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신학정보 : 사회신학(社會神學) 탐구 1] 사회에 관한 신학적 탐구를 시작하며 (정용택)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5. 11. 16. 15:16

본문

[사회신학(社會神學) 탐구 1]



사회에 관한 신학적 탐구를 시작하며




 

정용택

(본 연구소 상임연구원)



사회라는 이름의 새로운 신의 출현


    일찍이 고전 사회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에밀 뒤르케임(Émile Durkheim, 1858~1917)은 사회(社會, society)가 곧 신(神, God)이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사회는 종교를 통해 개인들에게 존경심을 부여하고 그들에게 경배의 대상으로 군림하는 힘이다. 따라서 그동안 종교가 말해온 신은 단지 사회의 현실적 표현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각주:1] 요컨대, 종교는 사회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상징체계로서, 궁극적으로는 사회야말로 종교 속에서 경배의 대상이 되는 종교의 본질적 실체, 즉 신 그 자체라는 것이다. 사회를 신으로 재규정하고 있는 이런 주장에 대해 신학은 과연 어떤 답변을 내놓을 수 있을까? 그전에, 뒤르케임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에 이르게 되었을까? 뒤르케임이 사회를 총체성의 실재로 진술하고 있는 대목을 직접 읽어보면 보다 명확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개념의 총체적 체계에 의해 표현되는 세계는 사회가 스스로에게 그것을 재현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오직 사회만이 우리에게 가장 일반적인 관념들을 제공해줄 수 있으며, 그 관념들에 따라서 세계는 이해되어야만 한다. 모든 개별적 주체들을 그 안에 포괄하는 오직 하나의 주체만이 그러한 대상을 포용할 수 있다. 우주는 사유된 한에서만 존재하고, 또한 우주는 사회에 의해서만 그것의 총체성(totality)이 사유될 수 있기 때문에, 우주는 사회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즉, 우주는 사회의 내적 삶의 한 요소가 된다. 따라서 사회는 다른 어떤 것도 그것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없는 총체적 유(genus) 그 자체이다. 총체성이라는 개념도 사회라는 개념의 추상적 형식일 뿐이다. 사회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전체이며, 다른 모든 부류들을 그 안에 담고 있는 최상의 부류인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인간과 동일하게 위치를 부여받고 분류되어지는 기초적인 분류법들이 근거하고 있는 궁극적인 원칙이다.[각주:2] 


    마치 체계이론가인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이 훗날 사회를 가리켜 “다른 사회적 체계들 모두를 자기 안에 포함하는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각주:3]라고 규정했던 것을 예고하고 있는 듯한 위의 인용 단락에서 우리는 ‘사회’라는 단어를 ‘신’으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모든 개인 주체들을 포괄하는 주체로서, 그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총체적인 유(類)가 무엇이냐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묻는다면 당연히 그런 존재는 ‘하느님’이라고 답하지 않겠는가? 위치와 분류에 있어서 최상의 범주에 속하면서 동시에 자신 외에는 그 어떠한 외부적 발생 요인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완벽한 자기 충족적 체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왔던 하느님 그분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뒤르케임은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 그리스도교적 신의 관념이 누려왔던 지위, 즉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전체이자 다른 모든 부류들을 그 아래 포섭하고 있는 최상의 부류로서의 존재론적·인식론적 지위는 근대 이후의 세계에서 이제 사회에게로 마땅히 돌려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총체성의 성격과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존재는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사회라는 것이다. 신을 변형된 사회로서 기술하는 것은 신성의 전통적 특질, 즉 신적인 총체성을 사회에게 귀속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각주:4] 그렇기에 뒤르케임적인 의미의 사회가 담지하고 있는 ‘신성한 것’(the sacred)은 하나의 사회적 사실(social fact)이나 ‘사회적인 것’(the social)에 관한 하나의 현시(顯示, manifestation)를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사회의 신성함은 사회적 사실 및 사회적인 것의 현상을 넘어 사회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상징적·도덕적 질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기술된다.[각주:5] 인용한 단락의 말미에 덧붙인 주석에서 뒤르케임은 이렇게까지 말한다. “결국 총체성(totality), 사회(society), 그리고 신성(divinity)의 개념은 사실상 동일한 관념의 단지 다른 측면들일 뿐이다.”[각주:6] 여기서 우리는 뒤르케임이 독일 관념론에서부터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거대서사를 이해하는 궁극적 범주로 표현되어온 총체성의 개념을 매개로 하여 신과 사회를 인식론적으로나 존재적으로 완벽하게 동일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각주:7]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뒤르케임은 사회라 불리는 대상이 “우리의 주관적 의지나 인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차원의 발현적 속성”, 즉 ‘외재성’을 갖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개별 행위를 제약하는 규범적 차원”, 즉 ‘강제성’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각주:8] 물론 그는 사회가 인간의 행위와 전적으로 무관하게 존재할 수는 없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개인들의 차원에서 볼 때 사회는 그들의 외부에서, 규범적 제약을 가할 정도의 강제성과 도덕적 권위의 정당성을 지니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고유한’(sui generis) 실재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뒤르케임은 사회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데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뒤르케임의 사회학이 “사회적인 것의 상상계의 중요한 요소들이 ʻ신학적ʼ 기원을 갖는다는 사실을 가장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것은 “근대적 사회신학의 정점”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뒤르케임의 저작들에서 ‘사회적인 것’은 곧 ‘신적인 것’으로서 “개인의식을 초월하여 창발하는 집합 의식, 집합 열광, 연대, 도덕 등의 ʻ사회적인 것ʼ은 그 자체로 섭리에 의해 조절되는 사회학의 보이지 않는 신”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9]


   이렇듯 과거 신이 누렸던 총체성의 지위가 이제 사회에게 귀속되어야 한다는,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신성한 실재는 사회라 불리는 바로 그것이라고 하는 뒤르케임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사회는 사회학의 탐구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학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사회가 곧 오늘날 가장 생생하게 현존하는 신성의 구현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학이 하느님의 존재를 연구하던 그 방식 그대로 사회를 연구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당연히 사회학이 사회를 말하는 방식을 신학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을 수도 없다. 가능하다면 사회학과 전통적인 신학 모두를 넘어, 전혀 새로운 신학의 방법과 논리를 통해 신으로서의 사회, 또는 사회로서의 신이라는 이 문제적 대상을 탐구해야 할 것인데, ‘사회신학’(socio-theology or theology of society)[각주:10]이란 비교적 생소한 타이틀을 내건 이 연재는 바로 그러한 사유의 모험을 시작해보려는 기획이다.


    하지만 사회가 도대체 무엇이고, 사회가 가지고 있는 신성이나 신적 본질은 또 무엇인지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방향으로 섣불리 나아갈 생각은 없다. 사회와 신을 개념적으로 세세하게 비교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너무나 방대한 과제일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고전적인 신존재 논증과 유사한 형이상학적 사변의 길로 빠져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신학과 사회학의 대화를 모색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굳이 형이상학적 사변의 길로 가지 않더라도, 신학이 사회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우리 앞에 이미 펼쳐져 있다. 다시 말해, 신학이 뒤르케임의 길을 좇아서, 곧바로 신의 자리에 사회를 대신 갖다 놓지 않더라도, 사회라는 것이 신학적 탐구의 대상임을 확인시켜주는 다른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어떤 길인가? 바로 ‘고통’이라는 이름의 길이다. ‘고통’의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거기에서 신의 존재를 사유하고자 할 때, 신학은 사회라는 대상과 필연적으로 재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적 고통 : 고통의 사회적 (재)생산 이론


    고통의 문제는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정초하고 끊임없이 활성화해온 핵심적인 모티프였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으로 육화된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고통스럽게’ 죽었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시작된 종교이다. 죄와 사망의 굴레 속에서 고통당하는 인간을 구원하고자 그 모든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학 안에서 인간의 고통과 신적인 진리 사이의 연관성을 강화했고, 나아가 인간 육체의 생리학적이고 종교적인 잠재력에 대한 관심을 증진시켜왔다. 고통에 관한 성서의 대표적 텍스트인 『욥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이미 2세기부터 그리스도교는 고통 속에 있는 육체로서 인간의 자아를 이해하는 관점을 발전시켜 왔는데, 가령 어떻게 신자들이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대대적인 박해 속에서도 고통을 견뎌내고, 그 고통을 신앙 공동체 안에서 치유할 뿐만 아니라, 고통을 통해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차원의 구원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를 변증하고자 했던 것이다.[각주:11] 그런 의미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실존적인 물음”은 철학자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가 최초로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제시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유대-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던 원초적 수준의 ‘신정론적 질문’으로 이해될 수 있다.[각주:12]


    문제는 고통과 진리의 강한 결속을 통해 획득되던 고통에 관한 실존적 의미를 그리스도교적 경험과 실천이 더 이상 안정적으로 지켜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고통과 진리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릴 만큼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신앙적 의미의 세계 안으로 손쉽게 통합시킬 수조차 없는 그런 재난, 비참, 불행, 폭력 등을 일상적·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면서 하느님의 존재의 정당성은 물론이고 그에 관한 진술 자체의 유효성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각주:13] 인간사에서 개별적으로 반복되어온 불행과 비참이 구조적·집단적 수준으로 가해지는 재난과 고통으로 발전했을 때 전통적인 신정론의 논리, 즉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이 계획하신 구원사의 거대한 목적 속에서 이루어진 그의 섭리의 결과물이라는 주장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을 계속 지키고자 한다면, 고통에 대한 책임을 결국 하느님에게 귀속시켜야만 하는데, 이럴 경우 주권자로서의 하느님 신앙은 유지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하느님을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으로 찬양하기는 어려워진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고자 사회적 재난이나 집단적 불행을 당사자들이 저지른(물론 그것이 무엇인지는 하느님만이 알 수 있는) 어떤 숨겨진 범죄에 대한 신적인 심판 내지는 모종의 도덕적 교훈을 주기 위한 훈련의 일환이라는 주장이 끈질기게 제기되고 있지만, 그런 주장들은 반박의 가치조차 없는 비도덕적이고 비합리적인 종교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삶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대다수의 결정적인 고통들은 사회적인 폭력, 즉 국가와 시장으로 대표되는 정치적·경제적·제도적 권력이 인간에게 미치는 강한 구속과 압력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이러한 권력들이 대응하는 방식에서 또 다른 2차적 고통이 야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인간의 고통은 특별히 불운한 개인들에게 벌어진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빚어지는 ‘사회적’ 고통 및 구조적 폭력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고통이 체험되고 표현되는 방식을 구축하고 조절하는 모든 맥락에 구조적 조건과 문화적 관행이 결부되어 있다는 것, 따라서 고통이 명백히 사회적 (재)생산의 산물로 이해되는 현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 고통’(social suffering) 이론이다. 그동안 고통당하는 인간의 현실을 통해 삶의 실존적 의미와 신적 진리의 문제를 사유해온 그리스도교 신학은 이와 같은 고통의 사회적 (재)생산의 문제와 마주함으로써 ‘사회’라는 대상에 관한 사회신학적 탐구를 더 이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신학이 그러한 상황에서도 아무 설득력 없는 전통적인 신정론의 답변을 되풀이하고 있을 때, 사회학과 사회철학, 인류학과 심리학 등의 분과에서는 고통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생산되는 동시에 비가시화되며, 그러한 고통이 행위자들의 자기 정체성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나아가 사회적 고통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설명하고 사회의 변혁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갖는 실천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심도있게 논의해 왔다. 특히 주목할 지점은 고통에 관한 사회과학적 접근이 신정론적 문제의식을 재발굴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사회과학자들이 전통적인 의미의 신학적 신정론을 그대로 차용하는 것은 아닌데,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전통적인 신정론과 구별하여 ‘세속적 신정론’(secular theodicy) 또는 ‘사회정론’(sociodicy)이라 명명하며, 이를 사회비판을 위한 윤리적·정치적 모티프로 활용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전통적 신정론이 전능하고 자비로운 신에 대한 신앙과 현실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악의 문제를 최대한 논리적으로 조화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면, 세속적·사회학적 신정론은 사회적 삶에 관한 규범적 기대와 현실 사회에서의 구조적 부정의나 소외, 착취, 불평등, 빈곤, 배제, 차별, 무시 등에 이르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고통을 종합하려는 목표를 드러내왔다. 그러나 사회적 고통의 원인과 의미를 설명하는 방식에 따라서 사회정론의 문제의식을 활용하는 양상도 차이를 보이기 마련인데, 이는 전통적인 신정론의 붕괴 이후 현대신학에서 신정론이 여러 다양한 형태로 수정 제시되는 것과도 흥미로운 평행을 이룬다.[각주:14] 


    하여 다음 호의 연재에서는 사회신학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서 사회적 고통의 문제와 사회정론의 문제의식을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서구 학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적 고통 이론의 전반적인 지형과 사회정론적 문제의식의 다양한 활용들을 2000년대 이후 민중신학의 사회적 고통 연구와 비교하면서 서로 간의 이론적 접점 및 쟁점이 무엇인지를 짚어보게 될 것이다.


ⓒ 웹진 <제3시대>

  1. Émil Durkheim, Suicide: A Study in Sociology, translated by John A. Spaulding and George Simpson,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2, p.277. [본문으로]
  2. Émil Durkheim, The Elementary Forms of the Religious Life, translated by Karen E. Fields, New York: The Free Press, 1995, pp.442~443. [본문으로]
  3. 니클라스 루만, 『사회의 사회』, 장춘익 옮김, 새물결, 2014, 101~102쪽. [본문으로]
  4. David Frisby And Derek Sayer, Society(Key ideas), New York: Tavistock Publications, 1986, p.35. [본문으로]
  5. Chris Shilling and Philip A. Mellor, The Sociological Ambition: Elementary Forms of Social and Moral Life, London: SAGE Publications, 2001, p.41. [본문으로]
  6. Durkheim, op.cit., p.443. n.18. [본문으로]
  7. 이 세 가지의 개념적 범주가 뒤르케임의 철학에서 서로 어떻게 연관성을 맺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Donald A. Nielsen, Three Faces of God: Society, Religion, and the Categories of Totality in the Philosophy of Émile Durkheim, New York: SUNY Press, 1998을 참조. [본문으로]
  8. 김명희, 「마르크스와 뒤르케임의 사회과학방법론 연구」, 성공회대 박사학위 논문, 2014, 241~242쪽 참조. [본문으로]
  9. 김홍중, 「사회로 변신한 신과 행위자의 가면을 쓴 메시아의 전투」, 『한국사회학』 제47집 제5호(2013년), 21쪽. 물론 필자는 뒤르케임의 ‘사회신학’과 아렌트의 메시아주의적인 ‘행위신학’을 사회 대 인간, 또는 구조 대 행위의 이분법적 틀 안에서 대립시키는 저자의 논제에 동의하진 않는다. 뒤르케임의 사회신학에서 ‘사회’ 개념이 인간 및 인간의 행위 없이도 계속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초월적 ‘신’으로 그려지고 있다고 보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뒤르케임의 사회는 인간 행위주체에 의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결과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사회-신’론은 관계론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르케임에게 사회가 인간 행위주체를 제약하고 조건짓는 신적인 위상을 갖고 있다는 지적에는 확실히 동의한다. 마르크스주의 및 비판적 실재론 전통에서 확립된 관계론적 사회 이해에 관해서는 추후에 사회 구조의 문제를 다룰 때 본격적으로 소개될 것이다. [본문으로]
  10. 사회 및 사회성에 관한 신학적 탐구의 사례로는 다음의 연구들을 참조할 수 있다. Andrew Wernick, “From Comte to Baudrillard Socio-Theology After the End of the Social,” Theory, Culture & Society, Vol.17(6), 2000, pp.55~75; John Milbank, Theology and Social Theory, Oxford: Blackwell, 2006; Rebekka A. Klein, Sociality as the Human Condition: Anthropology in Economic, Philosophical and Theological Perspective, translated by Martina Sitling, Boston: Brill, 2011. [본문으로]
  11. 고통의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수용의 역사적 맥락과 현대적 함의에 관해서는 Chris Shilling and Philip A. Mellor, “Saved from pain or saved through pain? Modernity, instrumentalization and the religious use of pain as a body technique,” European Journal of Social Theory, Vol.13(4), 2000, pp.527~530 참조. [본문으로]
  12. 조순, 「신정론에 관한 소고」, 『신학연구』 제47집(2005), 211쪽. [본문으로]
  13. Slavoj Žižek and Boris Gunjevic, God in Pain: Inversions of Apocalypse, New York: Seven Stories Press, 2012, pp.155~156 참조. [본문으로]
  14. 오늘날 가장 급진화된 형태의 신정론과 사회정론을 비교하는 작업은 이후에 신학에서의 ‘신의 죽음’ 논의와 사회학에서의 ‘사회의 종언’ 논의를 함께 살펴볼 때 보다 자세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본문으로]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