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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정보] 남한의 사회적 분열과 “비시민”의 출현에 대한 고찰 (1) (황용연)

신학비평

by 제3시대 2015. 12. 8.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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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사회적 분열과 "비시민"의 출현에 대한 고찰(1)


- 민중신학과 탈식민주의의 결합을 통하여




 황용연

(Graduate Theological Union 박사과정,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객원연구원)



    1. 서론



    왼쪽의 만화는 2012년 12월 10일, 그러니까 제 18대 대통령 선거 기간에 경향신문에 실린 시사만평이다. 이 만평은 현재 남한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분열 과정과 그 분열로 인해 현실에서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고도 심도 깊게 보여준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논리는 남한의 사회적 분열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양쪽 진영, 즉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서로 상대방과의 분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기제이다. 말하자면, 이승만, 박정희로 대표되는 보수정권을 지지하고 경제성장에 우선적 가치를 두는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산업화”의 논리가, 김대중,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민주정부를 지지하고 민주주의에 우선적 가치를 두는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민주화”의 논리가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이 두 가지 정당화 명분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 성공의 기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자들이건 자유주의자들이건, 예를 들어 현재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불안정한 일자리와 청년실업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내놓지 못하고 있으며, 계속되는 양쪽 진영 사이의 갈등이 젊은이들의 고통을 심화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진영 사람들은 오히려 젊은이들이 자신들 주장의 정당성을 이해하거나 지지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그들을 비난한다. 

   그렇다면, 남한의 보수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 사이의 이러한 분열 과정을 촉진시킨 사회적 합의의 붕괴는 어떻게 일어난 것인가? 한국 전쟁 이후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와 군사독재가 남한의 정치를 지배했고, 반공주의의 물결과 군사독재적 통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군사정부는 경제발전이라는 명분을 이용했는데, 그 과정에서 경제발전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한 것은 바로 민족주의다. 그리하여 1960년대 이후 경제발전 과정은 민족주의와 결합한 반공주의를 지지하는 사회적 합의를 창출해냈다. 

   그러나 1987년 이후의 민주화 과정은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흔들기 시작했고 1997년 외환 위기는 그것을 완전히 두 조각으로 붕괴시켰다. 그 결과, 외환 위기 이후 남한에는 더 이상 사회적 합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각자 자신들이 붙들고 있는 반 조각의 합의에 매몰되어 있다. 이를테면, 보수주의자들은 과거의 사회적 합의 중에서 반공주의라는 조각을,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은 민족주의라는 조각을 붙들고 있는데, 이는 현재 남한의 사회적 분열 상황을 대표한다. 이러한 사회적 분열의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다른 이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만한 가치나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자격 없는 사람들,” 혹은 정상적인 사회적 주체가 될만한 능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무능력자”로 간주되는 사회적 고통이다. 


    2. 한국 전쟁 이후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라는 사회적 합의의 형성과 붕괴 


     (1) 남한의 반공 민족주의의 형성

    한국의 민족주의는 일본의 식민지 침략에 대한 반응의 일환으로 형성되었지만, 일본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직후 한국이 두 나라로 분열되면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분단 이후 민족의 분열과 민족주의라는 모순을 해결하고, 일제 식민지 기간에 형성된 민족주의를 유지하기 위하여, 남한과 북한 정권은 모두 서로를 “민족/국가의 적”으로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정권이 민족/국가의 진정한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정권이 반제국주의 투쟁을 선언하면서, 자신들이 민족/국가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기 위해 이 투쟁을 이용하고 있는 반면,[각주:1] 남한 정권은 북한 정권이 소련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므로 민족/국가의 적이라고 라고 비난하면서,[각주:2]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자신들이 “유엔에 의해 승인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국가”[각주:3]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자기 정당화의 수단일 뿐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한반도의 분단은 더 고착화되고 심화되었다. 남한 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 북한 정권은 “동족상잔의 비극”의 원흉이고, 북한 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 미국이 한국전쟁의 원흉이고 남한 정권은 미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직후에 이승만은 일민주의(一民主義)가 남한과 장차 통일될 국가의 민족 이데올로기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각주:4] 일민주의의 요점은 반공 이데올로기, 갈등에 대한 증오, 분리될 수 없는 국가 정체성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각주:5] 신기욱에 따르면, 일민주의는 혈통민족주의에서 보여지는 파시스트적 경향이 반공주의와 결합된 형태이다.[각주:6] 토지개혁이 시행되고 정부가 행정권을 형성하기 시작했던 이 시기에, “한국 국민”이라는 정체성과 구분되는 “대한민국(남한)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각주:7]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의 물질적 기초는 박정희 정권 동안 더욱 강화되었다. 박정희는 국가를, 개개인을 위한 중재자가 따로 필요 없는 한국 국민의 자연적인 모임으로 이해했고,[각주:8] 이는 이승만의 일민주의 개념과도 공통점을 갖는다. 게다가 박정희 정권은 “조국 근대화”[각주:9]와 “민족중흥”[각주:10]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 슬로건들이 보여주듯이,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 정권보다 더 능동적으로 개발주의를 활용하였고,[각주:11] 한국 “국민”이 국가 생산성 향상이라는 목적을 위해 단결해야 하며 모든 국민(國民)은 생산적인 사고방식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했다.[각주:12]

     그러므로, 일민주의가 그러했듯이, 박정희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기반이 되었던[각주:13]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한국 국민들 사이의 갈등이나 분열을 증오했다.[각주:14] 한편, 박정희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한국적 독자성”을 강조했는데, 남한에 자율적인 시민사회의 형성이나 자본의 축적 등과 같은 근대화의 조건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구식 근대화와는 다른 독자적인 방식의 근대화를 주창하였다.[각주:15] “한국적 근대화”라는 이 개념은 박정희가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또 다른 이념적 기반이었다. 박정희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중 개발주의는 남한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주적으로 여기는 북한을 남한 정권이 다루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 정권이 북한에 대한 군사적 점령을 통한 북진통일을 내세운 반면, 박정희 정권은 한국전쟁과 같은 또 다른 미래의 전쟁 없이도 북한을 흡수하여 통일을 이룩한다는 흡수통일 논리를 내세웠다.[각주:16] 여기서 남한이 북한을 흡수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는 경제발전인데, 이 경제발전은 박정희가 제안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남한 국민들이 단결해야만 성취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각주:17]

     박정희 독재 정권 시기 동안, 남한은 급속한 근대화와 경제 발전을 경험하였다. 이렇게 빠른 경제 발전 과정에서 북한을 향한 남한 국민들의 증오는 일정 부분 그들의 능동적인 사고방식으로 변환되기도 했는데, 독재정권은 이러한 변환을 경제발전이라는 목적을 위해 이용하였다.[각주:18] 그리고 이러한 경제발전 과정의 결과로서 남한 국민들은 국가적 성취감을 얻기 시작했는데, 이 성취감은 그들의 개인적 성취감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박정희가 만들어낸 이러한 변화들이 현재까지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한 국민들은 박정희를 남한 근대화와 경제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지금까지도 남한 보수 진영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주된 기반으로 남아있다.


     (2) 남한 국가의 형성과 근대화에 미친 미국의 영향

     미국의 군사개입은 남한 정부가 수립되고 한국전쟁이라는 위기를 탈출하는 데에 결정적인 요인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많은 (보수적인) 한국인들은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혈맹’이라 부른다.

     박명림의 ‘미국의 범위’[각주:19]라는 개념은 1945년 이후 미국의 남한 개입을 설명하는 데에 유용한 개념이다. 박명림에 따르면, 남한에서의 ‘미국의 범위’는 공산주의 혁명의 방지와 파시즘의 방지 사이이며 구체적인 미국의 정책은 이 범위 내에서 시계추처럼 진동한다.[각주:20] 그리하여, 이 진자운동의 범위 내에서, 미국은 어떤 때는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독재자를 지원하기도 하였다.[각주:21] 물론, 이러한 ‘미국의 범위’는 남한이 미국의 영향권 내에 머물러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므로, 이 범위 안에서는 기본적으로 보수적 편향이 작동하게 마련이다.

     한편, 남한 정부의 수립과 한국전쟁에서의 생존은 물론이고, 남한 사회의 근대화 과정 자체도 미국의 막대한 영향 아래서 이루어졌다. 일본에서의 해방과 한국 전쟁을 겪은 직후, 남한 사회에서 미국이 주력한 일은 근대적 교육 제도와 관료제의 수립과 언론의 발전을 지원함으로써, 이 제도들을 통해 미국의 이상인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자본주의를 남한인들에게 이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각주:22] 또한, 미국은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를 세우고,[각주:23] 사관학교가 세워진 이후에도 여러 연수 과정을 통해 남한군의, 특히 장교단의 군사적 능력과 리더십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각주:24] 그 결과, 남한군 장교단은 군사적 능력뿐만 아니라 관료제 운영의 노하우와 지식도 갖추게 되면서, 자신들을 국가 안보뿐 아니라 경제 발전도 지도할 능력이 되는 집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고,[각주:25] 박정희의 5.16 쿠데타는 이러한 경향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것이기도 하다. 또한, 경제적 근대화에 대한 박정희의 열망은 미국이 5.16 쿠데타를 지지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각주:26]

     1950년대의 미국의 개입이 위에서 본 것처럼 근대 국민국가의 기본 시스템 – 교육, 관료제, 군대 등 – 을 확립하는 데 주력한 것이었다면, 1960년대에는 미국은 남한의 민족주의 세계관을 확립하는 데 주력 지원을 했다. 미국이 남한의 민족주의 세계관으로 제안한 것은 ‘근대화 이론’이었는데,[각주:27] 이 이론은 남한과 같은 ‘저발전’ 국가의 근대화는 오직 전통적 요소를 배격하고 미국과 같은 ‘발전된’ 서구 국가와 연계될 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각주:28] 이 이론에서, 근대화는 저발전 국가가 기술적 지식을 모방하고 흉내내어 익힌 뒤 그 기술적 지식을 사용함으로써 걷게 되는 발전의 보편적인 길로 이해되었다.[각주:29] 그리하여, 미국이 제안한 근대화 이론은 탈식민 국가들에게 공산주의적 발전경로에 대한 대안의 구실을 했다.[각주:30]

     남한의 지식인들은, 비록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적 요소의 적극적 역할을 더 많이 찾으려 하긴 했어도,[각주:31] 위에 서술된 바와 같은 근대화 이론을 널리 수용했고, 그로 인해 민족주의와 반공주의의 결합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경향은 더 심화되었다.[각주:32] 그 결과, 박정희 정부를 근대화의 리더로 인정하는 지식인 그룹도 형성되었다.[각주:33] 그러나, 근대화 이론을 수용한 다른 지식인들 중에는, 근대화 개념이 독재정치를 시작한 박정희 정부에 대한 저항의 근거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도 있었다.[각주:34] 짚어 볼 점은 근대화 이론에 대한 이 두 가지 반응이 앞에서 언급한 ‘미국의 범위’ 안에 이미 포함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미국이 근대화 이론을 제안한 의도 자체가 경제적 근대화 과정을 가속하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에 대한 남한인들의 열망을 불러일으켜 박정희 정부를 견제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각주:35] 요약하면, 미국은 남한 사회의 거의 모든 방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했으며, 특히 제도적, 지성적 측면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 웹진 <제3시대>


  1. Shin, Gi-Wook. Ethnic Nationalism in Korea: Genealogy, Politics, and Legacy.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6, 155 [본문으로]
  2. Ibid. [본문으로]
  3. 이기백, 한국사신론. 제2판 (서울: 일조각, 1976), 442 [본문으로]
  4. Shin, ibid., 101 [본문으로]
  5. Ibid. 102~103 [본문으로]
  6. Ibid. 78 [본문으로]
  7. 김보현, 박정희 정권기 경제개발 (서울: 갈무리, 2006), 83~88. [본문으로]
  8. Ibid., 122~123 [본문으로]
  9. Shin, ibid., 103~104 [본문으로]
  10. 김보현, ibid., 122 [본문으로]
  11. Shin, ibid., [본문으로]
  12. 김보현, ibid., 140~144 [본문으로]
  13. 김보현, ibid., 153 [본문으로]
  14. Shin, ibid., 107 [본문으로]
  15. Ibid [본문으로]
  16. Ibid. 160 [본문으로]
  17. Ibid. 162 [본문으로]
  18. 김진호, 시민 K, 교회를 나가다(서울: 현암사, 2012), 68 [본문으로]
  19.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제2권(서울: 나남, 1996), 523 [본문으로]
  20. Ibid. 523~524 [본문으로]
  21. Ibid. 524~526 [본문으로]
  22. Brazinsky, Gregg. Nation Building in South Korea: Koreans, Americans, and the Making of a Democracy.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7, 41 [본문으로]
  23. Ibid., 73 [본문으로]
  24. Ibid., 79 [본문으로]
  25. Ibid. 100 [본문으로]
  26. Ibid. 118 [본문으로]
  27. 정일준, "한국 사회과학 패러다임의 미국화" 원용진, 김덕호 엮음,아메리카나이제이션(서울: 푸른역사, 2008), 339~340. [본문으로]
  28. Ibid. 348~349 [본문으로]
  29. Ibid. 351~352 [본문으로]
  30. Ibid. 350 [본문으로]
  31. Brazinsky, ibid, 172 [본문으로]
  32. Ibid. 177 [본문으로]
  33. Ibid. 178 [본문으로]
  34. Ibid. 184 [본문으로]
  35. Ibid, 186~18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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