에 올바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기독교가 극복해야할 가장 큰 문제가 ‘이슬람 혐오주의’이다. 이슬람 혐오주의는 십자군 전쟁과 오스만 트루쿠 제국, 이슬람 제국들과 국경 분쟁 등의 역사적 경험때문에 서구 사회에 항상 존재해 왔지만, 이제 이 혐오주의는 유럽과 북미를 넘어, 기독교 세력이 강한 한국에서도 확산되는 추세이다. 하지만 이슬람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알지 못 하는 것에 대해 집단적으로 혐오하고, 그 혐오에 편견을 더 하고, 모든 이슬람 교도들을 테러리스트로, 여성혐오주의자로 몰아가는 것은 기독교 사랑의 정신과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
          퀴어 문화 축제가 준비되던 지난 여름,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영국의 ‘나라를 걱정하는 기독교인들 Christian Concern for Our Nation’의 대표인 안드레아 윌리암스 (Andrea Williams)가 한국에 전하는 메세지라는 동영상이 공유되었다. 윌리암스의 메세지는 간단했다. 한국이 차별 금지법을 받아들이는 순간 동성애자들과 이슬람교도들이 거리에 넘쳐나서, 한국도 영국처럼 기독교인들에게 지옥이 될 거라는 경고였다. 동성애와 이슬람이 하느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두 가지로 표현하는 것도 비논리적이지만, 이슬람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지옥에 살게 될 거란 것도, 역사적 근거가 없는 주장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이슬람 문화권 안에 기독교 교회는 오랫동안 존재해 왔고, 기독교의 이슬람 박해와 이슬람 혐오주의가 팽배해 지기 전에는 두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해 왔다. 오히려 윌리암스의 주장을 뒤집어 보면, 기독교 세력이 강한 곳이 무슬림들에겐 지옥이다. 기독교와 같이 제도화된 종교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잘 해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 만든 것이고, 항상 만들어져 가는 것인데, 오히려 인간들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 제도의 노예가 되어서, 사랑이 아닌 증오를 전파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스리랑카의 알로이시우스 피에리스 (Aloysius Pieris) 신부는, 진정한 개종은 기독교라는 종교로의 개종이 아니라, 모든 부조리한 억압으로 부터의 ‘해방 (liberation)’으로 개종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An Asian Theology of Liberation, 1988) 이슬람이 가르치는 정의와 평화에 대한 내용은 다음 칼럼에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슬람과 기독교 두 종교 모두,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집단들에 의해, 테러리스트의 종교도 될 수 있고, 서로에게 위협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싶다.
          지금은 종교와 폭력이란 주제에 대해 필독서 중 하나가 된 “Exclusion and Embrace”에서, 옛 유고 연방의 크로아티아 출신의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 (Miroslav Volf)는, 현대 사회에서 죄악이란 타인을 배척 (exclusion)함으로써, 현실을 뒤틀어서 바라보고, 이렇게 뒤틀려진 현실 속에 살면서, 공포심을 가진 채, 타인을 향해 증오와 폭력으로 반응하는 것이라고 했다. 볼프에 의하면 구원은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 타인과 평화로운 공존을 통해서 오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타인에게 열어 보이는 어려운 길을 걸으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시고, 열어 보이신 것처럼 타인도 똑같이 사랑하시고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행위를 통해서도 온다. (Exclusion and Embrace: A Theological Exploration of Identity, Otherness, and Reconciliation, 1996) 볼프의 구원이란 관점에서 보면, 난민과 우리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우리가 난민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난민들을 끌어 안으면서 우리가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독교인들 모두는 이 세상의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여행자들이 아니라, 국경을 열어달라고 문을 두드리는 ‘난민들’이란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나가려고 하고 있고,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 나라를 그리워 하고, 이 땅에 주인이 아니지만 어떻게든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난민들 말이다. 우리가 난민들이란 사실을 망각한 채, 국경을 폐쇄하고, 지구의 주인처럼 살면서, 종교적으로 인종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난민이라 부르고, 우리 땅에 발을 딛지 못 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고유한 신분을 져버리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나는 한국 교회가 난민 인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종교적 인종적 타자들을 끌어 안으면서, 스스로 사회에서 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처럼, 스스로 타자가 되어, 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기독교인들에게 열린 구원의 길이다. 


<에필로그>
          인천 국제 공항에 가면, 난민들을 위한 임시 수용소 (detention center)가 있다. 주로 아프리카와 중앙 아시아에서 어려움 끝에 한국에 도착한 사람들이, 한국 정부에 망명 신청을 하고, 난민 자격을 얻을 때까지 기다리는 곳이다. 한국의 난민 심사는 절망스러울 정도로 까다롭고 기간도 길며, 이 임시 수용소는 침구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감옥같은 곳이다. 그나마 난민 자격을 얻지 못 하면,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국으로 쫓겨 나거나, 다시 지루한 법정 싸움을 이어 나가야 한다. 기독교 교회는 오랜 동안 난민들을 보호하고, 정착하는데 도움을 준 전통이 있다. 미국의 많은 교회와 교단들이 미국 정부에게 시리아 난민들을 더 받으라고 압력을 넣고 있고, 자신들의 공간을 난민들에게 제공하겠다고 서원했다. 한국 교회가 이들 교회 운동에 동참하여, 난민 인권 문제에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한국 국경 안에 들어와 있는 난민들의 이주에 적극적 관심을 표현했으면 좋겠다. 사회적 관심이 일어나면, 한국 정부도 쉽게 난민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전쟁 동안, 우리도 수많은 난민들이였음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베트남 난민들을 바다로 내보낸 책임이 있음을, 중동지역 전쟁에 우리도 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 웹진 <제3시대>

  1. http://www.unhcr.org/5575a78416.html [본문으로]
  2. (Anna Swanson, “The Big Myth about Refugees: Refugees Can Be an Investment Rather Than a Burden, https://www.washingtonpost.com/news/wonkblog/wp/2015/09/10/the-big-myth-about-refugees/?postshare=207144581581941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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